^-^ 思開/書畵理論
[스크랩] 예술(?)의 이해와 겸손
멍석- meongseog
2007. 12. 21. 16:47

중국 전국 시대 때 초나라 태생인 유백아는 성연자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스승 성연자는 제자인 백아에게 수년 동안 음악 기초를 배우게 했다.
그런 다음에 태산으로 그를 데리고 올라가서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우주의 장관을 보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봉래의 해안으로 데리고 가서는 거센 비바람과 휘몰아치는 도도한 파도를 보여주면서,
바다와 비바람 소리를 들려주었다.
백아는 스승의 이러한 지도로 비로소 대자연의 어울려 화합하는 음성과 신비하고 무궁한,
조화된 자연의 음악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련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백아는 저 위대한 금곡인 천풍조와 수선조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백아에게는 입신 출세의 길이 열려 진나라에 가서 대부의 봉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금예가 도달한 참된 경지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음악가로서 그의 불행이었으며, 견디기 힘든 고독이 아닐 수 없었다.
백아는 진나라에서 20여 성상을 보낸 다음 고국에 돌아와
자기에게 음악의 진경을 터득케 해 준 스승 성연자를 찾아갔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음악이 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스승은 돌아가시고
고금 일장만 유언으로 남아 백아를 맞이해 주었다.
백아는 몹시 상심하여 강을 따라 배를 저어 갔다.
때마침 언덕에는 가랑잎이 지고,
강을 따라 갈대밭에는 갈대꽃이 만발하여 고독한 나그네를 더욱 수심에 젖게 하였다.
백아는 기슭에 배를 대고 뱃전에 걸터 앉아 탄식어린 거문고 한 곡을 탄주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스럽게도 어디선가 바람결에,
유백아가 뜯는 거문고의 탄식에 맞추어 사람의 탄식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이 깊은 가을 밤 넓고 적막한 강 기슭에 누가 나의 탄식 깊은 거문고를 들어주었단 말인가?
그 때 백아 앞에 나타난 사람은 땔나무를 해팔며 사는 가난한 나무 꾼이었다.
그는 땔나무를 하기 위해 산천을 다니며 평생을 사노라
자연의 음성과 자연과 교감하는 음악의 참된 경지를 알아들을 줄 아는 종자기란 사람이었다.
백아는 수십 년 만에 비로소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나지라
거문고의 줄을 가다듬고 줄을 가다듬고 아끼는 수선조 한 곡을 뜯었다.
백아가 수선조를 다 뜯고 나자, 종자기는 ‘참으로 훌륭합니다.
도도한 파도는 바람에 휘말려, 넘실거리며 흘러가고 있군요’ 라고 말했다.
백아는 이처럼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감상해 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천풍조를 다 감상하고 나서 ‘장엄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군요.
가슴 속엔 해와 달을 거두어 들이고, 발아래는 무수한 별무리를 밟고 서 있군요.
높으나 높은 상상봉에 의연하고 도저하게 서 있군요’라고 말하지 않는가.
어찌 더 이상 주고 받을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두 사람은 그대로 서로를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닌가.
유백아와 종자기는 다음 해에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헤어졌다.
때가 되어 백아는 종자기를 찾아갔으나, 종자기는 병들어 죽고 없었다.
백아는 종자기의 무덤을 찾아가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는 칼을 들어 그의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자신의 음악을 알아 주는 오직 하나뿐인 그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다시 거문고를 뜯어 무엇하냐고 백아는 슬퍼했다.
오직 한 사람. 자기 예술을 알아주고 서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평생의 배필을 구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진실로 통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일생을 가늠하는 행운이기도 하다.
예술의 길은 험난하고도 끝이 없는 고독과 고통이 수반되는 길이다.
내가 진정 부러워하는 것은 제자 하나를 키우기 위하여 태산에 올라 우주의 장관을 보여 주고
봉래를 찾아가 바다의 교향곡을 들려줄 수 있는 성연자와 같은 스승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스승이 될 수 없으려니와, 음악을 깨우치는데
대자연의 소리가 필요하다고 보았던 성연자의 위대한 교육 철학이 또한 얼마나 위대한가.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나의 시를 제대로 알아 주는 사람이 없다고 슬퍼하기도 한다.
그러나 참으로 어딘가 내가 모르는 데서,
내가 쓴 한 줄의 시를 제대로 알아 주는 종자기와 같은 독자 한 사람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어찌 나뿐이랴. 모든 시인들이 갈구하는 바 또한 종자기 같은 독자를 얻는 일이 아니랴.
오직 한 사람. 참으로 제자를 제대로 키우고자 하는 스승도 오직 한 분이면 족하리라.
성연자 같은 오직 한사람의 스승을 얻을 수 있는 행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예술을 하는 백아 같은 제자가 될 수 있는 행운,
그리고 또 종자기처럼 음악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행운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유안진의 수필 중에서>
백아와 종자기는 오늘날 상대를 헐떳고 무시하기 쉬운 현실에 좋은 본보기인 것 같다.
참된 칭찬은 상대를 제대로 이해할 때 저절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런지...
천재 음악가인 슈벨트가 산책을 하는 중에 어느 요정에서 쉬게 되었다.
그는 선반 위에 놓인 셰익스피어 전집을 뒤적이다가 문득 그 속에 떠오른
한 소절의 시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시구를 메모하여 오선을 그린 다음 그곳에 악상을 그려 넣었다.
이것이 유명한 '들어라 종달새'이다.
이렇게 천재적인 요소가 다분한 그였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자신이 천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의 곡이 박수 갈채를 받으면 그때마다 '그것은 가수가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이다'
또는 '저 곡의 가사는 괴테의 위대한 시 덕분이다.'라고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내세우지 않은 겸허한 사람이었다.
겸허하다는 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다.
자신이 어느 누군가를 섬긴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자신을 격하시키라는 의미가 아니다.
원래의 자신은 그 자리에 있고 다만 상대방만 높여 준다는 의미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높이는 지름길인 것이다.
성서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태복음 23장 12절 )
또한 노자의 도덕경이 이런 구절이있다.
“곧으려거든 몸을 구부리라. ,
스스로는 드러내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존재가 밝게 나타나며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는 까닭에 그 옳음이 드러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을 이루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름이 오래 기억된다
무릇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서 아무도 그와 다툴 수가 없다.
'구부러지는 것이 온전히 남는다'는 옛말을 믿어라.
진실로 그래야만 사람은 끝까지 온전할 수 있다.“
曲則全, 枉則直,
不自見, 故明, 不自是, 故彰, 不自伐, 故有功, 不自矜, 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그리고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유명한 체스터필드는
나는 지금 누구에게나 겸손할 수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데, 이것도 하나의 교만이다.
겸손을 의식하는 동안에는 아직 교만의 뿌리가 남아있는 증거이다."고했다.
자신의 겸손마져도 의식하지 않는 겸허함이 몸에 베일 때
그 때야말로 참다운 인격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합 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