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淸나라 시대의 서예
1. 淸나라 시대의 서예 개관
淸나라는 女眞의 후예인 滿洲族이 세운 정복 왕조이다. 明나라 萬曆 44년(1616) 東北의 滿洲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한 建州 女眞의 누루하치(努爾唅赤, 淸 太祖)는 국호를 후금, 연호를 天命이라 하고 칸(汗)에 등극하였다.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한 후금은 明나라 天啓 5년(1625) 수도를 瀋陽으로 옮겼다. 이후 누루하치를 계승한 혼타이지(皇太極, 淸 太宗)는 계속 남쪽과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明나라 북방을 자신들의 통치권 속에 흡수하였다. 1636년 혼타이지는 국호를 淸, 연호를 崇德이라 고치고 明나라와 직접적으로 대항하였으며 漢化 정책을 수립하고 中國 정통의 정치와 사회 제도를 채용하였다. 1644년 太宗의 뒤를 이은 世祖 福臨은 年號를 順治라 정하고 明나라를 정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때 明나라에서는 농민 봉기의 주도권을 잡은 李自成이 北京을 점령하였고 毅宗이 자결함에 따라 明나라는 멸망하였다. 동시에 明나라의 장군인 吳三桂는 李自成에 대항하기 위하여 淸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기회를 노리고 있던 淸나라는 李自成을 격파한 뒤에도 물러가지 않고 도리어 北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明나라를 계승하였다. 그 후 明나라의 遺臣들이 福王, 唐王, 魯王 등을 옹립하고 復明을 기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明나라를 계승한 淸나라는 思宗의 시신을 거두어 후장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었으며 科擧 제도를 실시하여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정책에 역점을 두었다. 世祖 이후의 모든 황제들은 자신은 물론 滿洲族의 황족과 통치자들에게 漢語를 사용하고 漢學을 배우게 하는 등 漢文化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한문화를 수용하는 정책은 수용에 머물지 않고 자신들이 완전히 漢文化에 동화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것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淸나라 왕조가 두려워한 것은 그들이 漢化되는 것이 아니라 한족들에게 정권이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淸나라 왕조는 民族意識이 배양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학문과 사상을 통제하였다.
만주족의 淸나라가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한문화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그것을 수용하고 있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였다. 학술과 사상적으로 가장 정통이라 할 수 있는 孔子를 존중하여 ‘大成至聖文宣先師’로 높여 부르고 그 65代孫인 孔允植에게 衍聖公의 작위를 내렸으며 어렵고 혼란한 상황에서도 孔廟를 중건하였다. 康熙帝 시대에는 朱子學을 제창하였으며 孔子를 ‘萬世師表’로 지극히 받들었다. 이 때 학술과 사상계에서는 顧炎武, 黃宗羲, 王夫之 등이 나타나 明나라 이래의 陽明學에 반대하고 經世實用을 표방하면서 考證學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고대의 經史의 考證과 訓詁, 문자의 音韻과 형태 등의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이와 같은 학문은 淸나라의 대표적 학문으로 漢學 혹은 樸學이라 부르고 있다. 樸學의 탄생은 학문, 사상, 예술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으며 새로운 철학을 탄생하게 하였고 다양한 심미적 영역을 개척하였다. 金石學과 文字學 등 서예와 관련된 학문의 발전은 서예의 학습과 창작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고대의 문자 자료인 銅器 銘文과 刻石 銘文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金石學과 文字學의 성행은 銘文의 내용과 서체의 연구는 물론 서체의 심미적 범주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淸나라 시대의 서예는 학습과 창작의 심미적 추구를 특징으로 하여 크게 帖派와 碑派의 두 가지 書派로 나누어진다. 帖派는 시대의 흐름으로 다시 董其昌을 숭상한 시기와 趙孟頫를 숭상한 시기로 나누어지며 碑派는 唐碑를 숭상한 시기와 漢魏의 刻碑를 숭상한 시기로 나누어진다. 帖學은 唐宋 이래 中國 서예의 전통적 학습 방법으로 王羲之의 서예를 모범으로 하였다. 明末淸初에는 元나라의 趙孟頫와 明나라의 董其昌이 王羲之의 서예를 모범으로 학습하고 창작하여 가장 성공한 인물로 꼽히고 있었다. 淸나라 聖祖인 康熙帝(재위 1662-1722)는 董其昌의 서예를 특별히 좋아하여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수집하였으며 표구하고 裝幀하여 秘閣에 수장하였다. 따라서 明나라 후기 남방을 중심으로 필명을 떨치던 董其昌의 서예는 淸나라 조정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 커다란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 董其昌의 서예는 科擧 시험의 표준 서체로 자리잡아 사대부들의 干祿 正體가 되었다.
董其昌은 元나라이래 유행하던 趙孟頫의 서예를 숙련된 匠人의 서체라 하여 비판하고 담백함과 단아함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董其昌의 서예는 趙孟頫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董書를 배우는 사람들도 그 특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천편일률적으로 통일되었으며 柔弱한 병폐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世宗의 雍正시대를 거치고 高宗인 乾隆帝(재위 1736-1795)에 이르러 淳化軒을 건립하고 [淳化閣帖]을 珍藏하여 王羲之의 서예를 숭상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元나라의 王羲之라 불리는 趙孟頫의 서예가 董其昌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후 趙孟頫의 서예는 元明시대에 유행하였던 것처럼 淸나라 시대에도 계속하여 帖派의 서예가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雍正과 乾隆시대 몇 차례의 文字獄은 지식인들의 학문과 사상의 연구 범주에 큰 영향을 끼쳐 經史의 考證과 訓詁를 중심으로 하는 樸學이 탄생하였으며 그 영향으로 金石學과 文字學이 발전하게 되었다. 金石學과 文字學의 성행은 서예의 심미적 욕구에 직접적 작용을 하여 새로운 심미적 범주를 요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唐宋시대 이후 성행한 帖學은 明나라에 이르러 예술성보다는 규칙적이고 통일성을 강조하는 臺閣體를 탄생시켰고 淸나라에 이르러서는 館閣體로 계승되어 더욱 심화되었다. 明나라 후기 낭만파 서예가들에 의해 싹을 보이기 시작한 帖學의 반동은 淸나라 시대에 이르러 樸學을 사상적 기초로 한 서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書學인 碑學을 탄생시켰다.
碑學은 [淳化閣帖]을 중심으로 학습하는 帖學과 달리 先秦시대의 종정이나 簡牘, 漢魏와 隋唐의 석각 등 역대의 금석 서체를 중심으로 서예를 학습하는 書學이다. 仁宗의 嘉慶 연간(1796-1820)과 宣宗의 道光 연간(1821-1850)에 이르러서는 역대의 수많은 금석 자료가 출토되었고 鄧石如와 阮元 등의 이론과 실기에 힘입어 碑學은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으며 帖學과 어깨를 견주게 되었다. 이때 道光帝는 한자의 잘못 변화된 자형을 바로잡아 정확하게 사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필획과 結字의 법도가 엄격한 初唐四大家의 楷書는 이와 같은 요구에 매우 잘 부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급속히 유행하였다. 文宗의 咸豊 연간(1851-1861)과 穆宗의 同治 연간(1862-1874) 이후에는 包世臣과 康有爲 등 碑學파 서학자의 적극적 주장으로 漢魏의 刻石 서체를 중심으로 한 碑學이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碑學의 성행은 서예의 학습과 창작의 심미적 욕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魏晋시대 이후 창작의 대상에서 소외되었던 篆書와 隸書가 行草와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창작 소재의 전면으로 나타났으며 北魏의 서체를 중심으로 楷書도 창작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篆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篆書를 소재로 하는 篆刻이 예술의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中國 서예사에서 碑學의 탄생은 한마디로 서예의 예술적 부흥을 이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1). 前帖學期(1644-1722); 明朝 書風의 연속
周亮工(1612-1672)은 河南省 祥符 사람으로 字는 元亮이고 櫟園, 陶庵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明나라 崇禎 13년(1640)에 進士에 급제하였으며 浙江에 監察御使로 나가 있을 때 明나라가 멸망하였다. 淸나라에서도 출사하여 戶部右侍郞에까지 올랐다. 周亮工은 古文과 시문에 능통하였으며 서예와 篆刻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형식주의를 반대하고 性情에 따라 솔직하고 담백하게 표현하는 문사를 구사하여 性靈派 시문의 선구자로서 ‘櫟園先生’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賴古堂詩鈔》, 《賴古堂書畵跋》, 《印人傳》등이 전하고 있다. 서예도 시문과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것을 반대하여 성정과 붓의 흐름에 따라 運筆하여 질박하고 천진한 심미적 범주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明나라 시대의 何震의 印風을 이어 받아 篆刻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朱耷은 서예보다는 회화로 더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그림의 款識에 주로 사용한 八大山人으로 더욱 유명하였다. 그는 花鳥畵에 뛰어났으며 그 가운데 새와 동물은 대부분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형상으로 표현하여 나라를 잃은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었다. 또 八大山人의 서명은 마치 草書의 ‘笑之’와 ‘哭之’의 형태로 하여 明나라에 대한 追念과 자신의 슬픔 감정을 표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朱耷의 서예는 魏晋시대의 鍾繇와 王羲之로 입문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법칙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의 성정에 맡겨 창작하였다. 점획의 起筆과 運筆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아 마치 붓끝이 닳아빠진 낡은 붓으로 쓴 것 같은 필획을 형성하였고 結字와 結構에서도 어린아이가 처음 글씨를 쓰는 것같이 천진하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그의 書風은 法帖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연습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련된 맛은 없으나 속기가 없고 질박한 것이 특징이다. 朱耷은 書畵 작품을 高官大爵이나 부귀한 사람들에게 주거나 파는 것을 싫어하였고 떠돌이 佛僧이나 道人 혹은 어린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明나라 후기에 탄생한 낭만파 書風은 明末淸初의 王鐸, 傅山 등에 의해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으며 宋曹, 許友, 法若眞 등의 서예가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낭만파 書風은 전통적 書風을 좋아하는 淸나라 초기 順治帝와 康熙帝 등의 기호와 맞지 않아 빠르게 서단의 중심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明나라가 멸망한 후 淸나라에서 첫 번째 황제인 世祖는 비록 6세의 어린 나이에 등극하였으나 王羲之의 서예에 심취하였으며 [黃庭經]을 특별히 좋아하였다. 그는 [黃庭經]을 비롯한 王羲之의 여러 法帖을 臨書하여 대신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전통 서예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聖祖인 康熙帝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총명하였으며 학문과 문예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문화 사업을 벌였다. 南書房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자신도 학자들과 함께 經史를 연구하였으며 천문, 지리, 수학 등 여러 방면으로 안목을 넓혔다. 학문을 장려하기 위하여 편찬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朱子全書》,《康熙字典》, 《淵鑑類函》, 《佩文韻府》, 《古今圖書集成》, 《佩文齋書畵譜》등 방대한 저작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淸王朝의 안정을 위하여 사상적 통일을 꾀하였으며 언론의 엄격한 통제를 실시하였다.
汪士鋐(1658-1723)은 江蘇省 長洲 사람으로 字는 文升이고 若若, 退谷, 秋泉, 松南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청년 시절에 이미 文辭로 명성을 얻었으며 康熙 36년(1697) 進士에 급제하여 翰林院編修를 제수 받아 관직에 나갔다. 그는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품이 후덕하고 청렴하여 康熙帝의 총애를 받았으며《全唐詩》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康熙 47년(1708)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그후 강남에 머물면서 서예를 학습하고 詩文을 읊조리며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吳門을 중심으로 한 강남에서는 그의 서예를 姜宸英의 서예와 함께 칭찬하여 ‘姜汪’이라 부르고 汪士鋐의 아버지와 3형제의 재주를 칭찬하여 ‘吳中四汪’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평생 많은 저술 활동을 하여 《長安宮殿考》, 《全秦藝文志》, 《近光集》, 《秋泉居士集》등의 저작을 남기고 있다. 汪士鋐은 비교적 큰 글씨의 行書에 뛰어났으며 당시 유행하던 董其昌 書風의 유약한 필획에서 벗어나 강건한 필획을 표현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梁巘의 《論書帖》에 의하면 汪士鋐은 王羲之와 당시에 유행하는 書風을 배우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는 顔眞卿의 [麻姑仙壇記], 褚遂良의 [陰符經]을 중점적으로 연마하여 필획에 골기를 실으려 하였다고 전한다. 康熙帝는 그의 서예를 매우 좋아하였으며 ‘國朝第一’이라 칭찬하였다.
鄭簠(1622-1693)는 江蘇省 上元 사람으로 字는 汝器이고 號는 谷口이다. 가업인 의원을 경영하면서 서예를 학습하였다. 어린 시절에 宋珏(1576-1632)의 문하에 입문하여 篆書와 隸書를 배웠으며 특히 평생 漢隸의 연구에 심취하였다. 그는 山東과 河北 지역을 찾아다니며 漢碑를 수집하여 집안을 가득 채웠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拓本을 떠서 가져왔으며 밤낮으로 臨書하여 필법을 터득하였다. 그와 친밀한 관계였던 朱彝尊은 그의 隸書를 고금의 제일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包世臣도 《藝舟雙楫》에서 그의 隸書를 ‘逸品上’이라 하였다. 鄭簠는 揚州를 중심으로 활동하여 程邃, 石濤, 萬經, 朱彝尊 등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후에 揚州八怪 가운데 뛰어난 서예가인 金農, 高鳳翰, 鄭燮 등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후대의 錢泳이 《履園叢話》에서 “國初有鄭谷口始學漢碑, 再從朱竹垞輩討論之, 而漢隸之學復興.”(淸나라 초기 鄭簠가 처음으로 漢碑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시 朱彝尊 등이 그것을 토론하게 되면서 漢隸가 부흥되었다.)이라 한 것과 같이 鄭簠는 揚州八怪를 중심으로 篆隸를 부흥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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