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판전과 투항장으로 보는 단순미
投名狀
2007년 12월초 중국에서 개봉한 영화제목이다.
이연걸, 유덕화, 금성무, 서정뢰가 주연한 큼지막한 영화이다.
투명장, 우선 제목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자.
전쟁시 군사지도자를 의미하는 Warlord의 복수형으로
이연걸, 유덕화의 관계를 암시한다.
그럼 중국어인 投名狀 tou ming zhuang 은 무슨 뜻인가?
이 단어는 이름을 던지는 증명서 즉 귀순문서, 투항장을 의미한다.
잠시 중국어와 한자를 읽히고 넘어가자.
우리말의 상장賞狀, 중국어의 奬狀
우리는 상장이란 말을 흔히 쓰면서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른다.
상장이란 장려하는 증명서를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어와 우리말의 상장이 한자로 다르다는 것이다.
賞狀으로 한국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상줄 상賞은
중국어에서 상주다는 의미보다는
작품을 감상한다는 의미인 欣賞으로 사용한다.
상장의 의미로는 奬을 쓴다.
우리말의 상장을 중국어에서는 장려할 장奬 으로 쓴다.
상품은 奬品 jiang pin, 보너스는 奬金 jiang jin 이다.
공통적으로 狀을 사용하는데 여기서의
상의 의미는 증명성를 말한다.
삼성특검이니 이명박 특검이니, 요즘 특검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특검은 검찰이 잘못 처리했다고 여겨져 특별한 검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일종의 고소장이다.
여기의 상狀은 하소연하는 증명서,포장이나 위임을 하는 증서를 의미한다.
중국어에서는 고소장을 訴狀 으로 쓴다.
狀 모양 상, 증명서 장
모양이나 형상을 의미하는 뜻으로는 상으로 발음되고
증명서를 의미하는 뜻에서는 장으로 발음되는 것을 주의해야한다.
네가지 성조를 구분해서 외워야 하는 중국어는 초기에 배우기가 어렵다.
반면 한국어는 처음에 배우기는 쉬우나 뒤에 한자의 각기 다른 의미를
같은 한글 문자로 쓰는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맥을 통해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차이가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
이연걸, 유덕화, 금성무, 서정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연걸
비극적인 인물인 청운靑雲역을 맡았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사람인지 확실히 정의하기 힘든 역을 잘 소화했다.
유덕화
어떤 책도 읽은 적이 없는 도적 조이호趙二虎로 등장한다.
아주 단순한 인물이다. 사랑은 사랑이다. 즐거움은 크게 웃는 것이다.
그는 한평생 그가 믿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다.
금성무
그는 야수의 모습을 갖고 있다. 매서운 칼날 같다.
한편 서정적이고 포용적이며 호방한 성격도 가진 인물을 맡았다.
서정뢰
이 영화에서 주로 형제간의 정을 다루는데 유일한 여자 중인공이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요한 작용을 한다.
그럼 투명장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감독은 이 투명장이란 제목을 통해
이연걸에게 지도자의 자리를 넘기는 유덕화의
단순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알린다.
요즘 사회에서 보기드문 미美를 조용히 이야기 한다.
1870년 가을, 홀로 강소성을 순시하던 청운靑雲(이연걸)은
두명의 도적과 한 여인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들로 인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뀐다.
성공을 위해 달리고 좋은 업적을 성취하지만,
반면, 그 업적으로 인해 그는 최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 두 명의 도적은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형제였다.
유덕화는 금성무를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이 위기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득실을 계산하지 않고 지도자의 자리를 이연걸에게 넘긴다.
趙二虎(유덕화)의 단순함, 순수함이 돋보인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趙二虎의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믿음이다.
소주성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쇠사슬에 묵여 통곡하는 모습,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믿음을 져버리게 되는
상황에서의 절규와 통곡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요즘 세상에는 이런 인물이 없다.
자신의 득실을 따져서 움직이는 것이 옳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바보가 되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조선시대 후기 한 서예가의 인생을 통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서울 봉은사의 판전
이 글씨를 처음 접하였을 때가 생각난다
구양순 글씨만이 최고인 줄 알던 편협한 미감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직접 서울 봉은사에 가서 봤다.
뭐 이런 글씨가 다 있나?
내가 발로 써도 비슷하게 쓰겠다.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밖에 나와서 안을 보게 되면서,
미학에 관한 책을 읽고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을 해 오면서,
한국미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면서,
정말 대단한 역작이라는 생각으로 전환되었다.
유홍준 선생님께서 영남대 교수이셨을 때
산사의 미에 대한 특강을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판전의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있다"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런 작품이다."
처음 판전 글씨를 접했을 때 처럼
판전 글씨에 대한 매력을 못 느끼시는 분들을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다시 글씨를 보자.
최근 중국에서 개봉된 투명장 영화 포스터의 글씨
영화를 보기 전,
투명장 글씨를 보는 순간, 특히 투投를 보았을 때
추사의 판전이 떠올랐고, 아이같은 글씨에 호감을 느꼈다.
영화내용을 알고 나서는
趙二虎(유덕화)의 순수함, 단순함이 가슴 한자리의
허전했던 부분을 채워주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 토우밍찌앙 의 글씨
투명장 세 글씨 모두 어리석고, 멍청하고 순수하며,
단순하고 치졸한 맛을 주지 않는다.
추사의 판전을 떠오르게 한 것은 바로 투投 자였다.
명名과 장狀 에서는 기교적인 느낌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狀 과 비교하자면
파임(오른쪽 맨 마지막 획)의 뾰족한 세련미를
뭉뚱하고 텁텁하게 처리한 모습이다.
판전의 판板
널조각을 의미하는 판板의 서체미를 살펴보자.
판전의 전殿전
대궐을 의미하는 전殿의 서체미를 살펴보자.
이제 다시 봉은사의 추사의 판전을 읽어보자.
봉은사의 추사 글씨 판전
시도유형문화재 제83호
봉은사 김정희서 판전 현판 (奉恩寺 金正喜書 板殿 懸板)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현판류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1992.12.28
소 재 지 서울 강남구 삼성동 73
서울특별시 강남구 문화공보과 02-2104-1262
판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말년 작품으로
작품 왼쪽에는 「71과(과천)병풍작」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정희는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제자이다.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김정희는 순조 9년(1809)에 생원이 되고,
순조 19년(181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고증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였다.
전해오기로는 그가 「71과(과천)병중작」이란 글씨를 쓴 3일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죽은 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최근 소설가 한승원 선생은
어지러웠던 시대의 영웅이라는 이미지에 감춰져 있던
이순신의 인간적인 미를 끌어냈듯,
'오만한 천재' 추사를
'개혁적 지식인' 추사, '범속한 인간' 추사로 재탄생시켰다.
추사가 남긴 작품들 중에서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의 느낌에 제일 가까운 것이 바로 판전 이다.
천재 예술가로,
화려하지만 비운했던 정치가로
조선 후기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우리는 추사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 좌절과 오랜 유배 --- 타협할 줄 모르고 오만한 천재. "
"명문가 출신 --- 시·서·화 삼절에서 현묘한 경지 오만한 천재"
하지만 추사는 판전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적인 미를 말해주고 있다.
말년의 삶을 중심으로 고독과 좌절, 분투 속에서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로서 추사,
서얼 자식을 둔 한스런 아비
속된 인간으로서 추사의 면모를
판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판전이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는 이유이다.
추사는 말년에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과천 초당에 은거했다.
"하늘과 땅이 감응하도록 써야 한다"
'판전((板殿·경판각을 저장하는 전각)'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 일생에서 가장 소박하고 향기로운 보석 하나"
"이러다가는 이 글씨를 쓰지도 못하고 죽게 될 듯 싶다.”
그는 결국 숱한 파지를 만들며 고뇌 끝에 판전이라는 최후의 명작을 남긴다.
신선이 남긴 것과도 같은 영험한 그의 작품들은
그의 천재적 소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배지의 절대 고독과 고뇌, 좌절과 절망, 분투를 통해 완성된 것이다.
1800년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추사의 시련을 통해
순종, 헌종, 철종으로 이어진 무너진 조선 후기 왕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에서 실학의 싹이 잘 커져 근대화가 성공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추사는 6세 때부터 스승인 박제가로부터 이용후생의 경학을 배웠다.
24세 때(1810) 중국 연경에서 근대문명을 견문했던 북학파 선구자였던 추사.
그는 외척의 세력을 제치고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려는 개혁을 꿈꾸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을 장악했던 보수세력 안동김씨 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말년(55세 1840년)에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절대 고독과 싸움이기도 했으며,
정치가로서 품었던 높은 욕망과 싸움이기도 했고,
한 인간일 뿐인 자기 자신과 싸움이기도 했다.
추사는 과거로부터 떠나 마음을 비우고 시와 그림에만 몰두했다.
걸작 '세한도', '불이선란'은 제주 유배지에서 탄생했다.
불이선란
추사의 50대 후반 이후의 삶은
"잘못 흘러가고 있는 역사를 제대로 흘러가게 하려다가
보수 반대파들에게 당한 고난의 삶"인 동시에
절대 고독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꿈'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며 절대 고독 속에서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기간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추사는 지극히 속된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사실적 묘사가 '인간 추사'의 사실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추사는 생계를 위해 글을 파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유배지에서도 탈속한 예술인이 아니다.
사약을 받을까 봐 두려움에 떠는 속된 인물이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추사는 젊은 첩을 말 등에 태우고
즐거움에 빠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단순하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이다.
추사는 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예술가로서
또 정치가로서 사회를 개혁하려 했던 그 시대 지식인이었고,
그런 지식인은 지금 시대에도 필요하다.
추사를 주저앉힌 보수세력은
오늘날, 이 땅의 어떤 거대한 보수집단을 닮았다.
역사는 반복된다.
세한도 歲寒圖
<완당세한도〉(부분), 김정희가 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그린 문인화(1844),
국보 제180호, 23×61.2cm, 손창근 소장
세한도의 머리글(제문)에는 완당이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완당에게 늘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는
우선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세한도가 제작된 배경을 알게해 준다.
세한도 머리글
藕船是賞 阮堂
우선(藕船)은 감상하시길, 완당(阮堂)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上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작년에 <만학(晩學)>과 <대운(大雲)> 두 권을 부쳐 주시고
올해 또 <우경문편(藕耕文編)>을 부쳐 주셨구려.
이 책들은 모두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니라 천만리의 먼 곳에서 구한 것으로
순간의 시간이 아니라 많은 노력을 기울여 얻은 것임을 잘 알고 있소.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爲之, 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세상의 물결은 오직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는데
그대는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 않고 마음과 힘을
바다 밖의 한 초췌하게 마른 사람(추사)에게 쓰시니
마치 세상에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 사람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힘쓰는 것 같이 열심이구려.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은 “권세와 이익으로 맺은 사람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멀어진다.”
라고 하였는데 그대도 역시 세상의 흐름 가운데 있는 사람이면서
도리어 그 초연함이 도도한 권리 밖으로 나와 있는 것 같으니,
이는 권세와 이익으로써 나를 대하지 않음이란 말이오?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이요?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공자께서는 “날이 차가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듦을 안다.”
고 하였소. 송백은 사철 시들지 않는 나무로
세한 이전에도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똑같은 송백이지만
성인은 특히 세한 이후의 송백을 칭찬하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은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을 것 같구려.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그래서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후의 그대는 성인으로부터 칭찬 받을 만 하다고 사료되오.
성인이 특별히 칭찬하는 것은
다만 나중에 시드는 정조貞操와 굳은 절개節槪만이 아니라
세한에 이르러 느껴 나타내는 바가 있기 때문이요.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아아! 순후한 서한西漢 시대의 급암汲黯 1과
정당시鄭當時 2와 같은 현인도 빈객에 따라서 성쇠하였고
하비방문 3 같은 것은 절박함의 극이었오.
참으로 슬프게 하는구려. 완당(阮堂).
주석
1. 급암汲黯: 한나라 시대의 관리로 자(字)는 장유(長孺).
무제(武帝)때 동해(東海)의 태수(太守)를 거쳐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다.
성정이 엄격하여 직간(直諫)을 잘 하였다.
2. 정당시鄭當時: 한나라 시대의 관리로 자(字)는 장(莊)임.
협객 모으길 좋아하였으며 제남(濟南) 태수(太守)와 우내사(右內史)를 거쳐
무제(武帝)때는 대농령(大農令)에 이르렀다.
3. 하비방문下邳榜門 :
하비下邳 : 한나라 삼국시기의 지명, 지금의 강소성 묘녕서북쪽의 땅.
그 기원은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시대 제나라 위왕은 구기를 하비땅의 제후로 봉한다.
이 때 부터 하비라는 지명이 생겼다. 뒷날, 한나라가 천하를 평정한 뒤
담군을 동해군으로 개명하고 38현으로 나누었다. 바로 동해군의 수도가 하비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하비는 병가들의 전투의 요충지가 된다.
방문榜門 : 방을 붙여 공개적으로 관리, 직책를 파는 것을 의미한다.
판전, 불이선란, 세한도
한 시대를 살아간 삶과 그 삶을 엿볼수 있는 그의 작품.
유배지에서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비우고 차와 연꽃과 벗한 결과이다.
최근 한국 근대미를 밝히고 있다.
그 과정 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살아간 흔적을 보고
그 흔적을 통해 아름다움을 넘겨짚어본다.
이제 대선이 하루 남았다
진정 이해득실 계산없이 국민을 위하는 단순한 사람,
믿음을 소중히 여기는 순수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2007년 12월 17일 중국 산동대학교에서
마지막으로 blog.joins.com/isomkiss 에서
빈섬님의 판전에 관한 글을 소개합니다.
추사가 가시기 사흘전에 쓰셨다는
봉은사의 판전 이야기
침계 윤정현의 제자의 제자뻘 되는
상유현이란 분이 쓴 추사방현기에는
봉은사 시절의 추사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추사는 머리를 깎고 중들이 쓰는 둥근 모자를 썼으며
손에는 한줄의 염주를 쥐고 만지며 굴리고 있었다.
추사는 마침 탁자에다 세편의 서련을 써놓고 볕에 쬐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대련 중 하나가 유명한 춘풍대아였다.
그는 상유현을 비롯한 방문객들에게 윤정현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 침계공은 기거가 편안하신가?”
이 목소리에 유홍준도 깜짝 놀랄 만큼 생생함을 느꼈다지만
나 또한 육성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어 상유현은 추사가 발우공양하는 모습,
그리고 불로 지져 참회하는 자화참회 모습까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참회의식은 受戒수계를 의미하니 추사는 이로써
스님이 되는 절차를 밟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왜 말년에 불문에 들었을까
세상에 대한 환멸과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가 이런 결단을 내리게 했을까
그가 북청 유배 이후에 과천에서 살던 시절은
이제 모든 시름이 지나간 뒤의 평온이 느껴지는 삶이었다.
추사체는 가장 개성적으로 금석기를 갖추면서
모든 법을 소화한 뒤 그것을 뛰어넘는 천연의 괴를
마음껏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는 죽음을 맞는 그 해에 스님이 되려했을까
젊은 시절 초의와 격의없이 어울렸고, 당대의 대선사인 백파와
격렬한 논쟁을 벌리며 불교에 대한 진리를 묘파해 나간
경험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결단을 모두 설명할 순 없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난 그의 심회를 짐작해 보면
고난과 격정의 삶을 살다간 한 지식인의
깊고 쓸쓸한 염증같은 것이 느껴지는 건 나 뿐일까?
당시 봉은사에서는 영기라는 스님이 화엄경 80권을 손으로 베껴 쓰고
이를 목판으로 찍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화엄경판이 완성되어 경판전을 짓고
보관하게 되자 그 현판 글씨를 추사에게 부탁한다.
추사의 마지막 글씨가 된 판전은
대자로 별다른 기교없이 천진하게 써내려간 것이 인상적이다.
유홍준은 이런 글씨에 대해
不計工拙불계공졸도 뛰어넘은 무심의 대작이라고 격찬한다.
불계공졸이란 잘되고 못됨을 따지지 않는 초월적 경지를
말하는데 추사가 작품의 낙관에 썼던 문귀이다.
유홍준은 또 이 글씨가 여덟살 때 아버지에게 썼던
편지 글씨와 닮았다면서 글씨가 다다를 수 있는
온갖 寄峰기봉을 돌고돌아 마침내
육십여년 전의 첫 마음으로 돌아온
추사체의 천진으로의 윤회를 발견했다며 스스로 감동한다.
이 대목엔 멋진 울림이 있다.
판전의 글씨가
저 엄격한 스타일리스트가 써낸
마지막 무기교의 정수이기에 우연히
아이 글씨와 대조해 봤으리라,
내가 보기엔 아주 닮진 않고, 그저 순정한
붓놀림이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엄의 진리를 담는 방
이 방에 이름을 써줌으로 탄생된 판전,
이 마지막 추사체는 지금도 봉은사에 가면 볼 수 있다.
숱한 곡절을 지나 순정한 文字碑문자비로 다시 태어나는
저 서체의 유전 앞에서 나도 숙연하게 옷깃을 여미고 싶다.
부처를 천축고선생이라 부르기도 했던
해학적이고 인간적인 그의 불교관은
마지막 그를 편안하게 붙들었을까?
스님이 된 말년의 추사를
비교적 고요한 마음으로
살피게 해 준 유선생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