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33. 여남공주묘지명(唐, 虞世南)
33. 汝南公主墓誌銘(唐, 虞世南)
<여남공주묘지명(汝南公主墓誌銘)>은 정관(貞觀) 10년(636)에 우세남이 행서로 220자를 18행에다 썼으며 크기는 26.3cm×39.5cm이다. 미불의 『서사(書史)』에 의하면 백여 본이 전한다고 했다. 이 작품은 초고로 서명이 없으며 지금 전해지는 것은 왕세정(王世貞)의 고증에 의하면 미불이 임서한 것이라 한다. 현재 상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세남의 행서는 당나라 때 매우 명성이 있었으며 송나라 때 미불이 더욱 칭찬했다. 세상에 전하는 <여남공주묘지명>은 비록 진위를 구별하기 어려우나 우세남의 어떤 전형적인 특징을 아주 잘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역대 서예가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왕세정은 『엄주산인고(弇州山人稿)』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에 우세남과 구양순의 글씨는 모두 신품과 표품 사이에 올랐으나 때때로 우세남이 못하다고 했을 때 나는 승복하지 않았다. 우세남의 살찜이 구양순의 골력보다 못하다는 것은 해서를 두고 한 말이다. 만년에 우세남의 <여남공주묘지명> 초고를 보니 한가롭고 허하면서 풍류와 자태에서 때때로 의외의 것이 나타나 <난정서>와 더불어 눈을 현란하게 만든다.
용필을 보면 초고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써서 신출귀몰한 변화의 실마리가 많은 것이 그의 해서와는 다르다. 방필과 원필이 합일하며 붓을 내림에 깨끗하고 날카로워 질질 끄는 습기가 전혀 없다. 행필은 굳세고 절주가 명쾌하며 주된 가로획은 골법을 얻었고 부차적인 가로획은 필획이 아름다우며 혹 밖으로 드러내기도 했고 혹 안으로 감추면서 형세에 따라 필세를 나타냄이 매우 자연스럽다. 특히 외탁법(外拓法), 날법(捺法), 과법(戈法) 등은 우세남 글씨의 특징을 잘 표현한 것으로, 강하고 굳센 가운데 표일한 정취를 함유하고 유창한 아름다움에 근골을 얻었으며 실마리를 헤아릴 수 없다. 왼쪽 삐침의 끝을 때때로 날법처럼 한 것은 다른 서예가들 행서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외에 점법(點法)이 특이한데 비록 티끌처럼 작아도 정신과 성정을 닮지 않음이 없고 의취가 끊임없이 나와 마치 모든 것을 모은 눈동자에 정신을 돌아보는 것 같다. 이는 가장 홀시하기 쉽지만 또한 가장 얻기 힘든 곳이기도 하다.
전체 결구는 기울고 바름이 서로 살아나도록 하면서 종횡, 조세, 대소 및 방자함과 소쇄함, 풍류와 질탕함을 강구하여 마치 재주가 많은 사람이 입을 열어 스스로 장법을 이루는 것 같다. 혹 왼쪽을 긴밀하게 하고 오른쪽을 펼쳤으니, ‘南’, ‘天’, ‘史’자 등이 그러하다. 혹 오른쪽을 긴밀하게 하고 왼쪽을 성글게 하여 격앙된 형세를 얻었으니, ‘省’, ‘觀’, ‘瘠’자 등이 그러하다. 혹 왼쪽은 높고 오른쪽은 낮으니, ‘隴’, ‘暉’, ‘觀’자 등이 그러하다. 혹 왼쪽은 낮고 오른쪽은 높으니, ‘陵’, ‘琯’, ‘雖’자 등이 그러하다. 혹 왼쪽은 바르고 오른쪽은 기울게 했으니, ‘潢’, ‘疏’, ‘瑞’자 등이 그러하다. 혹 왼쪽은 기울고 오른쪽은 바르니, ‘聰’, ‘珪’, ‘勝’자 등이 그러하다. 혹 위아래가 바르지 않으니, ‘帝’, ‘養’, ‘繭’자 등이 그러하다. 혹 크고 작음은 글자에 따라 형태를 얻도록 하여 획일적으로 공간을 분할하는 형식을 타파했다. 모든 것은 중심의 평형을 이루면서 팔면에 자태가 나타나도록 했으니, 이는 행서 결체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결체의 풍부한 변화로 말미암아 장법도 활발한 생기를 띠게 되었다. 행기를 보면 각 글자의 중심은 모두 각기 다르므로 행간의 중심선은 직선이 아니라 좌우로 움직여 마치 거미가 공중에 매달려 좌우로 흔들리지만 선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왕탁이 고의적으로 심하게 중심선을 요동치는 것과 달라 곳곳에서 높은 학자의 그윽하고 표일한 풍모와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행과 행 사이에서는 어떤 필획을 이웃 행에 뻗어서 행간을 때로는 성글게 하거나 조밀하게 하여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곳곳에서 억양과 돈좌의 음악감을 느끼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