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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글서예/방가 본체

멍석- meongseog 2008. 1. 1. 16:22
1.1 글자의 모양새를 일컬어 서체(書體), 자체(字體), 필체(筆體)등으로 나뉘어 사용되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설명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을 살펴보면, 서체(書體), 자체(字體), 필체(筆體)라는 용어가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먼저 이들 사이의 관계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서체(書體)는 자체(字體)와 필체(筆體)를 포괄하는 상위의 개념이다.
2) 자체(字體)는 생활상(生活上) 필요에 의하여 발달한 서체이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인간이 생활하면서 가지게 되는 필요나 요구도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가 문자 사용 방식에서도 일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발생·정착한 것을 자체(字體)라고 지칭하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자체는 사회 생활상의 소산물이며, 객관적 형태의 서체이다. 이들 자체(字體)를 한자, 영자, 한글 등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한자(漢字)의 경우 오체(五體) 곧 전서체(篆書體), 예서체(隸書體), 해서체(楷書體), 행서체(行書體), 초서체(草書體)라고 지칭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영자(英字)의 경우에는 활자체, 필기체, 고딕체, 이탤릭체 등등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한글의 경우에는 반포체(頒布體), 궁체(宮體), 사서체(寫書體), 판본체(版本體) 등이 있다.
3) 필체(筆體)는 예술상(藝術上)의 필요에 의하여 발달한 서체이다. 비록 동일한 자체(字體)를 사용하면서도 개인의 개성적이고 독특한 취향에 따라, 운필의 기법이나 기풍을 달리함으로써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예술적 소산물로서 결과를 보여주는 특징을 갖는다. 이 점에서 본다면 앞서의 자체(字體)가 객관적 형태의 서체라고 한다면, 필체(筆體)는 주관적 형태의 서체라고 하겠다. 가령 왕희지체, 구양순체, 송설체, 석봉체, 추사체 등등으로 지칭하는 서체가 바로 필체에 해당한다 하겠다. 또한 서예 또는 서도를 할 때에 언급하는 서풍, 필법, 서기, 서품 등도 개인적 취향의 미적 표출이라는 점에서 넓게 본다면 필체에 속한다 하겠다.

그렇다면 한글의 자체(字體)는 어떠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왔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상헌(李相憲) 선생이 국문서체의 분류 체계를 시도한 이후, 다양한 설명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는 김일근(金一根) 선생의 <언간의 연구>를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한다.

1) 반포체(頒布體/正音體/版刻體/版刻本體):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반포되던 당대의 한글 자체(字體)를 말한다. 이는 이후에 동국정운(東國正韻)에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경언해 등의 작업에 주로 사용하였던 자체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반포체를 사용하는 실용화의 단계를 가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안해서 그린 문자라는 성격 때문에, 당대의 필기구인 붓으로 서사(書寫)를 함에는 비경제적이라는 단점은 있으나, 형태를 해독함에 있어서는 후대에 사용한 자체에 비하여 편리하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2) 모방체(模倣體/效嚬體):
반포체가 글자를 빨리 쓰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는 점에서 속필(速筆)을 위한 새로운 서사체(書寫體)를 요구함은 당연한 결과이다. 주로 한자의 행서나 초서, 몽고문자 내지 만주문자 등을 참작하여 임란 이후 급진적인 생활속도의 변화에 따른 서사의 신속화를 도모한 자체이다. 그러나 서사에는 편리하였으나 해독에는 곤란함이 있었다 하겠다.

3) 궁체(宮體/宮書體):
반포체와 모방체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훈민정음의 고유성에 걸맞는 이상적인 자체를 요구한 결과 나온 서체라 하겠다. 이들 궁체의 발달에는 궁중의 서사상궁(書寫尙宮)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숙종의 언간에 사용한 자체는 필흔(筆痕)을 남기지 아니한 정서(精書)로 남필(男筆)의 표본이라면, 흘림으로 섬세하게 써내려간 인현왕후의 언간이나 인선왕후의 언간은 여필(女筆)의 표본이라 하겠다. 엄정하고 단아하고 미려하며 원만함을 추구한 자체(字體)로 국문 서체의 한 이상향을 찾아간 서체라 하겠다.

4) 잡체(雜體/民體):
궁체가 발생한 이후, 궁체와 교섭을 갖지 못한 여항의 민초들이 자기류로 쓴 자체(字體)로 비교적 소탈하고 꾸밈이 없으나 자기류로 썼다는 점에서 잡스러운 민체라 하겠다.

5) 조화체(調和體): 국한문(國漢文) 혼용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파생한 자체이다. 주로 한학자들의 언문 필적과 국한혼용 필적이 이에 해당하며, 한자의 자체와 조화를 위한 것으로 한글은 항상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2 초창기 한글의 형태는 한자의 서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오히려 한자의 형태와 조화를 이루는 서체를 만들게 되었다.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활동을 하여 왔다. 그러나 언어 행위가 단순히 말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면, 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부터 언어는 그리고 언어를 매체로 하는 제반 행위는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같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 의지는 말이 가지고 있는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 문자 곧 글자라는 매체를 찾아냈다. 이러한 문자 체계의 등장은 자연발생적인 양상을 띄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우리글인 훈민정음 곧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의 등장은 인위적인 창제라는 점에서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하겠다.

우리의 경우, 말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 한때 한자를 가져다 쓰기도 하였지만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새로운 문자 체계의 창제라는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바로 훈민정음(한글)의 창제가 이에 해당한다. 훈민정음의 문자 체계 안에는 우리말에 사용하는 소리에서는 그다지 변별적 자질을 가지지 못하는 음가를 나타내기 위한 문자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훈민정음이 추구한 문자 체계는 창제 당시에 알고 있었던 주변의 모든 언어에서 나타나는 소리를 적기 위한 문자 체계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비로소 <우리말을 기록한다> 곧 <한글을 쓴다>라는 행위가 가능해졌다. 이전까지의 쓴다는 행위는 모두 <한글을 쓴다>는 것이 아니라 <한자(漢字)를 쓴다>는 행위였다는 점에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한글을 쓴다>는 새로운 행위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 점에 주목하여 국어사나 문학사를 기술함에 있어 한글 창제를 시대 구분의 기준점으로 삼기도 하였다. 조윤제의 『國文學史』를 비롯하여, 가장 최근의 연구 성과인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사들이 이를 시대 구분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자라는 매체를 가지고 기록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기록 행위라는 점에서, 결국 말하기보다는 글쓰기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기에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제 우리말을 우리글로 곧 우리 문자인 한글로 기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기록 행위의 중심은 <한글로 쓰기>가 아닌 <한자로 쓰기>였다. 한글로 기록하는 것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자로 기록하는 것이 중심이 되었으며, 한글로 기록하는 것은 여전히 보조적인 단계에 머무르게 된 것이었다. 한글로 기록하는 것이 주(主)가 되건 종(從)이 되건, 이것은 모두 한자와 한글을 함께 기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글의 외양적 형태 곧 한글의 서체(書體)는 한자의 외양적 형태 곧 한자의 서체(書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훈민정음을 창제하던 당시에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그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한글의 모아쓰기 방식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모음의 위치가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둘로 나누어져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곧 ‘ㅣ’모음 계열의 형태는 초성의 오른쪽에 쓰고, ‘ㅡ’모음 계열의 형태는 초성의 아래쪽에 쓰는 모아쓰기가 이를 말해준다. 이는 결국 한글의 외양적 형태(書體)를 네모 반듯하게 하여 한자의 외양적 형태(書體)와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 하겠다.
초창기에 한글을 사용한다는 것은 한자와 함께 한글을 사용하는 작업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언해본』 등이다. 한글을 한자와 함께 사용하기라는 작업은 이후 한문 전적의 언해 사업 등을 통하여 그 구체적인 양상을 드러내게 되며, 한글만 사용하기라는 작업이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1.3 한글만을 사용하여 인쇄된 문헌의 대표가 바로 '방각소설(坊刻小說)'이다.

결국 한자와 함께 사용하는 한글이 아닌, 한글만 사용하기라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부분은 편지 쓰기나 일기 쓰기 등과 같은 개인의 일상적인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글만을 사용한 개인적이며 일상적인 문헌이 당대에 인쇄된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한글만을 사용한 문헌이 인쇄된 형태로 나타난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방각소설(坊刻小說)이다. 물론 방각소설 간행 이전에 한글로만 쓴 문헌을 간행한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闡義昭鑑諺解(1756년)』, 『種德新編諺解(1758년 이후)』, 『明義錄諺解(1777년)』 등의 간행 洪允杓, 『國語史 文獻資料 硏究 (近代篇Ⅰ)』, 太學社, 1993. 은 방각소설 간행 이전에 한글로만 쓴 문헌을 간행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의소감언해』는 개주한 갑인자를 사용하여 1756년 8월 이전에 활자본으로 간행하고, 1756년 8월에 광주부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한다. 4권 4책으로 된 목판본을 보면, 활자본의 영향을 그대로 볼 수 있다. 활자본으로 인행한 것은 활자의 특성 때문에 세로뿐만 아니라 가로까지 모두 정연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특징을 목판본에서도 그대로 살필 수 있다. 더군다나 소자(小字)를 사용한 부분을 판각한 방식을 보면 글자의 높이 곧 세로는 크기가 같고 가로 곧 글자의 폭을 절반으로 줄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는 비록 순 한글로만 판각된 문헌이라고는 하지만 원고본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 개주갑인자본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한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한글 판각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겠다.

『종덕신편언해』는 상·중·하 3권 2책의 목판본이다. 이는 『종덕신편』을 1758년에 간행하고 이어서 언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 역시 위의 『천의소감언해』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세로는 그 기준을 가지런하게 하고 있으나 가로로는 조금씩의 넘나듦이 있어 한자와 함께 쓴 한글 문헌이라는 성격을 조금은 가지고 있으나 활자본 방식의 조판이라는 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느낌을 주지는 아니한다.
『명의록언해』는 정유 한글 목활자본으로 간행하고, 이를 다시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 역시 활자본이라는 점에서 한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겠다.

이러한 문헌 가운데 방각소설 간행과 관련하여 주목할 문헌은 1852년에 간행한 『태상감응편도설언해』이다. 이는 순 한글 문헌은 아니다. 한문을 먼저 수록하고 이를 언해할 때에 한글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때 나타나는 한글의 각자(刻字) 방식이 방각본과 매우 유사함을 보인다. 한자 활자와 함께 사용하던 한글 활자를 사용하여 인행한 순 한글 활자본이라는 형식으로부터 벗어나, 한글만을 써서 판각하는 것이 어떠한 모습을 보일 것인가를 보여주는 자료라 하겠다. 그러나 이것의 간행연도가 1852년이기에, 이보다 앞선 방각소설을 간행하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태상감응편도설언해』에 사용된 서체가 방각소설에 사용된 서체에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방각소설 간행에 사용된 서체가 오히려 『태상감응편도설언해』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4 한글만으로 쓴 소설의 유행은 보다 대중적인 한글 서체의 등장을 가져왔다.

방각소설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한글로만 쓴 필사본 소설이 이미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글로만 쓰기라는 행위가 하나의 행위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사용한 서체가 정확히 어떠한 형태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글로만 쓴 필사본 소설을 언급할 때, 매우 예외적이고 특징적인 서체인 궁서체 또는 궁체라고 하는 한글 쓰기를 말하는데, 이 궁체의 성립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역시 불명확하다.

만약 방각소설을 처음 간행하는 시기에 궁체가 가장 보편적인 한글의 서체였다면 방각소설의 서체도 이를 따랐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방각소설의 간행에 사용한 서체는 궁중에서 사용한 서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대의 가장 보편적인 서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방각소설 간행이 갖는 서체사적(書體史的) 의미가 드러난다.

서책을 구분하는 경우, 흔히 문자를 기록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따라 사본과 인본으로 구분한다. 목필(木筆), 도필(刀筆), 모필(毛筆) 등과 같은 붓으로 직접 쓴 책본(冊本)을 사본(寫本)이라고 하고, 각판(刻板), 주자(鑄字), 목자(木字), 도자(陶字), 등사(謄寫), 영인(景印)을 통해 나온 책본을 인본(印本)이라고 한다. 李秉岐, 『가람文選』, 新丘文化社, 1966, 372면.
또한 오늘날에는 기술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서책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가령 슬기틀(computer)의 발달로 말미암아 등장한 서책인 전본(電本, 전자책, e-book) 등이 이에 해당한다.

방각소설의 간행은 곧 <한글로만 쓴 판본>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필사본으로 유통되는 한글 서체와 대량 생산이 가능한 방각본으로 유통되는 한글 서체, 이 중 어느 것을 통하여야 서체의 통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방각소설의 간행과 유통을 통하여 한글 서체의 통일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1.5 한자와 함께 사용한 한글 서체와 한글만 사용한 서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자와 함께 사용한 활자본의 한글 서체
한자와 함께 쓰는 활자본의 한글 서체는 무엇보다도 한자 서체와의 조화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한자는, 물론 시대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로와 세로의 크기가 같은 정방형의 네모난 글자라는 점에서, 이에 어울리는 한글 역시 한자와 같은 네모난 글자여야만 한다. 실제 한자와 한글이 함께 구현된 문헌을 보면, 한글의 글자 크기가 한자에 비하여 약간 작은 모습을 보이는 경우라 할지라도, 활자 하나가 차지하는 가로와 세로의 길이에 있어서만큼은 한자와 한글이 모두 동일한 것을 볼 수 있다. 심한 경우에는 협자(俠字)로 한글을 사용하는 경우, 가로의 비율만을 줄이지 세로의 길이는 줄이지 아니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면적의 비율로 따졌을 때, 협자로 된 한글의 활자 크기는 한자의 활자 크기에 비하여 1/4의 비율을 보이지 아니하고 1/2의 비율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하겠으나, 협자로 사용한 한자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경우가 많다.
이는 결국 한자와 함께 사용된 한글 서체―엄밀히 말하면 한글 활자체이지만―는 한자 서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형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현상은 활자의 크기는 균일하여야 한다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한자의 활자체가 결정되고, 이에 어울리는 형태의 한글 활자체를 같은 규격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정제성 때문에 비롯된 현상으로 보인다. 이같은 정제성은 단순히 정제성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판 과정에 있어서 작업의 효율성을 함께 지향한 결과라 하겠다.

2) 한자와 함께 사용한 판본의 한글 서체
한자와 함께 쓰는 판본의 한글 서체는 두 경우로 나누어서 검토해야 한다.
첫째는 활자본을 번각하여 판본을 만드는 경우이다. 이때에는 판하본이 되는 활자본 인쇄물이 지니고 있는 정제성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기에, 여기에 사용하는 한글의 서체는 앞서 검토한 활자본의 한글 서체와 크게 다르지 아니하다.
둘째는 활자본을 번각하는 것이 아니라 판본을 새로 만드는 경우이다. 이때에는 판하본의 역할을 담당하는 등재본을 정사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를 정사하는 과정에서도 한글만을 정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와 함께 한글을 정사하는 것이기에, 한글 서체는 여전히 한자 서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측면을 도외시할 수 없다. 더군다나 만들고자 하는 판본에 선행하는 문헌들이 모두 활자본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면, 판본에 사용할 한글 서체는 이미 활자본의 한글 서체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서 활자본의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이런 자문을 해본다. 과연 우리의 경우 활자본 인쇄물은 대중적인 것이었을까? 우리의 활자본은 서구의 활자본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활자본을 인쇄하는 기술적 측면에 있어서도 또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서구의 경우, 기계적인 압판인쇄의 방식을 사용하여 인쇄를 계속하여도 활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도록 식자하기 위해서 활자 하나 하나의 형태를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활자 인쇄는 일정한 부수 이상의 인쇄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밀랍과 같은 것에 글자를 심어 작업을 하는 것은 결국 일정한 부수 이상의 인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히 현전하는 활자들의 배면을 보면 이를 완전히 고정시킨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활자본 인쇄물은 서구와 달리 실용적인 목적으로 인쇄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보존용으로 인쇄한 인쇄물이라는 성격이 강한 것이 아닐까? 보급용이 아닌 보존용으로 인쇄한다는 것은 인쇄 부수가 얼마 되지 아니하였고, 이로 인하여 오늘날 이러한 문헌이 희소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처럼 보존용으로 활자 인쇄물을 만들어 정전을 확정하여 보관하다가, 이후에 대량 보급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면, 목판을 이용하여 번각본을 생산하는 것이 서책 생산의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아니할까?

결국 번각의 방식으로 판본을 제작할 때 한자와 함께 사용할 한글 서체의 경우, 판하본(등재본)의 기능을 담당하던 활자본이 가지고 있던 활자체의 제약으로 인하여, 한글 역시 한자와 조화를 이루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로 인하여 한글 역시 네모난 형태의 한글 서체라는 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하겠다.
또한 이전에 활자본으로 간행한 적이 없었던 문헌을 판본으로 처음 제작하는 경우에도, 판하본으로 사용할 정사본의 제작 과정에서 한자와 한글이 함께 정사되는 것이기에, 한자와 조화를 이루는 한글 서체라는 제약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판하본으로 사용할 정사본을 제작함에 있어서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활자본이 보여주는 정제성이라는 제약이 은연중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처음 판본으로 제작되는 문헌에 사용하는 한글 서체라 하여도 역시 한자와 조화를 이루는 서체여야만 한다는 제약을 극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 한글만 사용한 판본의 한글 서체
한글만을 사용한 활자본의 경우, 활자 제작 단계에서부터 한글로만 된 문헌을 인쇄하기 위해서 한글용 활자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 한자와 함께 사용하기 위해서 활자를 제작한 것이고, 이렇게 제작된 한글용 활자만을 가지고서 인쇄한 것이 한글만을 사용한 활자본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활자본의 한글 서체는 제작 단계에서 이미 정형화되어 있는 한자 서체와의 조화라는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앞서 검토한 한자와 함께 쓴 활자본의 한글 서체에 미루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한글로만 된 활자본이 아닌, 한글로만 된 판본에 사용한 한글 서체를 검토하기로 한다. 한글로만 구성된 판본의 한글 서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방각소설에 나타나는 한글 서체이다.
방각소설에 사용된 한글 서체 역시 앞서 언급한 한자와 함께 쓴 활자본이나 판본의 한글 서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글로만 쓴 필서체 한글 문헌이 가지고 있는 전통―그 구체적인 양상은 앞으로 상세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것이 나타날 때,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하면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이것은 기존의 것과 같은 것이다> 하면서 나타난다. 이것이 새로운 것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를 전통(익숙한 것 또는 관습적인 것)과 창조(새로운 것 또는 개성적인 것)라는 말로 곧잘 표현한다.

방각소설이 처음 등장하는 경우, 이것 역시 기존의 활자본이나 판본의 전통을 이어가는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인쇄된 기존의 문헌에 나타나는 한글 서체가 지닌 전통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한자와 함께 쓰는 한글이라는 전통이다. 이는 곧 네모난 글자라는 전통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전통에 충실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글자의 획 하나 하나를 구분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등장한 판본은 가능하다면 필흔(筆痕)을 남기지 아니하면서 각각의 글자마다 독립된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러면서 한 행에 들어가는 글자 수를 일정하게 하려는 노력도 함께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전통은 결국 한자와 함께 쓰는 한글 서체가 가지는 전통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한글로만 쓴 필서체 문헌―그 중에서도 필사본 한글소설―이 가진 전통이 더 크게 작용한다. 앞서 간략히 언급한 바 있는 것처럼, 소설을 방각하는 현상은 이에 앞서 필사본 소설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이때 유통된 필사본 소설들은 한글로만 쓴 소설들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따라서 방각소설 간행 이전에 한글로만 제작된 서책이 유행하였다는 점에서 한글만을 쓰는 서체의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한글 서체의 전통이 정확히 어떠한 양상을 띄는 것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여기에 필흔이 남아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방형에서 장방형으로의 서체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방각소설에 사용한 한글 서체는 위의 두 전통 위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필서체의 전통이 더 강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첫째는 필흔이 나타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둘째는 한 행에 일정한 수의 글자를 배치한다는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흔히 방각소설을 해제할 때 사용하는 자수부정(字數不定) 또는 ○○자내외(○○字內外)라는 용어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는 곧 방각소설에 사용한 한글 서체가 활자본의 전통으로부터 더욱 자유로워짐을 말하며 정방형의 한글 서체라는 통념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

4) 판각작업이 용이한 새로운 서체의 추구--한글만 사용한 방각본의 한글 서체
그러나 한편으로 방각소설의 서체는 필서체가 가지고 있는 약점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움을 추구한다. 이 새로움은 방각소설이 판목에 새겨지는 것이라는 특성과 관련된다. 필사본이 단순히 쓰는 것이라면 방각본은 새기는 것이다. 곡선만으로 구성된 섬세함만을 새기는 것보다는 직선과 유사한 간결함을 새기는 것이 작업의 효율을 가져온다. 마치 구텐베르크의 작업이 자형의 통일을 가져왔던 것처럼, 방각본의 작업 역시 자형의 통일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단순히 문헌을 보존하거나 정전을 확정하기 위해서 문헌을 생산하는 데 사용한 서체라기보다는 시장에서 판매할 목적으로 문헌을 생산하는 데 사용한 실용적인 서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필사본 소설책에 사용한 한글 서체는 부분적으로 정방형으로부터의 탈피를 이미 보여 주었다. 이러한 양상은 곧 방각본에 사용한 한글 서체가 정방형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필사본 한글 서체는 매우 다양하여, 서체의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로 보인다. 이들 서체 중에서 어떤 것은 서체가 지닌 미적인 특성을 추구하다가 궁서체라는 지극히 아름다운 서체로 발전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잡체(민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작대기체(?)라는 지극히 간결한 단계에 머물기도 하였다.
방각소설의 서체가 궁서체와 같은 지극히 아름다운 서체를 선택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왜냐하면 방각소설은 매우 대중적인 소비물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서체 자체가 판각 작업의 편의성과 직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편의성의 추구, 바로 작업이 용이한 한글 서체의 추구가 바로 간결한 새로운 한글 서체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한글 서체의 통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글로만 구성된 인본의 등장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사본과 인본의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밀한 모사(模寫)를 계속한다고 하여도 동일한 형태의 사본을 대량으로 생산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며 일정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반면에 인본의 경우는 이 한계를 벗어나 무수한 복제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물론 판목의 마모에 따른 한계는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어쩌면 무한 복제를 가능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무한 복제에 의하여 유포된 동일한 형태의 서체들, 이것이 한글 서체의 통일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방각본(坊刻本)의 형태로 간행된 서적들이 대부분 서민의 요구에 부응해 나타난 서적이라는 점에서, 방각소설(坊刻小說) 역시 서민의 요구에 부응해 나타난 소설이라고 하겠다. 방각소설의 출현은 기존의 소설 유통 방식인 필사본만으로는 이미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던 소설 독자층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에 그동안 여러 형태로 상업적 자본을 꾸준히 축적하여 왔던 비교적 영리에 밝은 상인계층이 방각업자로 나서게 되어 방각소설 간행과 관련된 작업을 총괄하게 된 것이다.
방각소설이 인본(印本)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사본(寫本)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제성에 비하여 한층 엄격한 외양적(外樣的) 정제성(整齊性)을 갖추어야만 하였다. 이를 위하여 초간본(初刊本)의 등재본(登梓本)은 정사(精寫)된 사본(寫本)이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개판(改板)을 거듭하면서 이러한 외양적 정제성이 무너지기도 하고, 내용의 심각한 축약이나 변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는 방각소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속성, 곧 시장적(市場的) 거래(去來)라는 속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러한 점이 바로 방각소설의 중요한 특성이 되기도 한다.

 

.6 방각소설의 출판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방각소설(坊刻小說)이란 방각본의 형식으로 출판된 소설을 지칭한다. 물론 방각소설의 의미가 이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방각으로 간행된 소설을 방각소설이라고 지칭함에는 이 용어가 함의하고 있는 나름대로의 성격을 염두에 두고서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방각소설이라는 용어가 지닌 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이에 대한 논의는 방각본의 형식으로 출판된 소설이라는 언급만으로 그치기로 한다.
일단 방각본으로 출판되었다는 것은 시장에서 판매할 것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서책이 ‘使用價値라는 척도에서 出版된 것이 아니고 交換價値 즉 商品化하여 市場的 去來’ 柳鐸一, 『完板坊刻小說의 文獻學的 硏究』, 學文社, 1981, 22면.
를 하기 위해서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방각본이 모두 목판(木板)으로만 간행된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토판(土版)이나 와판(瓦版)으로 간행되기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목활자나 금속활자를 이용한 활자본으로 간행될 수도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목판으로 간행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양상이기에 목판으로 간행되었다는 전제 위에서 방각소설 출판의 과정을 일반화하여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원고본 확정:
출판 대상이 되는 미간(未刊)의 원고본(原稿本)이 있어야 한다. 이때 원고본은 작가가 직접 쓴 수고본(手稿本)일 수도 있고, 여러 차례 거듭된 필사를 통해서 전해지던 전사본(轉寫本)일 수도 있다. 수고본이나 전사본 모두 사본(寫本)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다.

(2) 판하본 제작:
원고본을 저본으로 삼아서 정서(淨書)하고 정서(精書)한 정사본(精寫本)인 등재본(登梓本) 곧 판하본(板下本)을 제작한다. 출판을 위해서 필사하는 것이기에 판하본은 정제성(整齊性)을 갖춘 형식으로 제작되며, 판하본은 판각 작업이 진행되면서 판목에 그 흔적만을 남긴 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전사본이라고 할 수 있다.

(3) 판목 제작:
판하본을 가지고서 판목(板木)을 제작한다. 판하본을 뒤집어서 미리 준비된 목판에 붙인 후 건조시킨다. 이후 매일매일 판각할 부분에 기름 성분을 발라가면서 투명성을 확보한 상태로 판각한다. 이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한 이를 각수(刻手)라 지칭하며, 이렇게 완성된 판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차츰 훼손되거나 멸실된다.

(4) 판본 제작:
완성된 판목을 가지고서 종이―주로 한지인 닥종이(楮紙)를 사용한다―에 인출하고 제책하여 서책을 완성시킨다. 인출을 담당하던 이를 인출장(印出匠), 제책을 담당하던 이를 제책장(製冊匠)이라 지칭한다. 이렇게 인출하여 제책된 것을 판본(板本) 또는 목판본(木板本)이라 지칭한다.

여기에서 언급한 (1), (2), (3), (4)의 과정을 모두 거친 작품은 초간본(初刊本)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이를 초각본(初刻本), 개간본(開刊本), 개각본(開刻本) 등으로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신간본(新刊本) 또는 신각본(新刻本) 등으로 지칭하지 아니하는 이유는 ‘新’이 ‘처음으로’라는 의미보다는 ‘새롭게’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판본에 따라서는 간기(刊記)에 ‘新刊’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이 ‘처음으로 간행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이 ‘처음으로’보다는 ‘새롭게’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기에, 기술적(記述的) 용어로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아니하다는 개인적 판단 때문에 이를 피한다. 또한 간기에 ‘開刊’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기에 이를 대표하는 용어로 ‘개간본(開刊本)’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나 다음에 언급될 ‘개간본(改刊本)’이라는 용어와 독음이 같기에 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초간본(初刊本)’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였다.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추후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하겠다.
초간본 방각소설은 사본인 원고본으로부터 시작하여 판하본을 제작하고 판목을 처음 판각하여 만든 서책이라는 점에서 ‘정제성’ 곧 ‘整齊의 美’ 柳鐸一, 『韓國文獻學硏究』, 亞細亞文化社, 1990, 128면. 를 가장 잘 갖추고 있는 판본이라 하겠다.

그러나 모든 방각소설이 위의 과정대로만 제작되는 것은 아니다. (1)과 (2)의 과정을 생략한 채, (3)부터 시작하는 방각본도 있기 때문이다. 방각본으로 처음 출판되는 작품의 경우에는 위의 과정을 충실히 따르겠지만, 이미 방각본으로 출판된 바 있는 작품인 경우에는 위의 과정 중 특정한 부분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번각본(飜刻本) 또는 복각본(覆刻本)의 경우에는 기존의 판본이나 활자본을 해책(解冊)하여 판하본으로 삼기 때문에 (1)과 (2)의 과정을 생략하고 (3)의 과정부터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는 판하본에서 사용한 판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판목을 새기기 때문에 판본으로서의 정제성을 비교적 충실하게 유지하게 된다. 아주 정치하게 판각하면 이것이 번각본인지 아닌지 여간해서는 분간해내기조차 힘들다.
또한 (1)의 과정에서만 변화가 나타나고, (2), (3), (4)의 과정을 계속 진행할 수도 있다. 이미 판본이나 활자본으로 출판된 바 있는 작품의 경우, (1)의 과정에서 확정한 원고본에 해당하는 것은 사본이 아닌 판본(板本)이나 활자본(活字本)이다. 이는 ‘印本 --> 寫本 -->印本’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柳鐸一, 『韓國文獻學硏究』, 亞細亞文化社, 1990, 17면 참조.
이때에 (2)를 생략하고 (3)의 과정으로 진행하면 앞서 언급한 번각본이 되겠지만, 이를 원고본으로 삼아 (2)의 과정 곧 판하본을 제작하는 과정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여 출판된 경우에는 이를 개간본(改刊本)이라 지칭한다. 이를 개각본(改刻本), 중각본(重刻本), 중간본(重刊本) 등으로도 부를 수 있다.

이때에도 판하본의 정제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위에서 설명한 초간본이나 개간본 그리고 번각본은 모두 나름대로 판본으로서의 정제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판본으로서의 정제성(整齊性)을 파기하면서 나타나는 판본이 있다. 이는 판목을 제작함에 있어서 한 가지 방식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의 방식을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작품이 시작되는 앞 부분(이를 전반부라 칭하기로 한다)은 번각본 제작의 방식을 사용하여 판목을 제작하고, 남은 부분(이를 후반부라 지칭한다)은 인본을 원고본으로 삼아 등재본인 판하본을 새롭게 정사하여 판목을 완성하는, 곧 개간본(改刊本)을 제작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판목을 제작하는 것이다. 이때에도 나름대로 정제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나타날 수 있으나 전반부와 후반부에 나타나는 각자체의 차이나 반엽에 수용하는 행수의 차이 등으로 인하여 판식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이 그들(木板本: 인용자 보충)의 내용은 完結性을 가지고 있는 반면 동시에 整齊性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가다듬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완결된 내용을 아무렇게나 써서 출판하는 것이 아니고 글자의 크기, 板形의 조절, 편집상의 배려 등 그 나름의 美的 調和를 꾀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寫本도 그런 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寫本에 비해 木板本은 外樣的 整齊性이 짙다는 것이다.” 柳鐸一, 『韓國文獻學硏究』, 亞細亞文化社, 1990, 18면.

또한 기존의 판목을 가져다가 이를 활용하면서 판본을 만드는 방식도 있다. 이 경우 역시 새로운 판본으로 서책을 출판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판목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라는 활용 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판목을 거의 그대로 활용하면서 판목의 특정한 부분만을 수정하여 새로운 판본을 출판하는 방식이다. 이때에 부분적으로 수정되는 부분에 대하여 (2), (3), (4) 또는 (3), (4)의 과정이 극히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판목을 의도적으로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곧 기존의 판목을 직접 훼손함으로 말미암아 훼손되기 이전의 판목으로 출판하였던 기존의 판본은 더 이상 출판될 수 없게 된다.

기존의 판목을 활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특정한 부분(전반부)까지는 기존의 판목을 수정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활용하고, 그 다음 부분(후반부)부터는 (2), (3)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판목을 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제작된 판목(후반부)과 기존의 판목(전반부)을 가지고서 (4)의 과정을 거쳐 판본을 출판하는 방식이다. 이때에는 사용하지 않게 된 후반부의 판목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판본을 다시 인출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후반부에 해당하는 판목을 새로 제작한다는 것은 이미 기존의 해당 부분의 판목이 효용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 사용가치가 없어진 기존의 판목(후반부의 판목)이 잘 보관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위의 과정 중에서 한글 서체 여기에서 말하는 한글서체는 판각된 한글서체 곧 각자체를 말한다. 이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하는 점은 柳鐸一에 의해 정리된 바 있다. 李商憲의 국문서체의 분류 체계 강의 내용을 소개한 후, 板刻 國文書體를 始源體―實用指向體―實用體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完板坊刻小說의 國文書體를 草書(連字로 쓰인 것), 行書(連畫으로 쓰인 것), 楷書(分畫으로 쓰인 것)로 나누고, 이를 다시 다음의 일곱 가지로 세분하였다. 草書에 속하는 ① 半草達筆體와 ② 半草庶民體, 行書에 속하는 ③ 草書指向的行書體와 ④ 行書體, 楷書에 속하는 ⑤ 行書指向的楷書體, ⑥ 縱厚橫薄右肩上向的楷書體, ⑦ 縱厚橫薄左右平肩的楷書體가 그것이다. 그리고 완판 방각소설의 경우 서체의 변이를 초서에서 행서로, 행서에서 해서로 진행되었다고 하였다. 柳鐸一, 『韓國文獻學硏究』, 亞細亞文化社, 1990, 112-123면 참조.

또한 허경무는 한글서체의 유형별 분류를 훈민정음해례본체(정자), 훈민정음언해본체(정자, 흘림, 진흘림), 궁체(정자, 흘림, 진흘림)로 세분하여 제시하면서, 목판본의 서체 변화 양상을 훈민정음해례본,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세종어제훈민정음, 송강가사, 방각본소설류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송강가사(松江歌辭)에 대한 것인데, 그는 <성주본은 후에 나온 방각본소설에 쓰인 특수한 자형(ㅅ, ㅈ, ㅊ을 말한다)과 닮은 부분이 있음을 보아 방각본소설에 쓰인 체와 맥락이 닿음을 알 수 있겠고, 후의 「궁체」에까지 이어져 「궁체」 형성과 무관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고 하였으며, <방각본소설에 나타난 서체는 모두 필사하여 등재본으로 삼았을 것이니 「훈민정음언해본체」로 분류한다>고 하였다. 허경무, 「고전 원전 연구를 위한 한글 서체 고찰」,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와 관련하여 살필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정사본인 등재본의 필사자가 선택한 서체―이는 쓰여진 글자이다―이며, 둘째는 각수에 의해 판각 작업을 통해 나타난 각자체―이는 새겨진 글자이다―이다. 정사본은 판각작업을 통하여 이미 사라져 버리고 오직 그 흔적을 판목에만 남기고 있기에, 판목에 남은 서체 곧 각자체는 온전히 정사본 필사자의 서체는 아니다. 이는 바로 각수에 의해 새겨진 서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를 필사자의 서체(書體)인 자체(字體)와 구분하기 위해 각자체(刻字體)라 지칭하기로 한다.

 

.7 방각본의 각자체를 통해 당대인의 미적 관점에 있어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서체를 알 수 있다.

판하본인 정사본을 필사하는 필사자가 선택한 서체는 이미 방각업자에 의해 제약이 가해진 서체이다. 방각업자가 선호하는 서체는 극히 아름다운 미적인 완성을 이룬 서체가 아니다. 방각업자는 각수가 판목을 제작함에 있어서 <생산성이 높은 서체 곧 생산성이 높은 각자체>를 선호한다. 그러나 무조건 생산성이 높은 각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방각소설은 시장에서의 판매를 통하여 이익을 추구하려는 하나의 상품으로 생산되는 것이기에, 상품의 구매자인 독자의 선호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단 독자가 해독 가능한 서체라는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어야만 한다. 또한 이것은 처음에는 독점적인 상품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다른 판본들과 경쟁하면서 판매되는 상품이기 때문에, <독자가 선호하는 서체>라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독자가 선호하는 서체, 이는 당대인의 미적 관점에 있어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서체이며, 이를 우리는 각자체를 통하여 살필 수 있다.

방각본의 각자체를 논의함에 있어서 구분해야 할 것은 먼저 이것이 초간본인가 아니면 기존의 판본을 번각하여 펴낸 번간본인가 하는 점이다. 다음에는 개간본 중에서 이것이 전체를 개간한 것인가 아니면 일부분만을 개간한 것인가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보각이 이루어진 부분을 구분하여 검토해야 한다. 개간본의 경우 개간된 부분은 번각이 아니라는 점에서 초간본과 같은 의미를 지니며, 보각된 부분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다.

개간본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은 이 부분이 방각업자의 노력과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방각업자는 가능하다면 한 권을 구성하는 전체 장수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게 되며, 이러한 노력은 한 면에 들어가는 행수를 늘리려는 노력으로, 그리고 한 행에 들어가는 글자수를 늘리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물론 작품의 내용을 축약하거나 누락시키는 것이 가장 손쉬운 것이지만, 이는 각자체와 관련되는 부분이 아니기에 여기에서는 논외로 한다. 한 면에 가능하다면 많은 글자를 새기려는 방각업자의 태도, 그러면서도 독자들이 해독 가능한 크기의 글자여야만 한다는 제약, 이 가운데에 자리잡은 것이 방각소설의 한글 각자체라 할 수 있다. 개간본에서 보여주는 각자체는 무엇보다도 시간적 후행성이라는 점에서 각자체의 시기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특히 보각이나 개각된 부분의 각자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대에 있어서 선호하는 이상적인 각자체일 가능성이 높다.

똑바로 앉은 자세로 소설책을 본다는 것을 기대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어찌보면 가장 편안한 자세로 소설책을 본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오락물로서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볼 때에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려는 것처럼, 이들도 가장 편안한 자세로 소설책을 읽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독서를 할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자세는 어떤 자세일까? 이는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아닐까? 이 점을 고려한다면 방각본의 각자체는 똑바로 보는 각자체라기보다는 비스듬히 보는 각자체라 하겠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현전하는 방각소설, 그 중에서도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간행된 방각소설에 사용된 각자체를 살펴보기로 하자. 현전하는 방각소설 중에는 간기(刊記)가 남아 있는 작품들이 있어서, 방각한 시기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들 중에는 1780년의 각자체를 보여주는 것(임경업전 <47장본>)부터 시작하여 1905년의 각자체를 보여 주는 것(정수정전 <16장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물론 모든 자료가 언제 방각되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간기를 통하여 방각된 시기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이 있고, 이것과의 선후 관계를 따져 간기가 없는 작품들의 방각시기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들 중에서 먼저 간기가 남아 있어서 방각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80년 임경업전 <47장본>
1847년 전운치전 <37장본> 1780년 『임경업전』 간행 이후, 1847년 『전운치전』의 간행이 이루어지기까지 방각소설의 간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아니한다. 다만 이 중간 시기에 해당하는 간기를 가진 작품이 보이지 아니하기에 공백기처럼 보일 뿐이다.

-1848년 삼설기 권지삼 <27장본>
-1850년 쌍주기연 <33장본>
-1851년 사씨남정기 권지상 <32장본> 권지하 <34장본>
-옥주호연 <29장본>
-1852년 장경전 <35장본>
-1856년 서유기 권지상 <31장본> 권지하 <28장본>
-1858년 숙향전 권지상 <34장본> 권지하 <30장본>
-장풍운전 <29장본>
-당태종전 <26장본>
-1859년 삼국지 권지삼 <30장본>
-용문전 <25장본>
-1860년 숙영낭자전 <28장본>
-1861년 신미록 <32장본>
-1864년 울지경덕전 <26장본>
-1887년 구운몽 <29장본>
-임장군전 <21장본>
-1890년 임장군전 <20장본>
-1894년 임진록 권지삼 <23장본>
-1905년 정수정전 <16장본>

이들을 기준으로 하여, 동일한 제목의 작품들 중에서 판본들의 선후 관계를 비교 검토하면 간기를 가진 판본에 선행하는 판본을 확인할 수 있다. 방각 시기가 여기에 제시하는 것보다 앞서는 판본을 확인할 수 있으나 정확히 그 시기를 못박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이창헌, 『경판방각소설 판본 연구』, 태학사, 2000을 참조할 것.

여기에서는 간기가 있는 판본만을 우선하여, 이들에 사용된 각자체의 특징과 의미를 살피기로 한다. 이들 판본에 사용한 각자체가 방각된 당대를 대표하는 서체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한글로만 판각된 문헌 중에서는 나름대로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방각소설 중에서 간기가 남아 있어서 당대의 각자체를 알 수 있다는 이유로 이들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1) 『임경업전』의 간행 : 1780년
1780년 『임경업전』 간행 이전에 한글로 된 방각소설의 간행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에, 1780년 『임경업전』 간행이 최초의 한글 방각소설 간행이라 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인다.
먼저 『임경업전』은 ‘歲庚子孟冬京畿開板’이라는 간기가 있어 1780년에 인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의 말미에 ‘경업젼을 언문으로 번역고 사람마다 알게 기 동국 츙신의 말이매 혹 만민이라도 다라 본밧게 미라’고 하여 간행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1780년에 인행된 <47장본>이 아니라, 이후에 몇몇 부분을 보각하여 간행한 <45장본>의 일부분이 낙장되어 41장만이 남아 있는 <낙장본> 『임경업전』(엄밀히 말하면 <45장본>의 낙장본이다)이다. <47장본> 『임경업전』이 1780년에 개판(開板)된 이후 여러 차례 보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각자체의 뚜렷한 변모를 보이는 보각 부분은 낙장본의 25번째장([그림 2] 참조) 장차표시는 二十七八로 표시되어 있으며, <47장본>으로 계산하면 제27장과 제28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한 장으로 새긴 것이다.
과 35번째장 장차표시는 四十一二로 표시되어 있으며, <47장본>의 제41장과 제42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한 장으로 새긴 것이다.
이다. 판식의 변모가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47장본> 『임경업전』이 복합판식 제1장부터 제5장까지는 반엽 12행을 기준으로 작성하였고, 제6장 이하는 모두 반엽 13행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는 점에서 복합판식임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복합판식을 지향하는 방각업자를 상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반엽 12행을 기준으로 작성한 선행본이 존재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기에 이에 선행하는 판본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런 점에 있어서 『임경업전』의 초기 간행 모습은 제1장부터 제5장까지가 가장 잘 보여 준다 하겠다. ([그림 1] 참조)
여기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요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필흔을 남긴 채 새기고 있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자를 하나씩 독립시켜 새기려고 노력한 것을 볼 수 있다. 활자본의 경우에는 필흔이 나타나지 않으며, 활자본을 번각한 경우에도 역시 필흔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임경업전은 활자본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흔을 그대로 새긴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필사본 특히 흘림체나 궁서체로 기록한 필사본([그림 32] 참조)의 특성을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는 곧 판하본인 정사본을 작성할 때에 나타난 필흔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각자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기도 한다.
둘째, 각자체의 모양을 살피면 왼쪽이 낮고 오른쪽이 높으면서(右肩上向形) 왼쪽으로 비틀어진 느낌을 준다. 곧 정방형이 아닌 마름모형의 각자체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특징은 자음인 초성보다는 모음인 중성이 더 길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ㅣ’계열 모음뿐만 아니라 ‘ㅡ’계열 모음을 사용한 경우에도 왼쪽이 낮고 오른쪽이 높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특정한 몇몇 글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 사용한 각자체 전체의 문제라 하겠다. 이는 서책을 어느 방향에서 읽는가 하는 시선과도 관련되는 부분이다. 즉 비스듬한 자세로 독서 과정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궁서체의 경우는 그 방향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그림 32] 참조)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판각 작업의 편의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각수가 판각 작업을 할 때, 칼날에 힘을 주는 방향이 수직이나 수평 방향보다는 우하에서 좌상 방향으로 힘을 주는 것이 편리하지 아니한가 하는 점이다. 또한 획의 끝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끝을 직각으로 마무리하는 것보다는 반달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더 편리하지 아니하였을까? 이런 점들이 결국은 판하본의 필사자가 의도한 서체가 각수에 의해서 변용되어 각자체로 남게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 등을 고려하게끔 한다. 특히 『임경업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오리문자’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오리문자’는 앞의 글자가 반복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하나의 기호이다. 필사본에서는 오리문자의 사용이 빈번하게 나타나지만, 인본에서 오리문자가 사용된 경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인본으로서는 드물게 방각소설에서 오리문자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결국 각수의 작업 속도를 고려한 결과라 하겠다.

여기에서 또한 판하본을 작성할 때에, 판하본 작성 이후에 이루어질 작업―판각 작업뿐만 아니라 도서의 판매 및 독자의 독서 과정까지를 포함한 모든 과정―을 모두 고려한 상태에서 <판하본에 사용할 서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였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독자층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가령 궁서체를 읽는 독자는 서탁 등을 이용하여 독서를 하는 독자라고 한다면, 방각본을 읽는 독자는 궁서체를 읽는 독자와는 다른 환경에서 독서를 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방각소설의 주된 독자층이 곧 서민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독서 환경이 궁서체를 읽는 계층(이들이 서책을 비스듬한 자세로 읽지 아니하였다는 증거는 없다)의 독서 환경과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이들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한다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셋째, 모음의 경우, ‘ㅣ’계열 모음 가운데 ‘ㅏ’, ‘ㅑ’가 아닌 ‘ㅓ’, ‘ㅕ’의 경우에는 가로획이 세로획보다 가늘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ㅣ’계열 모음에 사용된 세로획이 가로획에 비하여 항상 짧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ㅡ’계열 모음의 경우, 세로획이 가로획에 비하여 역시 짧기 때문에 세로획이 가늘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나, ‘ㅡ’계열 모음에서는 기본형으로 사용하는 가로획 ‘ㅡ’가 길다보니, ‘ㅡ’의 중간 부분이 가늘어져서 상대적으로 세로획이 가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도 한글의 선조적 진행 방향이 세로쓰기이면서도 글자 하나 하나의 조합방식은 한자와의 조화를 취하기 위해 모아쓰기를 기본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하나의 글자 안에서 ‘ㅣ’계열 모음이 차지할 수 있는 가로의 폭은, 세로쓰기를 기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항상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로쓰기가 가장 일반적인 필서 방향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행을 가지런히 하려는 노력이 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세로쓰기를 기본적인 진행방향으로 삼는 경우, 글자 하나가 사용할 수 있는 세로의 길이를 임의로 조정하여 사용한다 하더라도 세로 행을 가지런히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글자 하나가 사용할 수 있는 가로의 길이를 임의로 조정하여 사용한다면 세로 행을 가지런히 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만약 방각소설이 한글로만 판각되지 아니하고 한자와 함께 판각되었다면 한글의 각자체는 지금 우리가 보는 방각소설의 각자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다행히 한글로만 작성된 문헌이라는 점에서, 세로쓰기라는 글자의 선조적 진행 방향이라는 제약 조건이 한 개의 글자가 변하는 방향을 가로로의 팽창을 제한하고 세로로의 팽창을 수용하는 쪽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가로쓰기가 일상화된 오늘날의 글자 형태를 어떻게 변용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점과 관련시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제작되었던 <47장본>의 제작시기는 18세기 후반인 1780년이다. 이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뒤에 보각이 이루어졌을 터인데, 보각의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45장짜리 단행본을 출판하는 것이 가능한 시기라는 점에서 그 대략적인 시기를 19세기 초엽으로 간주한다. 1860년경에 <27장본> 임장군전이 간행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47장본>을 보각하면서 사용한 각자체의 사용시기는 19세기 전반기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보각한 부분의 각자체를 살펴보기로 한다.
임경업전 <47장본>을 보각한 [그림 2]를 보면, 여기에도 필흔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ㅣ’계열 모음 중 ‘ㅓ’와 ‘ㅕ’에서는 가는 가로획을 보여준다. 반면에 각자체의 형태와 기울기는 원래의 각자체가 왼쪽이 낮고 오른쪽이 높은 우견상향형을 보인 것과 비교할 때, 좌우가 모두 평형(左右平肩形)을 이루고 있다. [그림 1]과 비교할 때, 글자의 모양새 역시 동글동글한 느낌을 주어 오히려 궁서체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궁서체가 정확히 어느 때에 어떻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19세기 전반기에는 보편적인 한글 서체의 하나로 자리잡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임경업전』을 보각할 때 사용한 각자체는 이후에 간행된 방각소설에 주로 사용되는 각자체와 많이 닮았다는 점에서 방각소설 간행 초기의 각자체에서 다음 시기로의 각자체 변모를 설명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보각체의 경우, 한 면에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겠지만, 처음에 사용한 각자체에 비하여 획 하나하나가 가늘어진 느낌을 주어 매우 섬세한 각자체로 보인다 하겠다. 이에 비하여 『임경업전』을 처음 새길 때 사용한 각자체는 두텁다는 점에서 투박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웅혼하면서 소박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겠다.

2) 19세기 중엽의 각자체
『임경업전』 간행 이후 60여 년이나 지나서 사용된 각자체를 『전운치전』과 『삼설기』를 통하여 살필 수 있다. 『전운치전』([그림3])과 『삼설기』([그림4])의 각자체를 보면, 『임경업전』을 처음 판각할 때 사용한 각자체([그림1])보다는 보각할 때 사용한 각자체([그림2])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80년에 사용한 후박하면서도 힘찬 느낌의 각자체에서 1847년 및 1848년에 사용한 섬세하면서 미려한 느낌의 각자체로의 전환, 그리고 이 전환 과정에 위치하는 『임경업전』 보각 부분의 각자체를 상정할 수 있다.
이제 『전운치전』과 『삼설기』에 사용된 각자체를 함께 검토하기로 한다. 『전운치전』은 1847년에 인행된 작품이며, 1848년에 인행된 『삼설기』 <권지삼>([그림4])에 비하면 필흔이 더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하나하나의 글자를 구분하여 쓰려는 의식이 여전히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여 『삼설기』 <권지삼>의 경우는 필흔이 더 많고 연자(連字)형의 각자체가 많이 보인다. 또한 우견상향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물론 『전운치전』 역시 좌저우고라는 점에서 우견상향의 형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임경업전』에 처음 사용한 각자체에 더 가깝다 하겠다. 이같은 우견상향형의 각자체는 이후 방각소설 간행의 기본적인 각자체가 되었다. 물론 『용문전』과 같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삼설기』 <권지삼> 이것이 <권지삼>이 아닌 <권지사>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李昶憲, 「단편소설집 <삼설기(三說記)>의 판본에 대한 일 고찰」, 『冠嶽語文硏究』 20, 1995.
을 1848년에 간행하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에 앞서 『삼설기』 <권지상>과 <권지이>([그림5] 참조)가 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설기』 <권지상> 및 <권지이>의 인행과 『전운치전』의 인행 사이에 어떠한 선후관계가 존재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다만 『삼설기』 <권지삼>의 간기를 근거로 하여, 『전운치전』을 『삼설기』에 사용한 각자체보다 선행하는 각자체로 본 것일 뿐이다.
『삼설기』 <권지상> 및 <권지이>의 각자체([그림5])를 『삼설기』 <권지삼>과 비교할 때, 이들이 서로 다른 각자체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권지상> 및 <권지이>를 보면 <권지삼>에 비하여 하나 하나의 글자를 구분하여 쓰려는 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50년에 간행된 『쌍주기연』([그림6]), 1851년에 간행된 『사씨남정기』([그림7])와 옥주호연([그림9]) 그리고 1852년에 간행된 『장경전』([그림10])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각자체가 좌저우고 곧 우견상향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임경업전』의 본래 각자체에 비하면 더욱 둥글고 섬세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18세기의 각자체에서 19세기의 각자체로의 변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현전하는 자료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대부분의 방각소설이 19세기에 주로 방각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임경업전』의 초간본 각자체가 매우 예외적인 각자체이라 하겠으며, 오히려 『임경업전』을 보각할 때에 사용한 각자체가 19세기에 가장 보편화된 각자체의 선행 형태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하나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사씨남정기』의 보각에 사용한 각자체이다.([그림8] 참조) 여기에는 본래의 행문을 축약하여 보각해야 하는 현실적인 제약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였지만, 『사씨남정기』를 처음 간행할 때 사용한 각자체에 비하여 좌저우고 곧 우견상향형의 형태를 벗어나 좌우평견형의 형태를 보여주며, 섬세함보다는 두텁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현상은 『장경전』의 보각체([그림11])뿐만 아니라 『숙향전』의 보각체([그림14])에서도 나타난다. 이들 보각 부분은 모두, 처음 이들이 판각된 1852년(『장경전』)과 1858년(『숙향전』)보다 뒤에 나타난 각자체라는 점에서, 19세기 후반기로 진행하면서 나타날 각자체의 변모를 어느 정도 보여 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1856년에 방각된 서유기([그림12])에는 필흔이 많이 나타나면서 연자(連字) 형태의 각자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864년 간행의 『울지경덕전』([그림22])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1861년 간행의 『신미록』([그림21])도 이와 유사하다 하겠다.
이러한 연자형(連字形)의 각자체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과는 달리 모든 글자를 독립시키려는 흐름도 있으니,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1859년에 간행한 『용문전』 <25장본>이다. ([그림19]) 『용문전』의 경우, ‘己未石橋新刊’이라는 간기가 남아 있는 <25장본>보다 선행하는 <36장본> 『용문전』을 살필 수 있는데, <36장본>의 상한선은 1794년이고 하한선은 1859년이다. 이창헌, 『경판방각소설 판본 연구』, 태학사, 2000, 206-220면 및 538면.
『용문전』 <36장본>의 각자체가 주는 느낌은 『임경업전』을 처음 간행할 때 사용한 각자체와 보각할 때 사용한 각자체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각자체라는 느낌을 주지지만, 『용문전』 <36장본>의 정확한 간행 시기를 알 수 없기에 더 이상의 논의는 멈추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용문전』 <25장본>([그림19])이 보여 주는 글자의 배열 형태, 곧 활자본과 유사한 배열 형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용문전』 <25장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예시한 자료는 간기가 있는 <25장본>이며, 이는 간기가 없는 <25장본>과 번각관계에 있다. 원본을 확인하지 못하였기에 정확한 것을 말하기는 힘들지만, 지금까지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간기가 없는 <25장본>이 선행하고 이를 번각한 것이 간기가 있는 <25장본>이라 하겠다.
대부분의 방각소설들은 매 행의 글자수가 일정하지 않은 모습(字數不定)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이유를 한글의 모아쓰기 방식이 갖는 ‘ㅣ’모음 계열과 ‘ㅡ’모음 계열의 변별성을 높이려는 의지, 그리고 세로쓰기라는 선조적 진행 방향과 관련하여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비해 용문전 <25장본>은 매 행 일정자(여기에서는 매 행 25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을 『진대방전』에 첨부된 내훈제사 및 내훈, 그리고 『홍길동전』 <24장본>의 제1장 및 제2장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러나 『홍길동전』 제1장 및 제2장은 필흔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문전』과는 다르다. 그러나 『홍길동전』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한 군데의 예외는 있으나 자수일정자(반엽 14행 매 행 20자)를 의식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용문전』 <25장본>처럼 가로 세로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지는 아니하다. 『홍길동전』 <24장본>의 경우, 제3장부터는 각자체라는 점에 있어서는 제1장 및 제2장과 유사한 모습을 제20장까지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미 자수일정자를 포기하고 판면을 구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용문전』 <25장본>에 사용한 각자체 역시 좌저우고 곧 우견상향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타의 방각소설에 사용한 각자체와 비교한다면 좌우평견형에 가까운 각자체라고 하겠다. 또한 특이한 점은 받침으로 쓴 ‘ㄹ’을 흘림체로 처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며, 이 점에 있어서 후대에 간행된 초기 활판본의 자체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하겠다.
이는 결국 19세기 중반기에 이미 필흔을 많이 가진 각자체를 지향하는 흐름뿐만 아니라 활자본처럼 필흔을 전혀 남기지 않는 각자체를 지향하는 흐름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방각소설의 주류를 차지하는 각자체는 오히려 일정한 정도의 필흔을 남기면서 하나하나의 글자를 구분하여 쓰려는 의식이 강한 각자체이며, 이것이 가장 보편적인 각자체로 사용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두 경우는 차라리 예외적인 경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용문전』이 보여준 것처럼, 받침 ‘ㄹ’의 형태를 흘림체가 아닌 정자체로 처리하는 모습은 이전의 자료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문전』처럼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사용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ㄹ’을 흘림체로 쓰지 않으려는 노력은 1860년에 간행한 『숙영낭자전』([그림20])에서도 나타난다. 『숙영낭자전』에서도 종종 흘림체로 쓴 ‘ㄹ’이 나타나고는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받침 ‘ㄹ’을 흘림체가 아닌 정자체로 쓰려는 노력이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글자들을 연서하거나 글자 안에서 획들을 연획하는 것보다 이들 획이나 자들을 구분하여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 하겠다. 이러한 모습은 곧 판각 작업의 편의성보다 독자의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방각업자의 노력을 보여 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3) 19세기 말엽의 각자체
이러한 변화는 결국 필흔을 가능한 한 적게 남기면서 글자 하나하나를 구분하여 새기고, 우견상향형의 형태보다는 좌우평견형의 형태로 새기는 것이 바람직한 각자체라는 인식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1887년에 간행한 『임장군전』([그림25])과 1890년에 간행한 『임장군전』([그림26])이다. 물론 이들이 완전한 좌우평견형의 각자체를 취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견상향형의 모습을 간직하고는 있으나 연획이나 연자의 빈도가 현격하게 줄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여기에는 근대식 연활자(예수교 성경활자나 박문국 연활자 등)의 도입으로 인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근대식 연활자의 도입과 이를 통한 새로운 서체의 보급은 결국 방각소설의 서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임진록에 사용한 각자체이다.

1894년에 간행한 『임진록』 <권지삼>([그림27])을 보면, 글자와 획을 구분하여 새기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 계열의 글자 형태를 보면 이전과는 달리 흘림체가 아닌 정자체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각자체의 모양도 우견상향형이 아닌 좌우평견형의 모양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록』 <권지삼>에 앞선 간행된 『임진록』 <권지상>이나 『임진록』 <권지이>의 경우([그림28])도 크게 다르지 아니하다. <권지상>보다는 <권지이>가, <권지이>보다는 <권지삼>이 좌우평견형의 각자체에 접근하고 있으며, 글자나 획 또한 이를 더 구분하여 새겼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가독성을 높이려는 작업이며, 아울러 당대의 이상적인 서체로 어떤 서체를 지향하고 있었는지를 암시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흘림체보다는 정자체를 기본적인 각자체로 선택하는 것은 결국, 한 면에 들어가는 글자수를 더 많게 한다고 하여 이전의 각자체처럼 가독성에 문제를 가져오지는 아니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자료는 1905년에 간행한 『정수정전』([그림29])이다. 이는 20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새로운 소설을 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비록 좌우평견체에 가까운 형태의 각자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열의 각자체로 이전의 흘림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임진록』이 보여 준 ‘’계열과는 달리 이전의 흘림체 ‘’계열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과거의 각자체가 여전히 유효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체의 변화 그리고 각자체의 변화가 더디다는 것을 보여 주며, 한 시대에 여러 종류의 서체가 항상 공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근대식 활판 인쇄술이 보편화된 1920년대에도 여전히 한남서림 李昶憲, 「한남서림 간행 경판방각소설 연구」, 『韓國文化』 21, 1998.
을 비롯한 여러 서점에서 방각소설을 인출하여 판매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들 방각소설의 각자체([그림30] 및 [그림31])가 단순히 호고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당대에 수용된 각자체가 결코 아니며, 이들 각자체에 익숙한 독자들이 여전히 상존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서체가 등장하였다 하여 기존의 서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새로운 서체가 등장하여 주류를 차지하기까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겠다.
끝으로 방각소설에 사용한 각자체는 비록 아니지만 방각소설이 활발하게 간행되던 19세기 중엽의 서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서 『太上感應篇圖說諺解』(1852년)의 각자체([그림33])를 소개한다. 洪允杓, 『國語史 文獻資料 硏究 (近代篇Ⅰ)』, 太學社, 1993, 421-438면.
이는 앞부분에 한문 원문을 수록하고 이어서 한글로 언해하는 형식으로 계속되는 서책으로, 활자본이 아닌 목판본이다. 이 중에서 한글로 언해한 부분만을 살펴보면 방각소설처럼 필흔을 함께 새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자(漢字)를 수록한 부분에서는 매 행 22자라는 형식을 고수함에 비하여 한글을 수록한 부분에서는 매 행 17자 내외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17자를 기본으로 하면서 어떤 때에는 16자를 한 행에 수록하고 어떤 때에는 18자를 한 행에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크기의 한글 각자체라는 형식을 깨뜨린 것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나 한자는 매 행 22자의 크기로 사용하고 있음에 비하여 한글은 매 행 17자 내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한자와 한글의 크기에 있어서 일대일 대응이라는 격식도 깨뜨린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필흔을 함께 새기는 한글 각자체라는 점에서 본다면, 한글을 판각함에 있어서 필흔을 함께 새기는 현상이 유독 방각소설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오히려 이는 19세기 중엽에 필흔을 함께 새기는 각자체가 당대의 주류를 형성한 각자체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까지를 가능하게 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이와 유사한 자료들을 계속 찾아내고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겠다.

 

 

.8 가로쓰기에서 세로쓰기로의 변화는 새로운 문화의 등장을 가리킨다.

위에서 언급한 한글의 사용 방식과 서체는 모두 세로쓰기라는 일정한 양상을 보인다. 또한 글을 쓰기 위한 도구에 있어서 그 기본을 이루는 것은 붓[筆]과 종이라고 하겠다.
한글이 인위적으로 창제되기 이전에 사용하였던 보편적인 기록은 한자(漢字)로 쓰기였으며, 그것도 세로쓰기라 하겠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정방형의 서체이다. 물론 시대적 변화에 따라 장방형의 서체가 나타나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문자인 한글을 만드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문자로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한자와의 공존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바로 한글의 외형적 형태를 한자와 같은 정방형의 서체를 취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제약이었다. 한자가 주(主)가 되고 한글이 종(從)이 되는 문자 사용 방식을 취하건, 혹은 한글이 주(主)가 되고 한자가 종(從)이 되는 문자 사용 방식을 취하건, 어느 경우에나 한글은 한자와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대원칙이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한자와 한글을 인행하기 위해서 활자를 만들고, 이를 통해서 서책을 조판하고 인행한다 하더라도, 어느 경우에나 한글 활자가 지닐 수 있는 서체의 외형적 형태는 한자 활자가 지니는 서체의 외형적 형태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제한된 범위 안에서 만들어진 한글 활자를 이용하여 순수한 한글 서책을 인행한다 하더라도 서체라는 측면에 있어서 이는 한자 서책의 인행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이러한 제약 특히 장방형 서체라는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한글로만 글쓰기라는 작업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가 공식적인 글쓰기를 한 경우는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이다. (그것도 일정한 부분에 있어서만)
한글로만 글쓰기라는 작업은 결국 공적인 영역이 아닌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언간(편지) 쓰기라고 하겠으며, 이것 역시 세로쓰기 작업이다. 그러나 이는 출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표준이 될 수 있는 언간을 출판한 경우는 있다) 세로쓰기를 붓으로 한다는 것은 붓이 지니고 있는 특성인 필흔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남긴다. 따라서 한자와 같이 쓰는 한글이라는 인본의 경향성을 따르면, 필흔이 없는 정서한 한글 언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숙종의 언간이다. 그러나 이는 서사의 속도라는 점에서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이를 보완하는 방식이 곧 필흔을 그대로 노출하는 한글 쓰기이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인현왕후나 인선왕후의 언간이다. 그러나 한글은 모아쓰기라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ㅡ’모음 계열의 글자를 쓸 때에는 글자의 가독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가독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바로 정방형의 한글 서체 대신에 장방형의 한글 서체를 등장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글 서체는 한자 서체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의 서체를 형성해 갈 수 있었다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쓰기 문화라는 한계 안에서만 이루어진 현상이다. 쓰기 문화라는 한계를 극복하며 이를 인쇄 문화라는 영역에까지 확대시킨 것이 바로 방각본의 한글 서체이다.

방각본의 한글 서체가 모두 장방형의 서체로만 이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방형의 서체로 이루어진 방각소설(앞서 검토한 『용문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도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앞서 언급한 한글로만 쓰기 문화를 거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전에 인쇄된 활자본이 지니고 있었던 전통 곧 활자인쇄본의 전통에 충실하고자 한 결과 나타난 예외적인 현상일 뿐이다.
방각본의 한글 서체는 또한 각수가 판목을 가공하는 과정에서의 편의성을 고려한 서체이다. 서체가 지닌 미적인 특성을 추구하여 지극히 아름다운 서체로의 발달을 생각할 수 있으나 한글로 쓰기라는 점에서는 이것이 가능하겠지만, 한글로 인쇄하기라는 점에서 곧 상품으로서 소설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이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각수의 판각 작업에 용이한 서체로서 간결성이 구비된 서체라는 요소를 만족시켜야 하였다.
또한 상품인 소설책을 구매하는 소비자 곧 독자의 서체에 대한 선호도를 고려해야만 하였다. 이는 곧 가독성의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방각업자의 입장에서는 인쇄할 한 면에 많은 분량의 내용을 수록함으로써 인행하는 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종이값을 절약하여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그 결과 독자의 가독성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본다면 방각소설의 글자 크기의 조절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는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다.
따라서 방각소설의 서체는, 앞서 언급한 한글만을 사용한 쓰기 문화로부터 한글만을 사용한 인쇄 문화로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세월은 바뀌어 새로운 문화 곧 가로쓰기가 등장하여 세로쓰기를 대신하고 있다. 가로쓰기는 결국 서체에 있어서 세로의 크기 곧 글자의 높이에 제한을 둘 수밖에 없다. 세로쓰기에서는 주로 글자의 가로의 크기 곧 글자의 폭이 제한을 받고 높이에 있어서는 큰 제한이 없는 경우라 하겠는데, 이 점에서 본다면 세로쓰기는 결국 ‘ㅡ’모음 계열의 글자에 변별력을 높일 수 있었다는 장점을 지닌 방식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가로쓰기가 보편화되면서 글자의 폭에는 큰 제한이 없는 반면에 글자의 높이에는 제한을 둘 수밖에 없다. 글자의 폭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은 ‘ㅣ’모음 계열의 변별력을 높이는 데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아니한다. 즉 불필요한 자유로움이라고 하겠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세로폭의 확대에 의한 ‘ㅡ’모음 계열의 변별력을 높이는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 가로쓰기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선조적 진행 방향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있다. 정방형의 서체를 버리고 장방형의 서체를 선택하는 것이 어찌 보면 대안이 될 수 있다 하겠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새로운 기계문명은 장방형의 서체를 사용함에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다만 이러한 장방형의 서체에 얼마나 빨리 익숙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출처 : 찻잎 서예로의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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