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50. 제질문고(唐, 顔眞卿)
50. 祭姪文稿(唐, 顔眞卿)
이 작품은 안진경 나이 50세 때의 걸작이다.
<제질문고>는 안진경이 당 숙종 건원원년(建元元年, 758)에 쓴 묵적으로 마지본(麻紙本)이다. 행서로 25행에다 334자를 썼고 크기는 72.32cm×28.16cm이며 일찍이 선화내부에 수장되었다가 현재는 대만고궁박물원에 있다. ‘천하행서제이(天下行書第二)’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50-55세는 안진경 행서의 전성시기이며 앞뒤로 위대한 3작품, 즉 <제질문고(祭姪文稿)>, <제백부문고(祭伯父文稿)>, <쟁좌위첩(爭座位帖)>이 나왔다. 이 시기에 안진경은 전서와 장욱 초서의 필의 및 민간서예에서의 우수한 성분을 성공적으로 행서에 융합하여 자기의 독특한 풍격을 창조함으로써, 만년에 성숙한 해서에서 가장 풍부한 특징이 있는 용필을 이미 갖추었다. 그 중에서 전서의 의미가 가장 많다. 머리와 꼬리는 둥글면서 중간은 혼후하고 포만하여 점과 획의 입체적 효과를 더욱 증강했다. 이는 안진경이 행서에서 이전에 없었던 것에 대한 위대한 공헌이다. 그 중에서 <쟁좌위첩>의 용필이 가장 뛰어나나, <제질문고>가 진적이기 때문에 더욱 귀히 여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행서를 합쳐 안진경의 ‘삼고(三稿)’라고 한다.
천보(天寶) 14년(755)에 안사(安史)의 난이 발생했다. 안진경은 사촌형인 상산태수(常山太守) 안고경(顔杲卿)과 연합하여 군대를 일으켜 안녹산을 토벌함에 얼마 되지 않아 안고경 일문이 피살되었다. 건원원년 안진경은 조카인 천명(泉明)을 하북성으로 파견하여 안고경 일가족을 수소문하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안고경 부자의 시체를 가지고 왔는데, 안고경은 다리가 하나 잘리고 그의 아들 계명(季明)이는 겨우 목만 들고 왔다. 안진경은 이를 보고 비통해마지 않았다. 3월, 포주(蒲州)에 있을 때 안진경이 <제질문고>를 썼다. 당시 안진경은 잔혹한 타격을 깊이 받아 반군과 적신(賊臣)을 원수처럼 여겼다. 그는 안씨 가족에 대해 “아버지가 해침을 당하고 자식이 죽으니, 보금자리가 기울어 알이 뒤집힌다[父陷子死, 巢傾卵覆].”라고 비통해했으며, 문장에 임해 분한 감정을 발함에 거둘 수 없었다. 이는 마치 왕주(王澍)가 『죽운제발(竹雲題跋)』에서 “안진경은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 죽음에 비통하고 애달픈 생각이 발했기 때문에 심한 성냄과 피눈물을 흘리며 붓이 가는 바를 따르지 않고 종횡으로 머무르고 꺾으면서 일사천리를 내달려 드디어 천고의 뛰어난 작품을 이루었다.”라고 한 말과 같다. 그는 이렇게 비분강개한 심정에서 정서를 펴냈기 때문에 서체의 교묘함과 졸함에 뜻이 없었고, 또한 붓에 먹을 적시는 것에도 뜻이 없었으며, 단지 붓을 방종하고 호방하게 하여 성정에 맡겼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퇴필과 비백이 종이에 가득했다. 그리고 서세는 크게 일으키고 떨어뜨리면서 종횡으로 열고 닫으며 울분의 감정을 쏟아내었다. 그렇기 때문에 먹은 비통하고 붓은 성내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는 강렬한 감정 색채를 갖추었다. 그러나 필획을 따라 손으로 짚어보면 오히려 모두가 법도에 맞아 감히 초서와 전서를 한 용광로에서 융해하여 해법의 정미를 다했다고 하겠다. 이는 이른바 동기창이 “글씨와 그림은 공교함에 뜻이 없어야 오히려 공교함을 다한다.”라는 말과, 장욱이 안진경에게 가르친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모든 것이 뜻에 맞아야 하고 마음대로 풀어놓고 구속하더라도 모두 법도가 있어야 한다.”라는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 문장의 내용을 더해 전체적으로 비장하고 격분하는 경지를 잘 나타내었으니, 이는 마치 소리가 없으면서도 큰 기운이 물씬거리는 슬픈 노래와 같다. 필획 하나하나가 때로는 침중하고 때로는 격분의 음절과 같아 천부적 자질로 천고의 걸작을 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