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思開/書畵理論

[스크랩] 조선시대 금석학

멍석- meongseog 2008. 1. 29. 16:53

조선시대 금석학 연구의 실태

 

1. 글머리에

金石學의 연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宋代 歐陽脩의 集古錄 趙明誠의 金石錄이 나온 바 있고 이후 많은 저록들이 나왔다. 그러나 금석학이 하나의 학문분과적 성격을 띠면서 크게발전한 것은 淸代에 들어와서이며 翁方綱 王昶 孫星衍 葉昌熾 趙之謙 등 금석에 관한 저록을 남긴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鐘鼎과 碑碣을 포함하는 금석문의 분류에서 각비의 현상기록, 탁본과 비첩에 관한 기록 들을 남기며 비 차체에 대한 분석적 연구 및 서체 역사적 사실등과의 관련 연구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청의 금석학 성행은 바로 조선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金正喜와 翁方綱 등 청의 학자들과의 교유관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김정희를 중심으로한 조선후기 금석학자들은 금석자료의 조사과정이나 조사 및 연구결과의 서술에서 매우 근대적인 학문방법을 취하고 있으며 이는 금석학 연구를 통해서 학문세계에서 근대에의 이행과정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금석학을 학사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근대학문의 성립이라는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은 그렇게 깊이 있는 연찬을 통해서 작성되지 못했으며 기왕의 연구를 정리하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이 금석학의 이론분야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개인적 학술작업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것이며 선사 고고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근대와 접목하는 시기는 극과 극처럼 먼 거리를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발표를 맡게 된 것은 이 분야가 아직 아무도 본격적으로 매달리지 않은 새로운 분야이며 조사 및 자료의 검토 그리고 해석등의 과정에서 지금까지 해온 고고학조사와도 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금석학에 대한 관심을 보다 적극적으로 두고자 하는 마음에서임도 아울러 밝혀둔다.


  

비해당집고첩                                            김생의 전유암산가서

 

2. 匪解堂集古帖과 조선전기의 金石文에의 관심

조선의 금석학은 조선초기인 1443년에 安平大君 李瑢이 匪解堂集古帖을 제작한 것을 그 단초로 인정할 수 있다. 비해당집고첩은 이용이 중국과 한국의 명필 대가들의 書跡들을 모으고 그것을 다시 돌에 새겨 탁본을 하여 만든 서첩이다. 이와같은 방대하고 또 수준높은 서첩이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고려조부터 송대 이래의 많은 중국의 서첩들이 들어왔던 때문이며 이 서첩들은 조선에 들어와 금석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비해당집고첩의 제작으로 이어졌던 듯 하다.

여기에는 東晉簡文帝 王羲之 趙孟頫 등 중국의 명필들과 金生 등 한국의 명필들의 글씨가 망라되어 있는데 한국의 경우 김생 외에는 누가 더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생의 글씨가 중국의 명적들과 나란히 실려 있음은 당시 이미 한국의 글씨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며 신라 이래 명필들의 書跡이 크게 주목받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것은 지금 전하고있는 김생의 田遊岩山家書나 靈業의 神行禪師碑의 서첩들로 짐작할 수 있다.



3. 金石淸玩과 大東金石書 - 17세기의 금석학

그러나 조선에서도 금석학적 관심을 가지고 만들어진 비첩들은 17세기 이후에야 등장한다. 지금 알려진 것으로 가장 오랜 금석첩은 趙涑이 수집하여 제작한 金石淸玩이다. 이 책이 제작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속이 죽은 해가 1668년이며 또 같은 해에 이우의 대동금석첩이 나왔으니 조선금석학의 효시적 서첩으로 알려진 대동금석첩에 앞서는 것은 확실하다. 이는 모두 네 책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일부가 전할 뿐이다. 브리타니카 사전에는 금석청완이 모두 10책으로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또 1932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대동금석서 각권의 목록을 따로 정리해 간행한 대동금석목에는 머리 주에 참고자료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금석청완이 아홉차례 나오고 있으며 그 중에는 금석청완3, 금석청완4, 금석청완7, 금석청완8 등으로 표기된 것이 있어 전 10책으로 된 금석청완이 따로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직 국립박물관 소장 금석청완을 확인한 바 없어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언급하지 못함은 유감스럽다. 현재 발표자가 참고한 금석청완은 조속이 수집 작첩한 것이 분명하며 그것은 趙絅의 서문에 뚜렷이 나와 있다. 현재 두 책만 남아 있으나 표지에 元,亨이라 표기되어 있고 趙絅이 쓴 서문에도 “金石淸玩四卷”이라 되어 있어 모두 네 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권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가 남아 있는데 표지를 포함하여 76쪽으로 되어 있으며 뒷표지에도 탁본편이 붙어 있다. 안에는 세쪽이 비어 있는데 탁편을 떼어낸 것으로 보이며 뒷표지 안쪽 밑에 “一卷中落帳合四片”이라 되어 있어 본래 80쪽의 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로 보아 국립박물관에 있다는 금석청완은 다른 책일 가능성이 크다.

    

금석청완 서문일부                               금석청완 중 김생글씨

첫째 권(元)에는 신라의 金生, 靈業, 崔致遠, 崔仁언 등과 고려의 具足達, 柳公權, 金孝仁, 韓允, 坦然 그리고 조선의 李滉, 金麟厚, 黃耆老 楊士彦 등과 蘇定方 平濟碑 등 모두 35종의 금석문이 한쪽이나 두 쪽에 걸쳐 실려 있으며 둘째 권(亨)은 일부만 남았는데 成石璘 安平大君 등 6종의 금석문이 실려 있다. 첫째 권의 분량으로 미루어 네 권 전체에는 약 140종 정도의 금석문이 실려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당시의 금석문에 대한 관심은 명인의 글씨를 감상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 첩으로 되어 있을 뿐이어서 내용 전부를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조경의 서문에 “수집한 뜻이 오직 書法에만 있었으므로 문자를 갖추지 못하였다. 따라서 어떤 것은 몇 줄 또는 십여 줄만 탁본하였으며 어떤 것은 반장 또는 반장도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고 한 것은 그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金石淸玩에 뒤이어 나온 李俁의 大東金石書는 正帖 5冊 續帖 2冊의 全 7冊으로 300여종의 우리나라 탁본을 수집하여 엮은 방대한 저록이다. 특히 이 책은 비석은 말할 것도 없고 石幢 石刻 등을 포함하고 있어서 당시로서는 가히 한국의 금석문을 집대성했다고 할만 하다. 이 역시 비의 일부만을 첩으로 만들었으므로 비문 전체의 내용을 알 수 없지만 현재 없어진 비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각 첩의 말미에는 각각의 명칭·撰者·書者·건립연대·소재지 등의 목록을 실었다. 이처럼 목록을 따로 만들어 붙이는 작업을 병행한 것은 금석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는 점에서도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대동금석서에는 許穆이 쓴 敍文이 붙어 있으며 서문에는 郎善君 李俁가 백 개가 넘는 書帖을 모았다고 한 바 있다. 또 허목의 문집인 眉叟記言에 王孫郎善君金石帖序라는 글이 있으며 이 글은 날자만 다를 뿐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대동금석서와 다른 대동금석첩이 따로 있었으며 금석첩은 비 전체 탁본을 각각 한개의 첩으로 만들고 금석첩 전체의 목록집을 만들면서 탁본의 일부를 잘라 따로 붙인 것이 대동금석서라는 설도 있다.(今西龍, 大東金石書 解題, 大東金石書 影印本, 亞細亞文化社)

그러나 17세기 중엽까지는 대체로 비문 내용보다는 글씨 자체에 관심이 많은 시기였으며 또 대동금석서는 실제로 금석청완과 같은 형태로 일종의 서첩으므로 대동금석서와 미수기언의 대동금석첩은 같은 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4. 金在魯의 金石錄과 18세기의 금석문 수집의 열기

비첩의 수집과 제작이 본격화된 것은 18세기 이후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비첩은 金在魯가 수집 편찬한 金石錄이다. 이 책은 고려조로부터  조선조에  걸친 역대의 비문들의 拓本을 모아 엮은 책으로 原篇 226책, 續篇 20책 합계  246책의 巨帙로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이 없어지고 39책만이 남아 있다. 현재 남은 것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으로서 큰 비는 한 책에 두 기, 작은 비는 한 책에 열 기 이상의 비문을 수록하였다. 제1책부터 제5책까지는 宋時烈이나 宋浚吉 등 은진송씨들과 관련된 묘비문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인물이나 집안별로 분류하여 편집한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한 책에 평균 3기 씩의 비문을 수록한다고 해도 246책이면 7백 수십기의 비문이 수록되어 있는 셈이 되는데 한책에 열 기 이상의 비문이 실린 경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천 기 이상의 비문이 수록된 대 전집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이후 18세기 전기까지의 금석문을 수록하였다 해도 두 왕조에 걸치는 거의 대부분의 자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도서간행 상에서 볼 때 책 수로 만 보아도 우리 역사상 가장 규모가 방대하다 할 수있으며 금석문집으로는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수록된 것이 비석 전체의 탁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따진다고 해도 윗머리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거질의 금석문집이 등장했다는 것은 18세기 이후 조선의 양반 지식층들이 금석문 수집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으며 또 많은 경제적 지출을 했는가도 짐작이 간다.

김재로의 금석록 이외에도 金石集帖(서울대도서관 古大4016-8)이나 편자와 연대 미상의 금석록으로 표제가 붙은 金石文帖(서울대도서관 古 4016-4-186, V)이 상당수 전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조선조 비문들을 싣고 있으며 마지막 금석문의 연대가 1700년대 중엽인 것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18세기 후반에 작첩된 것들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금석문첩들은 지역별 또는 문중별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경향은 당시 금석자료의 수집과 작첩이 일반적으로 널리 행하여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이제 금석자료의 수집 편찬 열풍은 19세기로 이어지게 되며 단순한 탁본의 수집과 정리 차원이 아닌 주도면밀한 고증학적 연구가 따르게 되며 금석학으로서의 이론의 발전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5. 金石過眼錄과 三韓金石錄 - 19세기, 조선 금석학의 절정

금석과안록의 등장은 조선후기 금석학의 정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금석과안록은 金正喜의 금석학 저술을 대표하는 것이며 古拓에 의한 문자의 고증 방법이나 현장 조사의 중요성을 깨우친 점 등은 현대의 금석문 조사에서 조차 배울 점이 크다 할 수 있으며 조사와 연구의 과정 및 결과를 기록하는 방법에서도 매우 치밀하고 과학적인 면모를 보여 금석문의 연구를 금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로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김정희로 대표되는 19세기 금석학계는 趙寅永 金命喜 李祖默 權敦仁 尹定鉉 田琦 申緯 그리고 三韓金石錄을 남긴 吳慶錫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물론 淸의 금석학이 있으며 김정희 김명희 형제의 청 학계와의 교류 등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나라 학자들의 교류는 중국학계에서 학술이론이 조선으로 들어오고 또한 조선의 금석자료가 중국으로 보내져서 중국에서 조선금석자료집이 간행되기도 했다. 劉喜海의 海東金石苑은 대부분 金命喜가 보낸 금석자료에 의존한 것이기도 하다. 또 청의 何秋濤는 삼한금석록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金石過眼錄은 진흥왕 순수비 중 黃草嶺碑와 北漢山碑의 탁본을 검토하거나 또는 직접 현장조사를 한 후 작성한 논문으로 碑名稱, 碑文, 考察의 순서로 서술하였다.

비의 명칭은 原碑에 碑額이 없으므로 김정희가 스스로 붙인 명칭이다. 그는 북한산비를 僧伽眞興王巡狩碑, 또 황초령비를 咸興眞興王巡狩碑라 하고 황초령비에는 제목 아래에 無額이라고 표기하였다. 여기서 額이란 篆額 즉 비의 이름을 비 머리에 쓴 것을 말한다.

碑文은 비의 문장 전체를 판독하여 그 釋文을 옮겨 썼다. 지금까지의 금석자료를 정리한 서첩들이 목록과 간단한 비의 내용을 요약해 기록한 것에 비하면 금석과안록의 전체 비문의 석문을 기록한 것은 획기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금석학의 가장 기본적이고 또 핵심 작업은 判讀이며 판독여하에 따라서 내용의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석문의 기록은 비석에 새겨진 형태를 충실히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각 행의 시작과 끝을 비석에 있는 그대로 따랐으며 글자가 없는 부분을 빈칸으로 두거나 글자가 파손되어 일부의 획만 보이는 경우에는 확인되는 획만 표기하였다. 따라서 글 중의 판독문만 보더라도 비의 형태는 물론 현재 비문의 상태까지 가늠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가능하면 현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겨고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黃草嶺碑의 釋文 表記 부분                   北漢山碑의 釋文 表記 부분



고찰 부분은 비의 위치와 현 상태, 크기, 비문의 行과 字의 구성, 글자에 대한 고증, 비머리의 형식, 내용의 역사적 고찰, 비가 있는 지역의 변천과 진흥왕 당시의 행정 소속, 진흥왕의 영토개척, 연호 인명 입비연대 관등과 관직, 異體字 등에 관한 순서로 고찰 서술하였다. 이러한 고찰의 깊고 치밀함은 김정희의 고증학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의 금석문 연구와 비교하여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글자에 대한 고증 부분에서는 글자를 상태에 따라 字全者 不全者, 刓者, 空格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字全者는 자획이 완전히 살아 있는 글자, 不全者는 자획이 불완전한 글자, 刓者는 자획이 깎여나간 글자, 空格은 본래 글자가 없는 빈 칸을 말한다. 김정희는 판독된 글자 수를 말할 때 공격까지 포함시키는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마멸되어 글자가 없어진 부분과 본래 글자가 없는 부분을 확인하여 표기하는 방법으로 그가 얼마나 비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문헌비고 금석록 해동집고록 등 선행 조사연구에 대한 검토 평가와 함께 구탁본의 이본들과의 비교검토, 그리고 비석을 직접 조사한 후 탁본으로 조사한 결과 비교한 것등은 김정희가 하나의 비석을 고증하고 연구하는데 기울인 노력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금석과안록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며 금석과안록이 포함된 김정희의 문집이 간행된 것은 1934년이다. 따라서 금석과안록이 저술된 이후 학자들 사이에는 약간의 필사등본 만이 유통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三韓金石錄은 김정희가 죽은(1856) 2년 후인 1858년 吳慶錫이 펴낸 금석학 저술이다. 삼한금석록의 서술방식이 금석과안록과 비슷한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금석과안록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청의 금석학자들의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본문에서 진흥왕비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금석과안록을 참고하지 않은 데서도 짐작할 수 있으며 옹방강의 후표재집, 선성연의 황우방비록, 왕창의 금석췌편 등 청의 관련서적을 많이 참고하고 있는데서도 확인된다. 특히 금석과안록이 단지 두 비석에 대한 논고로 그친 데 비해 삼한금석록은 서문 범례 금석목록 본문 순으로 되어 있어서 저서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 한층 발전된 짜임새를 보여준다. 그러나 목록은 147종이나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실제 8종의 비 만으로 그친 미완성작임은 매우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범례는 김정희 이후의 금석학이 이미 상당히 과학적인 수준으로 올라섰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기할 만하다. 범례에서는 직접 조사한 것 만을 대상으로 하며 전문을 다 기록하되 새겨진 문장의 형태나 글자의 형태를 그대로 기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또 크기를 기록할 때는 漢의 慮俿尺을 쓰며 칭원법을 유년법을 따르고 시대는 전 왕조인 고려에서 끊는 다는 것을 중국의 예를 들어 밝히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금석목록은 삼국과 고려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는데 삼국이 35종, 고려가 112종으로서 모두 147종을 실었다. 여기에는 고구려고성각자 2종이 포함되어 있고 진흥왕비는 진흥왕정계비와 진흥왕순수비가 실려 있다. 진흥왕정계비는 본문에 있으나 진흥왕순수비는 본문에 없다. 진흥왕정계비가 황초령비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진흥왕순수비는 북한산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비의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황초령비를 다룬 진흥왕정계비의 내용을 보면 추측할 수 있는데 즉 황초령비는 상반부와 우하단부가 결실된 탁본에 의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 탁본에서는 첫 줄에 “八月二十一日癸未眞興太王” 만 있고 그 이하의 “巡狩管境” 부분이 없어 이 비를 순수비로 규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삼한금석록의 진흥왕정계비 부분

 

삼한금석록의 진흥왕정계비 부분을 조금더 자세히 보면 금석과안록에서 다룬 탁본에서 오른 쪽 아랫부분의 탁본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고찰부분에서 이전의 업적을 언급하면서 금석과안록이 다루어지지 않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경석이 금석과안록을 보지 못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렇다면 당시의 금석학 연구자들이 서로의 연구결과를 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였거나 아니면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저술한 후 그것을정식 간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후학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와같이 금석과안록과 삼한금석록 만으로도 19세기 이후 조선의 금석학이 어느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있다. 이들 외에도 조인영 권돈인 홍량호 등 여러 금석학 연구자들이 있었으며 특히 등총린은 조인영이 청 유희해의 저록으로 알려진 해동금석존고의 원저자임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밖의 금석관련 저작물로서 이조묵의 나려임랑고, 김병서늬 금석목고람, 찬자미상의 서상우 수택본인 나려방비록 등이 있으나 모구 목록집의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금석목고람은 표지에는 금석고편람이라 되어 있으며 김병선의 자서가 붙어있다. 자서에는 오경석이 1875년 북경에 갔다 오면서 포자년이 간행한 해동금석원을 가지고 왔으며 그 책은 유희해가 각종 비의 제발 70여종을 정리한 것으로 반백인이 가지고 있던 것을 유희해가 죽은 후 포자년 반백인 두 사람이 교열하여 1873년 간행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조선에 해동금석원이 들어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책에는 포자년의 해동금석원서와 유희해의 서문, 그리고 조선의 이혜길의 서문이 함께 소개되어 있어서 당시 학자들에게 해동금석원이 얼마나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내용은 단순한 목록집을 벗어나서 비의 현상과 내용에 대한 고증을 비교적 상세하게 붙이고 있다.

나려임랑고는 금석관련 논저 가운데서는 드물게 활자본으로 되어 있다. 1824년 간행된 이 책은 겨우 7기의 비를 정리한데 불과한데 이조묵의 자서에는 수많은 비를 찾아다녀 그중 일곱 개의 비만을 가렸다고 하였으나 그 기준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집자비와 종정문 등은 직접 쓴 것이 아니며 또 정밀하지 않아 탁본하여 감상하기에 충분치 않아서 함께 다루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책에는 뒤에 탁비비결이 붙어 있는데 이 글은 간단한 것이지만 탁본을 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적시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탁본할 때 비질을 한다거나 짙고 옅은 것이 일정치 않다는 등 조선조 탁본 방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치한 탁본을 하기 위해 비의 세척, 먹방망이 만드는 법에서부터 먹칠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를 세밀히 쓰고 있다. 이는 당시 탁본 방법을 이해하거나 또 당시학자들이 금석자료 조사 방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나려방비록은 서상우의 수택본이다. 서상우는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을 지낸사람으로 1903년에 죽었으므로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책은 신라와 고려로 나누어져 있으며 신라 31종 고려 94종을 싣고 있는데 그 중에는 같은 비의 음기를 독립된 목록으로 두기도 하였다. 이 책의 진흥왕 순수비 조에는 김정희와 조인영이 비를 답사하여 68자를 확인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19세기에 들어오면 본격적인 금석조사가 실시되기도 하고 또 괄목할 만한 연구서들이 저술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9세기 이후 청 고증학의 영향을 깊이 받은 김정희 일파의 업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조사 연구의 열성에 비해 금석문 자체의 광범위한 조사나 조선금석자료를 망라한 자료집 또는 연구서들이 나오지 않았음은 당시 조선 금석학계가 가지고 있는 한계였을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의 나라 사정이 김정희나 오경석 등 대표적인 금석학자들이 오로지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 않았으며 그들은 모두 자신의 뜻과 관계 없이 정치적 사건에 휩쓸려 고통을 받거나 또는 조선의 개혁에 앞장선 근대의 선구자들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는 문제였다.

다만 근대적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김정희의 연구나 비록 미완성으로그쳤지만 삼국에서 고려에 이르는 대표적 금석문을 체계화하여 본격적 금석연구서를 계획하였던 오경석을 통해 우리의 학문이 스스로 근대를 향해가려는 노력을 볼 수 있고 또 상응하는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6. 글을 맺으며


이상에서 살펴본 조선 금석학의 흐름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금석학이 성립할 수 있었던 시기는 조선후기 그것도 18세기와 19세기 뿐이었음을 알려준다. 즉 그 이전의 금석에 대한 관심은 금석자료를 학문의 세계에서 다루었다기 보다는 옛 명필들의 글씨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다룬 것이었다. 조선 전기의 금석학을 대표한다는 조속의 금석청완이나 이우의 대동금석서 등 대부분의 저작물들은 탁본의 조각들을 모은데 불과하였다.

羅麗訪碑錄

 

 

17세기에 들어와 탁본 수집이 크게 붐을 이루면서 김재로의 금석록과 같은 방대한 금석전집이 출현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이 금석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데 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결국 금석학을 분과학문으로 독립시키고 그러한 방향에서 연구를 집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 김정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점에서 김정희는 조선을 대표하는 금석학자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김정희 일파라 할 수 있는 김정희 김명희 조인영 등의 청학계와의 교류는 조선 금석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주었으며 이는 금석과안록이나 삼한금석록과 같은 연구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이들 김정희와 오경석의 금석학 연구는 그 방법이나 연구내용으로 볼때 단지 금석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발전시켰다기 보다는 모든 학문이 경학의 범주에 머물고 있던 조선의 학문을 새로운 근대적 학문으로 바꾸는 개혁적 작업이었다. 또 오경석등은 학문의 세계에서 뿐 아니라 실제 조선사회를 근대화시키려는 개혁작업에 앞장섰던 인물들이었으며 또한 학문의 연구가 사회의 변화와 어떻게 일관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값지다 할 것이다.

출처 : jjunoo
글쓴이 : 전형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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