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자의 발생에 대하여 역사상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귀납적으로 말하면 기호나 도화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주역(周易)>계사에 보면 상고시대에는 줄을 묶어 다스렸다고 하였다. 따라서 결승이 최초의 간단한 기호로 큰 일은 줄의 매듭을 굵게 하고, 작은 일은 줄의 매듭을 가늘게 하였다. 도화는 그림을 그려 자연을 표현하였으니, 예를 들면 '虎'자는 호랑이의그림, '馬'자는 말의 그림을 그려 나타내는 방법이다. 이후 사회의 발전에 따라 이러한 것들 이 수요에 충족할 수 없게 되자 문자와 도화는 점점 분리되어 거리가 생겨 문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할 수 없게 되었다.
문자란 번작하고 자세하게 그리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단지 특징만을 나타내면 되는 것 이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인식시키면 그만이다. 물론 인류가 문자를 창 조함에 반 드시 민족언어와 서로 결합되어야만 비로소영원히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노신은 일찍이< 학문학사강요(學文學史綱要)>에서 "말이란 풍파와 같다. 출렁거리던 파도소리가 오래 지나 가면 그 자취도 아득해져 단지 귀와 입으로만 전해질 따름이다. 단지 부족한 것은 멀리 전 달되고 후세에 이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 사물 에 감동을 받아 이를 펴내면 노 래가 된다. 노래는 감동을 주지만 그 일은 잊게 되는 것이다. 언행을 기록하는 것은 일들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다. 언어만 믿으면일들이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줄을 묶어 다스렸고, 뒤에 가서는 성인이 주역의 서결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비록 문자가 많지 않더라도 설명은 반드시 문자에 의지하여야만 비로소 사 람들의 사상이나감정과 언행을 전달하여 사회의 수요에 적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문자는 성 음형체훈고의 세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성음과 형태 그리고 의의 가 있어 문자의 발생과 법칙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자가 문자의 초보 적인 역할을 하려면 먼저 형태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글자의 뜻을 해석 하려면 먼저 문자의 구조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되기 때문이다. 문자의형태는 체 계가 있기 때문에 비교적 탐색이 용이하다. 만약 형태가 없다면 문자는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다.
한 나라 허신은 <설문해사(說文解字)>의 서문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형태를 그린 것을 '文'이라 하고, 그후에 형태와 소리가 서로 도와주는 것을 '字'라 한다.
'文'이라는 것은 만물의 근본이고, '字'라는 것은 말이 불어나 점점 많아지는 것을 뜻한다. "라고 하였다. 허신의 이러한 견해를 살펴보면 문자는 사물의 유형으로써 형상의 제작을 취 하는 것을 말한다.'文'의 본래 의미는 실이 섞여져서 나타는 무늬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에도 이러한 상형의 흔적이 남아 있다. '字'는 '文'에서부터 발전하여 한편으로는 그 형태를 취하고 다른 한편으 로는소리를 첨가하여 형태와 소리르 갖추어 사물의 발전에 따라 점점 그 수효가 증가하여 형성자가 더욱 많아졌다.
상형자를 보면 어떤 것은 자연계의 형상과 어떤 것은 기물의 형상을 취하였고, 어떤 것은 거북이의 무늬나 새의 발자국 등의 형상을 취하여 누구나 한 번 보면 금방 어떤 물체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형성자를 보면 대부분 한쪽의 형태로 의미를 나타내고, 한쪽은 소리로써 음을 나타낸다. 이외에 지사(指事), 회의(會意), 가차(假借), 전주(轉注) 등을 합하여 육서(六書)라고 한다.
그러면 문자의 시작은 언제쯤일까? 이것은 매우 단정하기가 어려운 문제다. 어던 학자는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甲骨)에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을 최초의 문자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을 부정하여 말하길 갑골문은 이미 성숙된 문자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반드시 문자의 발달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자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갑골문 이전부터 문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최근 중국 서안(西安) 반 파(半坡)에서 출토된 임동채도기(臨潼寨陶器) 위에 새겨진 문자와 청해락도현(靑海樂都縣) 유만(柳 ) 문자의 부호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정식으로 문자가 창제되기 이전에 기억을 보 존하는 방법으로는 실물(實物)서결(書결)도형(圖形)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실물은 가장 가단히 일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기중에서 가장 유행하였던 방법 이 앞에서 말한 결승(結繩)이다. 결승 이후에 부결(符결)의 방법이 생겨났으니, 목판이나 혹 은 목판 위의 한구석을 흠을 내거나 기타의 부호를 남겨 증거로 삼는 방법이다.
'결'은 즉 새긴다는 의미다. 따라서 서결(書결)이란 그림이나 문자를 새긴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당시의 문자가 대부분 기물 위에 그림을 새긴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종류의 방법은 단지 사람들이 도형을 통하여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어서 진정한 문자라고 볼 수는 없다. 진정한 문자는 도화성이 강한 부호로 언어를 제대로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도화는 실물과 비교할 때 매우 진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을 기록하는 도화는 한자 의 전신이라 할 수 있으며, 많은 발전을 거쳐 번잡한 것을 간단히 하고 정리하여서 구체적 인 언어성분을 대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음과 형태를 첨가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문자는 탄생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 강조할 것은 문자의 창제에 관한 문제다.
옛사람들의 논문에서는 대부분 문자의 창제를 모인(某人)의 공로로귀속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부당한 것이다. 노신(魯迅)은<문외문답(門外問答)>에서 "당시 사회상으로 불 때 창힐 혼자서 문자를 만들 수는 없었다. 때로는 칼과 자루에 새겨진 한 점의 그림, 또는 문설주에 새겨진 그림 등이 마음과 입으로 서로 전해져 문자가 많아지자 사관(史官)이 이를 채집하여 일을 기록하였다. 중국 문자의 유래는 아마도 이러한 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자란 백성들 사이에서 싹이 터서 뒤에 어떤 특권자가 이를 모아서 정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국 고대의 유명한 사상가인 순자(筍子)도 <석폐(釋蔽)>에서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 지만 창힐만이 유독 전해지는 것은 그가 일찍 태어났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많지 만 후직(後稷)만이 유독 전해지는 것은 그가 뛰어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문자가 결코 성인이나 천재에 의하여 창제되는 것이 아니라 고대 백성들의 실제생활 중에서 이루어진 지혜요, 결정체라는 것을 설명한 말이다. 문자란 무에서 유가 탄 생되는 것이 아니다. 적은 데서부터 출발하여 점점 많아지자 오랜 기간 동안의 선별을 거쳐 마침내 약속들을 정하고 풍속으로 이루어져서 문자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2.서법예술이란 무엇인가?
서법(書法)이란 탄력성이 풍부한 독특한 모필로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 한자(漢字)조형의 특질에 의하여 예술구상과 수법을 거쳐 만들어진 형태를 말한다. 형식상으로 본다면 서법은 정신과 풍채를 중요시하고 그 다음으로 형태와 바탕을 친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지혜의 헤아림은 끝없이 넓고, 법이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풍채와 정 신을 으뜸으로 보고, 곱고 아름다운 효용성을 그 다음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중의 오묘함에 대하여 예사람은 "심오하고 현묘함은 사물의 곁에서 나오고 그윽하고 깊은 이치는 아득한 속에 숨겨져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서법예술이란 소리가 없는 소리요, 형태가 없는 형체인 것이다.
서법예술에는 자신의 규율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붓 잡는 법, 팔을 운용하는 법, 붓 을 운용하는 법, 먹을 사용하는 법, 글자를 구성하고 배치하는법, 운치를 나타내는 법 등등 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예술형식은 왕왕 예술수법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 또는 이상을 표한한다. 따라서 이치는 숨겨져 있으나 의미는 심장한 것이다. 때로는 종횡무진한 뜻을 표현하기도 하며, 때로는 울적한 심정을 토로하곤 한다. 작품안에 운치와 풍채 그리고 기세를 표현하기 때문에 붓은 정이요, 먹은흥취라고 한다. 서법이 비록 서사적인 면과 서정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지만, 한자라는 일정한 대상에 의 존하여야만 한다. 만일 서법이 한자의 기본 구조와 점과 선의 본질을 벗어나 추상적인표현 으로 진행되어진다면 이는 이미 서법이라 볼 수 없다. 서법의 표현수단은 회화나 조각과 같 이 사물의 외형을 본뜨는 것이 아니요, 문학과 같이 고사(故事)를 서술하고 내심의 감정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음악에서의 악기와 비교적 서로 가까운 면이 있다. 악기는 선 율과 화임 그리고 연주 등의 음향효과로 직접 미감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서법이나 악기는 모두 사상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뛰어나지만, 반대로 흉내내고 서사하는 데에는 뛰어나지 못하다. 이것은 서법의 각 체가 비록 다르다하나 조형상에 있어서으이 공통점은 점과 선으 로써 구성된 문자의 형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점과 선 혹은 구성의 단위는 문자를 이루는 형태의 전제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충분한 가변성과 표현력을 구비하고 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각 서체의 형태에는 허한 것 과 실한 것, 펴있는 것과 오므라져 있는 것, 성긴 것과 빽빽한 것, 기울어져 있는 것과 바로 세워져 있는 것 등이 서로 대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동일미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서예에 구비되어 있는 예술적 미학요소이다. 이러한 데에다 부드럽고 탄력성이 풍부한 모필 에 먹을 충분히 뭍혀 조형의 규율을 준수하면서 가변적요소를 운용하면, 문자의 짜임새에 독특한 풍격의 형식미를 부여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형식미 안에 붓을 들거나 누르기도 하고, 무디게 하거나 꺾기도 하며, 천천히 쓸 때와 급하게 쓸 때의 조절을 잘하여 운율의 미를 창출한다. 또한 점과 선으로는 형태와 평면을 배치하고, 좌우로 기울어진 것과 바른 것을 균형있게 하며, 대소길이의 변화를 주며, 움직임과 고요함 그리고 거두어들임과 내쫓는 것을 알맞게 하여 정적인 맛과 동적인 맛을 자아내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제어하고, 호응하여 어우러져야 한 다. 이렇게 하여 눈에 보이는 형상은 지면상에 표현된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점과 선에서 나 온 예술적 마력인 것이다. 서법의 경지는 고도의 법을 숙련시켜 법없는 가운데 법이 있어야만 지극한 법이 되며, 고 심은 극도로 하면서도 고심의 흔적이 없어야만 비로소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하겠다.
3.글씨를 배우는 흥취는 어떻게 배양하여야 하나?
서예는 유규한 역사를 가진 중국 전통예술이다. 서예는 독특한 풍격과 무궁한 매력을 지 닌 동시에 생활환경을 미화시킬 수 있고, 심신을 길러 정서를 함양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서예가 형성된 이래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며, 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각광을 받게 되 었다. 서예의 흥취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점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면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생리적으로 볼 때 어떤 종류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종류의 것을 좋아하면 반드시 무궁한 흥취를 자아내게 한다. 물론 좋아한다는 것은 와전히 생리적인 측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적인 작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정신적인 장용을 관념이라 한다. 흥취는 천성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연마와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문학을좋아하는 사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 등등 은 대개 사회환경의 영향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건반사로 말미암아 어떤 종류의 것을 좋아하게 된 이후에 피나는 수련과 단련을 짷는데 이때 흥취도 저절로 생기게 되는 것 이다. 글씨를 배움에 있어서 어떻게 하여야만 심도있는 흥취를 배양할 수 있는 것인가? 첫째, 먼저 글씨를 배우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서예란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것마 추구해서는 안된다. 서예는 일종의 유익한 활동이며, 개인의 사상과 덕행에 대한 수양이며, 예술수양이며, 문화수양이다. 그러므로 서예를 통하여 침착함과 인내심을 길러 심 신의 건강과 우아한 흥취를 높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이 방면에 대한 상식을 넓혀야 한다. 예를 들면, 전시회를 통하여 많은 작품을 보아 야 하며, 서예이론에 대한 많은 참고서와 지식을 쌓아야 하며, 명산대천과 각지에 흩어져 있 는 비석과 묵적(墨迹), 편액(篇額)들을 감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셋째, 항상 서예의 대가와 기초가 잘 닦여진 동호인과의 교류르 통하여 서예의 흥취를 높 이고, 명작들을 감상하여 안목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몇 가지의 요소를 구비하면 흥취는 더욱 증가될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서예에 대한 흥취는 초보적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사회의 관심과 끊임없는 서예교류와 보급, 높은 문화수준과 생활의 향상 등으로 서 예 인구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서예에 대한 흥취와 목적에 따라 성패와 영향이 달라진다. 뜻이 굳건한 사람은 흥취도 갈수록 농후하여져 성공률이 높지만, 뜻이 굳건하지 못한 사람은 흥취도 점점 감소하여 중도에 포기하기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예와 그것에 대한 흥취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예를 배우려면 그것에 대한 정 확한 개념이 있어야 하며, 항심을 가지고 나아가야만 비로소 그 성취를 이룰 수 있다.
4.글씨를 배우려면 어떠한 단계를 거쳐야 하나?
글씨를 배우려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방법과 단계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전 쟁을 함에 있어 만약 세부적인 계획이 없다면 승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문제는 초학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어떤 초학자들은 순서없이 글씨를 배우기도 하고, 혹은 되는 대로 배우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글씨에 직접적인 영향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글씨를 배울때는 어떻게 시작하여 어떤 경로를 거쳐야 하느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있어야만 된다. 만일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힘 만 들고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 헛수고를 면할 수 없다. 글씨를 배울 때의 첫 단계는 붓을 움직이기 전에 준비작업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문제로 전쟁을 하기 전에 군사들을 충분히 훈련시키는 준비가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면 글씨를 쓰기 전에 어떠한 준비작업이 있어야 하는 것일 까? 먼저 글씨를 쓰는 목적을 분명히 한 다음 서예에 관한 기초적인 책들을 읽어야 한다. 그런 다음 어떤 비첩(碑帖)을 써야 하며, 어떤 글자들을 익혀야 하며, 어떤 붓을 써야 하며, 붓은 어떻게 잡아야 하며, 올바른 자세와 글씨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을 알아야 한다. 붓을 움직이기 전에 이러한 문제들을 먼저 알아야만 헛수고를 줄일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를 곧 붓을 움직이는 초급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글씨를 배울 때 먼저 글씨체를 받아서 쓰기 시작하는데 이것보다는 알맞는 비 첩을 선책하여 임모(臨摹)를 하여야 만직접적으로 초학자들의 모방실력을 배양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어겹게 느껴지면 먼저 점가로획세로획삐침갈고리 등등의 획들을 익히 고, 붓을 시작하고 끝내고 보내는 것 등을 알게 되면 훨씬 쉬워질 것이다. 글씨를 받아서 배 우는 것부터 시작하면 판에 박은 듯한 글씨가 나와서 발전의 여지가 없게 된다. 따라서 초 학자는 임모로부터 시작하여야만이 좋은 글씨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어떠한 서체(書體)에서부터 시작하여야만 옳은 길인가? 이 문제에 대한 서단의 의 견은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예서(隸書)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고, 혹은 해서(楷書)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고, 혹은 초서(草書)나 행서(行書)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기도 하여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해서를 시작할 때에는 당해(唐諧)나 위비(魏碑)를 선택하는 것이 좋은데 이는 개인의 상황에 근거 를 두어 결정하는 것이 좋다. 세 번째 단계는 해서의 기초가 비교적착실하다고 느껴졌을 때 행서로 들어가는 과정을 말 한다. 행서는 일반적으로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敍)>, <성교서(聖敎序)>를 쓰거나 이북 해(李北海)의 <이사훈비(李思訓碑)>를 거쳐 안진경(顔眞卿)혹은 미원장(米元章), 황정견(黃 庭堅)의 행서를 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처음 해서를 배운 사람의 것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안진경의 해서를 썼으면 행서도 그의 것을 쓰는 것이 좋다는말이 다. 만일 글씨의 조화를 이루려면 가장좋은 방법으로 처음 배운 비첩과 같은 계열의 것을 쓰는 것이다. 현격하게 다른 것을 쓴다면 그만큼 글씨의 진보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행서가 이미 숙달된 상태에서 전서(篆書)나 예서(隸書)를 쓰는 과정이다. 옛사람이 말하길 "예서를 배우려먼 먼저 전서를 써야만 고풍(古風)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저서를 배우려면 먼저 소전(小篆)을 배운 뒤에 대전(大篆)을 배우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소전의 가로획이 가지런하고 세로획은 곧바르고, 둥근 획과 꺾어지는 획들 이 손에 어우러지고, 짜임새를 쉽게 익힐 수있고, 붓을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 다. 어떤 사람은 "만약 소전으로 기초를 삼고 갑골(甲骨)종정(鐘鼎)석고(石鼓)를 넘본다 면 이루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처음 시작도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전은 이양 빙(李陽氷), 등석여(鄧石如) 등의 전서를 쓰고 <석고문(石鼓文)>을 쓰는 것이 좋다. 예서는 한(漢)나라의 비(碑)를 쓰는 것이 좋은데, 예를 든다면 예기비(禮器碑), 사신비(史晨碑), 을영 비(乙瑛碑) 등이 그것이다. 다섯 번째의 단계는 이상의 여러 체를 골고루 습득한 후에 초서(草書)로 들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초서를 배우려면 먼저 장초(章草)를 써야 한다. 왜냐하면 장초는 한 자씩 떨어져 있으면서 도 초법(草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서 초서의 필법(筆法)과 짜임새를 쉽게 파악할 수 있 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점을 무시하고 쓰기 때문에 초서를 마치 거미줄과 같이 이러 저리 엉기게하여 힘도 없고 심지어는 무슨 글자인지도 모르게 쓰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올바른 초서라고 할 수 없다. 이상을 종합하여 말하면 글씨를 배우는 단계가 바로 초학자의 열쇠이며, 좋은 글시를 쓰 느냐 못쓰느냐의 관건인 것이니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무시한다면 성 공의 길로 가기에는 무척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5.글씨를 쓰는 것과 서예와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사람들은 글씨를 쓰는 것이 곧 서예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완전히 같은 종류의 것은아 니다. 간단히 말하면 글씨를 쓰는 것은 실용에 목적이 있는 것이고, 서예는 사람들에게 예술 을 감상하게 하는 것이다. 서예는 실용가치 이외에 많은 예술형식이 있다. "일정한 대상에 기탁하여 아름답고, 단정하고, 웅건하고, 깨끗하며, 용이나 호랑이가 위엄을 가지고 날며 움 직이는 듯한 형세를 가중시킨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꿋꿋한 기개로 근본을 삼고 변화 로 쓰임을 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사당에 들어가 귀신을 보는 듯 하게 하며, 곳간을 살핌에 밑바닥이 보이지 않게 하는 듯하여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는 것 이다. 진(晉)나라 때 왕희지는 "글씨를 쓰려고 하는 자는 먼저 먹을 갈면서 정신을 집중시키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글씨의 자형을 미리 생각하여 크고 작은 획과 아래나 위로 향한 획 과 평평하고 바른 획들을 움직여 맥이 서로 연결되게 구상한다. 이것은 뜻이 붓보다 먼저 있게 한 연후에 글씨를 쓰는 방법이다. 만약 평평하고 바른획이 마치 주판알 같이 위아래가 반듯하고 앞뒤가고르면 글씨가 되지않고, 단지 점과 선만 연결시켜 놓은 꼴이 된다."라고 하 였다. 이 이런은 글자와 서예와의 관계를 천명한 말로서 글시 쓰는 것과 서예는 반드시 일 치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글씨 쓰는 것과 서예는 각각 실용성과 예술성의 특징을 공유 하고 둘다 한자(漢字)를 빌려 글씨를 쓰나 특성과 창조성이 다르다. 글자와 서예는 모두 미의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나, 다른 점은 미의 관점이다. 하나는 실용 미를 추구하여 발전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예술미를 추구하여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 예술미 의 일면은 먼저 한자의 조형과 규율을 흐트리지 않고 생동감있게 묘샇고 감정의 동태와 사 상의 조화를 이루어 법(法)을 타파하여 의(意)를 얻게 한다. 그리고 자기의 감정을 펴내어 글자의 기세와 풍모로 하여금 예술미와 매력을 표현하여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게 한다. 실 용미의 일면도 비록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나 반드시 멋있고 힘있고 풍채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실용적인 면만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대중적이어야 하고 한자를 쓸 대 상하 가 반듯하고 앞뒤가 고르면서 좌우가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도 범위를 넘어서는 안된다. 이 것이 바로 글씨와 서예의 다른 점이면서 동시에 구별되는 점이기도 한 것이다.
서예자세와 집필법, 도구에 대해
1.서예의 바른 자세는 어떠한 것인가?
처음 글씨를 배우는 사람이 때때로 자세에 대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것은 장차 글씨도 좋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심신의 건강에도 해가 된다. 그러므로 글씨를 쓸 때에는 앉은 자세나 선 자세가 항상 올바르게 유지되도록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러면 어떠한 자세가 올바른 자세인가? 먼저 마음을 평정시키고 기를 고르게 하고 정서 를 안정시켜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영정치원(寧靜致遠)이라고 하는 것으로 심수쌍창(心手雙 暢)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다음은 아래와 위의 세 가지 자세와 몸과 기가 서로 결합하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아래의 세 가지란 두 발과 척추 끝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앉은 자세를 정확히 하려면 발 을 안정시키고 몸을 올바르게 하여야 한다. 위의 세가지란 양손과 등뼈를 말하는 것으로 위 아래가평형을 이루면서 기운을 집중시켜야 한다. 한 손은 자연스럽게 책상에 놓고 힘은 안 배하여 붓 잡은 손이 합리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붓 잡은 손 이 지탱할 수가 없어 오랫동안 글씨를 쓰지못하게 된다. 등과 어깨는 기를 움직이는 길인 까닭에 붓을 종이에 대기 전에 먼저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쉬면서 의식적으로 기를 가라앉 혀야 한다. 그런 뒤에 천천히 기를 등으로부터 어깨를 통과하여 팔꿈치와 손에이르도록 한 뒤에 서서히 붓을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열 손가락에 기를 통하게 한 다음 붓 끝에 모든 것을 집중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좀더 상세하게 말하면 글시를 쓸 때 두 발바닥은 평행을 이루게 하면서허벅다리는 약 한자 정도로 자연스럽게 벌리고 양 무릎도 허벅다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벌려야 한다 .엉 덩이는 의자 위에 편안히 앉으면서 허리는 곧게 펴고, 가슴은 책상 위에 있는 법첩을 응시 하고 있어야 한다. 이때 주의할 점은 몸이 기울어져서는 안되며, 등과 허리가 낙타처럼 굽어 서도 안되며, 머리를 너무 숙여서도 안된다. 만일 이와 같은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면 혈액순 환이 제대로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신의 건강에도 좋지 못한 영향이 미치게 된다. 앉아서는 1촌(寸) 정도의 해서(楷書)를 쓰는 것이 좋으며 이 이상의 큰 글씨를 쓰려면 서 서 쓰는 것이 좋다. 만약 앉아서 큰 글씨를 쓰게 되면 글자의 점과 획이 착각을 일으키게 할 뿐 아니라 글자의 형태도 이상하게 되기가 쉽다. 더욱이 중요한 작품을 할 때 앉아서 글 씨를 쓰게 되면 전체의 균형이 혼연일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동감도 이루기가 어렵 다. 역대 서예가들이 큰 글시를 쓸 대에는 서서 현완법(懸腕法)의 자세를 취하면서 작품을 하였다. 서서 글씨를 쓸 때에는 두 다리는 자연스럽게 땅에 디디고, 몸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기울 이고, 허리는 약간 굽히면서 머리는 숙이고, 눈은 종이를 바라보고, 왼손은 종이를 누르고, 오른손은 붓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 이때 주의할 점은 두 다리는 꼭 평행되게할 필요가 없 으며 앞뒤를 약간 어긋나게 하면서편안하게 하되 손은 긁듯이 책상을 잡아서는 안된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여 말하면 앉은 자세나 선 자세를 막론하고 획일적이 되어서는 안되 며, 심신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에선 든 것을 고려하여 몸과 마음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하여야 한다.
2.붓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서예는 모필(毛筆)을 사용하는 특수한 예술이기 때문에 먼저 이것을 잡는 방법을 정확히 알아야 한는 것이 급선무다. 붓을 잡는 방법에 관하여 역대 서예가들이 많은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초학자들은 오직 붓 잡는 방법을 이해하고 오랜 숙련을 하여 자유자재로 붓을 운용할 수 있으면 글씨는 좋아 지게 된다. 붓을 잡는 방법에 대하여 옛날부터 많은 이론들이 전해져 내려왔다. 예를 들면 '오지집필 법'(五脂執筆法), '사지집필법'(四指執筆法), '삼지집필법'(三指執筆法), '악권집필법'(握拳執筆 法) 이외에 소동파(蘇東坡)의 집필무정법(執筆無定法)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오지집필법'(五脂執筆法)이 비교적 가장 유행하고 있는 집필법이다. 이 방법은 다섯 손가락을 합리적으로 배합하여 엽( ), 압(壓), 구(구), 게(揭), 저(抵), 도(導), 송(送) 등 으로 진행시키는 방법을 말한다. 이것이 이른바 '발등법(撥등法)'이라고 하는 집필법이다. 발 이라고 하는 것은붓대에 나타난 셋째와 넷째 손가락이 둥글고 활동적이어서 움직이기가 원 활한 것을 말한다. 등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탈 때 디디고 올라가는 등자를 말하는 것으로 호구(虎口)가 둥글고 텅빈 것이 마치 등자와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등자를 얕은 데 서 디디고 올라 가면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붓도 아래로 잡을수록 움직이기가 쉬워진다. 그 러면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엽( ) : 첫째 손가락의 끝마디로 붓대의 아랫부분을 잡고 힘써 곧게 한다.압(壓) : 둘째 손가락으로 첫째 손가락과 힘을 균등히한다.구(구) : 셋째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하여 붓대의 아랫쪽을 향하게 한다.게(揭) : 넷째 손가락으로는 붓을 올리는 듯하게 하여 셋째 손가락과 부닥뜨리게 한다.저(抵) : 셋째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한 것을 손가락으로 막는 역할을 한다.도(導) : 다섯째 손가락으로 넷째 손가락을 당겨 오른쪽으로 지나가게 한다.송(送) : 다섯째 손가락으로 넷째 손가락을 보내어 왼쪽으로 지나가게 한다.이상 소개한 것은 붓을 잡는 방법의 요령을 설명한 것이다.다섯 손가락들의 간격을 조밀하게 할면 손바닥은 비게 하면서 세워야 하고, 팔목은 평평 하게 하며, 붓대는 곧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의 사이를 자연스럽게 서로 의지하면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만약 둘째와 셋째 손가 락 사이가 떨어지게 되면 다섯 손가락의 힘은 균등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초학자들이 범하 기 쉬운 결점이니 특별히 유의하여야 한다.
붓을 잡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어 획일화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 을 막론하고 꼭 지켤야 할 것은 손가락 사이는 조밀하여야 하며, 손바닥은 비게 하여야 하 며, 팔목은 평평하게 하여야 한다. 붓 끝은 세우되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힘을 쓸 수 있 도록 하여야 한다. 긴장을 억지로 하면 안되며, 활발하게 하되 헝클어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붓을 잡을 때 꼭지켜야 하는 법칙이다. 그리고 붓을 잡는 위치는 글자의 크고 작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난다.
2-1執筆은 어떻게 해야 옳은가? -<東坡集> 讀書筆記(梁 山)
中國北宋의 문학가이며 서화가인 蘇軾은 字는 子瞻이요, 호는 東坡居士, 眉州眉山(지금의 사
천성 경내) 사람이였는데 중국 역사상 大文豪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書法에서도
宋四家 ─ 蘇, 黃, 米, 蔡의 맨 첫번째를 차지하며 그의 書論도 상당한 이론적 가치를 가지
고 있다. 아래에 <東坡集>에서 논술된 執筆에 관한 대목을 읽은 나의 독서 필기를 공개하
면서 서예계 동인들의 가르침을 기대한다.
蘇軾은 <東坡集>에서 執筆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獻之少時學書, 逸少從後取其筆而不可, 知其長大必能名世. 個以爲知書不在於筆牢, 浩然聽筆
之所之, 而不失法度, 乃爲得之. 然逸少所以重其不可取者, 獨以其小兒子用意精至, 猝然俺之, 而
意未始不在筆. 不然, 則天下有力者, 莫不能書也.”
원문을 차례로 해석하여 보기로 한다.
“獻之少時學書, 逸少從後取其筆而不可, 知其長大必能名世.”
[譯文] 헌지(注:왕희지의 아들 왕헌지)가 어렸을때 붓글씨를 배우는데 逸少(注:왕희지의 字)
가 뒤에서 가만히 뽑으려 하니 뽑히지 않았다. 하여 그가 크면 꼭 세상에 이름을 남기리라
생각하였다.
[注釋] 이 고사는 南朝·虞D의 <論書表>에서 나오는데 原文은 “羲之爲會稽, 子敬七八歲學
書, 羲之從後製其筆不脫, 嘆曰, 此見書, 後當有大名”이다. 7~8세 밖에 안되는 어린이가 붓글
씨를 연습하는데 뒤에서 몰래 붓을 당겨도 빠지지 아니하니 아버지가 감탄하여 이 애가 크
면 꼭 서법에 큰 이름을 남기리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데 꽤 많
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곡해하고 붓글씨를 잘 쓰려면 반드시 붓을 힘주어 꽉 잡아야 한다
고 생각하면서 후학을 그렇게 가르치는 폐단도 있다한다. 그러면 아래에 蘇東坡의 고견을
들어보자.
“個以爲知書不在於筆牢, 浩然聽筆之所之, 而不失法度, 乃爲得之.”
譯文 : “내(“個”는 작자가 자신을 自謙하여 이르는 말) 생각엔 붓글씨를 잘 씀에 붓을
튼튼히 잡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호연히 붓을 닿는(“之”는 닿다, 이르다의 뜻) 대로 놔
두면서도 법도를 잃지 않았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注釋] 참 옳은 말이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 사람은 처음 배울 때의 정경을 연
상해 보노라면 이 문제가 자명해질 것 같다. 제가 아무리 핸들을 꽉 움켜 잡는다고 해서 넘
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초보자일수록 핸들을 꽉 잡고 운전에 익숙할수록 손이 핸들에 닿
는듯 마는듯 하는 정도의 힘으로도 충분히 방향을 잡을 수 있으며 심지어 한 손을 놓고도
탈 수 있으며 두손을 다놓고 타는 교예인들도 있지 않는가?
또 자전거가 나가는 방향을 따르면서 타야 평형이 유지되지 그와 상관없이 주관적으로
내 몬다면 필연코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소동파가 말한 붓이 닿는 대로 나가면서 붓
글씨를 쓰라는 말과 같은 도리인 것 같다.
그리고 속도에도 연관이 있다. 천천히 몰면서 곧게 가기는 힘들고 세워 놓고 평형을 유
지하기도 힘들다. 붓들씨도 마찬가지이다. 느린 속도로 곧게 쓰자면 아무리 곧게 쓴다고 해
도 찬찬히 들여다 보면 삐뚤거린 흔적이 남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이 핸들이나 붓을 어느
정도로 꽉 잡는가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빠른 속도에서 더 작은 힘으로 방
향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큰 글을 쓰는가 작은 글을 쓰는가에 따라 손목과 손가
락의 힘받는 부위가 달라지게 된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렇게 보면 왕희지가 자기 아들이 붓을 힘있게 잡았다고 천재로 취급하는데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왕희지의 이 전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소동파의 하문
을 보기로 하자.
“然逸少所以重其不可取者, 獨以其小兒子用意精至, 猝然俺之, 而意未始不在筆.”
[譯文] 그런데 逸少가 그토록 붓을 앗을 수 없다는 점을 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린 아들의
용의가 기특한데서 감싸는 것이지 붓과 상관없는 것이다.
[注釋] 하긴 그렇다. 글씨를 쓴다는 사람이 붓을 명심해 잡지 않고서야 어찌 붓글씨를 운운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7~8세의 어린 나이에 그처럼 명심할 수 있다는 것은 기특해 할 만
도 한 일이라 하겠다.
“不然, 則天下有力者, 莫不能書也.”
[譯文] “그렇지 않다면 천하에 힘있는 사람은 글씨를 못쓰는 사람이 없지 않겠는가.”
[注釋]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붓글씨를 잘 써보려 했는데 붓글씨
는 힘있게 써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힘을 키우려고 팔에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몇년 연습했
다는 것이다.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붓글씨의 힘이 어디에서 체현되고 어떻
게 표현되는가? 이는 절대 쓰는자의 팔에 얼마만한 力學적 힘을 소유했는가에 있지 않으며
역시 붓을 얼마나 꽉 잡았는가에 있지 않다. 사람의 힘은 손가락을 통해 붓과 닿게 되고 나
중에는 筆毫에 의해 종이에 닿게 된다. 붓과 손의 마찰력을 우리가 늘 하는 악수와 비교해
보자.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감격하여 손을 꽉 쥐는 것은 “감격”하였기 때문에 理志가 어
느 정도 상실되여 손의 힘을 가늠 못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꽉 잡는 것은 실례
가 될 뿐만 아니라 상대방(특히 여성일 경우)의 오해를 자아낼 수 있고 너무 슬쩍 힘주는
것은 냉정한 느낌을 주게 된다. 붓잡는 것도 아마 이와 같은 도리가 아닐가 싶다.
붓글씨의 힘(力度)은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될 때가 많다. 만약 활을 든 사람이 앞에 있다
고 하자. 그가 가장 위엄있어 보이고 가장 두려워 보일 때가 어느 때인가? 바로 화살에 시
위를 먹여 당신을 겨냥하고 있을 때이다. 활을 쏟 다음이나 활을 쏘기 전에는 그다지 위엄
이 없는데 이것을 彎弓待發이라고 한다. 화살에 시위를 먹였을 때의 기하현상은 활의 탄성
한계를 넘지 않은 상태에서의 최대의 폭발력을 과시하는데 이런 기하학적 도형은 사람들에
게 힘을 상징하여 준다. 간단한 예로 “元”字의 마지막 필획을 보기로 하자. “D”로 쓸
때와 “D”로 쓸 때 전자는 탄성한계를 넘은 감을 주지만 후자는 포만된 탄성을 과시한다.
물론 이 때 후자는 더욱 힘있어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때의 힘이란 인체 근육에 의해
강압적으로 전달된 力學的 힘이 아니라 기하학적 審美眼에서 형성된 힘이다.
“入木三分”이란 말이 있는데 붓글씨를 나무에 썼는데 어찌 힘있게 썼는지 목공이 대패
로 三分정도로 밀어 버려서야 먹의 흔적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때의 힘은 어떻게
체현되는가? 이는 함묵량이 같은 정황에서 두가지 요소와 연관된다. 하나는 筆毫가 널려졌
는가 아니면 모여졌는가에 따라서 같은 軌跡을 지나는 筆毫의 수량에 관계된다. 다른 하나
는 속도의 완급에 관계된다. 속도가 늦으면 당연히 종이와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져 아래로
침투되는 먹의 수량도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역시 사람이 근육이 붓과 종이
에 가한 압력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붓글씨를 쓰는 사람이 “팔에 힘이 올랐다.”
는 말을 종종 쓰게 되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그림에서 보다시피 硬筆로 글을 쓸 때에는 硬筆의 上下운동이 체현되지 않고 그저 평면에
서 前後, 左右로 운동하므로 h가 기본상 常數로 된다. 그러나 붓글씨를 쓸 때에는 筆毫의
탄성한계 내에서 前後, 左右운동 외 上下運動으로 提按動作을 하므로써 글자의 굵기를 변화
시키므로 이 때의 h는 변화하게 된다. 이 때의 이 변화를 순식간에 적응할 수 있는 힘, 바
로 이것이 筆力이라는 말이다. 이 筆力은 被動的인 일면과 主動的인 일면이 있다. 被動的인
일면은 지면의 不平, 紙張의 不均, 심리상태의 돌변 등에 부득불 적응해야 된다는 말이고 主
動的(능동적이라고도 할 수 있음) 일면은 작가의 흥분상태에 따라 이런 동작이 주동적으로
가해진다는 말이다. 즉 被動 상태에서는 외부로부터 오는 변화를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고
주동상태에서는 내부로부터 가해진 명령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힘이 오른 사람
은 그가 휘호하는 과정에 △h가 외계의 영향과 거의 상관없이 자유로이 변화를 완성하게
되는데 이때 옆에서 그의 글쓰는 팔을 다쳐도 그 팔은 즉시 원상태로 회복되는 정도의 힘을
갖게 된다.
알 수 있는바 이런 힘은 그 무슨 力學的 힘이 아니다. 따라서 붓을 힘주어 잡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소동파는 오래동안 내려오면서 붓을 꽉 잡아야
글씨를 잘 쓸 수 있다는 틀린 관점을 바로 잡아 놓은 것이다. 그러면 執筆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아래에 소동파의 다른 한구절을 보기로 하자.
“把筆無定法, 要使虛]而寬. 歐陽文忠公謂余 `當使指運而腕不知', 此語最妙”
[譯文] 붓을 쥐는 데는 고정된 법이 없이 虛하고 (掌虛를 말하는데 손바닥안이 비어 있어야
한다는 뜻) 寬해야 한다.(긴장하지 말고 느슨하게 해야 한다는 말) 구양문충공(歐陽修를 가
리킴)은 나에게 “손가락이 움직임을 손목이 몰라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가장 묘한
말이다.
[注釋] 여기에서 소동파는 왕헌지처럼 붓을 힘주어 쥐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손가락은 유
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그 움직임은 손목이 감각할 수 없는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여
기에서 알 수 있는 바 붓글씨를 쓰는 우리의 손은 로봇의 손이 아니라 손목, 팔, 온 몸과 유
기체로 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서예학원을 돌아 보노라면 어떤 이들은 붓잡은 손이 로봇의 손일 뿐만 아니라 팔
과 손목도 로봇이 되여 한 획을 그을때 손팔이 고정되고 온 몸이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움직이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움직임을 제창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탁구운동선수가 볼을 깍을 때 오른손이 위로, 또 좀 왼쪽으로 운동하는데 운동선
수의 상신은 그와 반대편으로 유기적인 움직임을 해야 할 것이다. 행진하는 사람이 오른 발
을 앞으로 내디딜 때 오른 손은 유기적으로 뒤로 움직여야지 같이 앞으로 나간다면 실상 우
스깡스러운 것이 아닌가. 소동파의 말대로 정상적인 사람은 오른 발이 앞으로 나갈때 오른
손이 뒤로 간다는 것을 감각하지 못할 정도 자연스러운 것이니 우리가 붓글씨를 쓸 때 손가
락의 움직임은 손목이 못느낀다는 말도 묘한 말이라고 봐야 하겠다. 여기에서 일부 한국인
들이 붓글씨를 쓸 때 손가락은 움직이지 못하며 捻管(붓대를 유기적으로 돌리는 것)은 불가
하다고 하는 것도 좀더 생각해 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아래에 소동파의 말을
한마디 더 들어보자.
“方其運也, 左右前後, 却不免歡側, 及其定也, 上下如引繩, 此之謂`筆正', 柳誠懸之言良
是.”
[譯文] 운필할 때 좌우전후로 (붓이) 경사지게 됨을 면할 수는 없으나 그것을 上下로 볼 때
마치 끈을 드리운 것처럼 (수직되게) 하는 것이 `筆正'이라고 할 것이니 柳誠懸(柳公權의
字가 誠懸임)의 말이 매우 옳은 것이다.
[注釋] 운필하는 과정에 붓이 좌우전후로 넘어질 수는 있지만 총적으로 그 중심선은 수직되
여야 만이 中鋒運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偏鋒運筆을 현대에 와서는 용허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中鋒할 줄을 모르고 편봉을 쓴다는 것은 안 될말이라 하겠다. 붓을 연필 쥐는
식으로 경사지게 쥐고 쓴다면 筆腹이 아래에 닿고 붓끝이 위에 닿아서 한 획의 윗쪽은 곧게
나가지만 아랫쪽은 파도를 이루게 되니 이것이 집필을 잘못할 때 생기는 폐단이라 하겠다.
소동파의 말대로 집필엔 고정된 법이 없다지만 그래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필법이
있을 것이 아닌가? 아래에 沈尹默이 쓴 <書法論>에서 執筆에 관한 부분만을 적어 놓기로
한다.
“書家는 집필법에 대해 종래로 각기 부동한 주장을 갖고 있지만 나는 그 중의 한가지만은
정확하다고 승인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二王으로부터 전해
져 내려오고 당나라 陸希聲에 의해 서술되었던 把, 壓, 鉤, 格, 抵의 五字法이다.
筆管은 다섯손가락으로 쥐게 된다. 매 손가락마다 각기 자기의 쓸모가 있는데 선인들이 把,
押, 鉤, 格, 抵 다섯자로 그를 설명하는 것은 퍽 의의가 있는 것이다. 다섯 손가락이 각기 다
섯 글자가 내포한 뜻대로 할 때에야 筆管을 온당하게 잡을 수 있고 잘 운용할 수 있을 것이
다. 나는 여기에서 이 다섯글자의 의의에 대해 하나씩 설명하고자 한다.
把자는 엄지손가락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엄지손가락의 배 쪽으로 힘주어 筆管의 안 쪽
에 바싹 대는데 마치 피리를 불때 피리 구멍을 막아주는 것과 같지만 좀 경사지게 위로 향
한다는 데서 이 글자로 설명하게 된다.
壓(=押)자는 식지의 작용을 설명한다. 押字는 구속한다는 뜻이 있다. 식지의 첫마디로 경사
지게 아래로 筆管의 바깥측을 힘주어 대여 주는데 엄지 손가락과 내외로 맞대이면서 서로
배합하여 筆管을 잡아준다. 이렇게하여 筆管은 이미 온당하게 잡혀졌지만 그래도 기타 세
손가락의 도움으로 執筆을 완성해야 한다.
鉤자는 중지의 작용을 말한다. 엄지, 식지가 이미 筆管을 잡았으므로 중지의 첫번째와 두번
째 마디를 구부려서 마치 갈고리처럼 筆管의 외면을 걸어준다.
格자는 무명지의 작용을 말한다. 格字는 막는다는 뜻인데 揭자를 쓸 때도 있다. 揭자는 막는
다는 뜻 외에 밖으로 민다는 뜻도 있다. 무명지는 손톱과 살이 이어지는 곳으로 筆管에 바
싹 대이고 힘있게 中指가 안으로 걸어 당기는 筆管을 막아주며 밖으로 밀어준다.
抵자는 새끼손가락의 쓸모를 말한다. 抵자는 바쳐준다는 뜻을 갖고 있다. 무명지의 힘이 작
아 단독으로 中指가 안으로 걸어주는 筆管을 막아 주고 밀어 줄 수 없으므로 새끼손가락으
로 무명지 밑에 바쳐서 힘을 더해 주어야 그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손가락이 이렇게 결합되여 筆管을 긴밀하게 싸 쥔다. 새끼 손가락이 무명지 아래에 대
여 있는 외에 기타 네손가락은 모두 筆管에 직접 대여 있게 된다.”
소동파의 논술은 형상적으로 執筆을 말했다면 沈尹默의 논술은 구체적으로 執筆을 말했다고
본다.
붓을 쥐는 데는 고정된 법이 없다. 하지만 붓을 어떻게 쥐는가에 따라 글씨의 풍격도 변할
수 있고 힘드는 정도도 달라질 수 있다.
소동파(1037~1101)는 지금부터 약 천년전의 사람이다. 虞◑는 南朝·宋·泰始年間의 書法家
인데 <論書表>를 쓸 때는 明帝泰始六年이니 公元470年이다. 그 때로부터 근700년 후에야
소동파에 의해 執筆에 관한 오류적인 견해를 시정하게 되었다면 소동파로부터 또 천년이 지
난 오늘까지 그런 오류적인 견해를 고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꽤나 놀랄만한 일이
라 하겠다. 옛날에는 인쇄술이 발달 못됐고 서법의 전파가 가족이나 師承관계에 의해 실현
되었으므로 그 관점이 아무리 오류적이라 할 지라도 봉폐된 전파매체로 뿌리깊게 계승되어
나올 수 있었다면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는 왜 이런 오류가 있을 수 있는가? 분산되고 고립
적인 서예학원은 학원지간의 교류를 거의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학원내에서 스승은 거의 신
성한 존재로서 그 어떤 견해든지 무자비하게 注入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원인이
라면 다른 하나의 원인은 배우는 사람이 듣는데만(스승의 가르침) 그치고 (책을) 보지 않는
데 있다. 총명이란 말은 耳聰目明에서 나오는데 귀로 듣는데 총기가 있고 눈으로 보는데 밝
다는 말이니 듣기도 해야 하겠지만 많이 봐야 한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특히 현시대의 문명
이 정보시대로 돌입하는 이 때에 책을 많이 보는 것은 縱적으로나 橫적으로 지식을 습득하
는 좋은 도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름없이 쓴 독서필의라 부당한 점이 많으리라 생각되니 서예동인들의 가르침을 정중히 기
다리는 마음이다.
3.쌍구법(雙鉤法)이란 무엇인가?
쌍구(雙鉤)는 '쌍포(雙포)'라고도 하며 붓을 잡는 방법의 한 종류를 말하는 것이다. 당나라 서예가인 한방명(韓方明)은 <수필요설(授筆要說>에서 "대저 서예의 묘는 붓을 잡는데 있다. 두 손가락으로 붓대를 싸매면 다섯 손가락도 마땅히 힘을 균등하게 하여야 하며, 요점은 손 가락의 사이를 조밇라게 하여야 하며, 손가락을 굽히고 눌러 가면서 붓을 움직이니 이를 저 송(抵送)이라고도 하여 입으로 전해주는 말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이 방법은 첫째 손가락을 밖으로 향하게 하면서 붓대를 눌러주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은 안으로 향하면서 갈고리처럼 굽힌다. 넷째 손가락은 밖으로 들어올리고, 다섯째 손가락은 넷 째 손가락의 아래쪽에 붙여서 움직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여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작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오지법(五指法)'도 '쌍구법(雙鉤法)'의 일종이다. '쌍구현완(雙鉤懸腕)'이라고 하는 것은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둥글게 굽혀 마치 갈고리처 럼 만들어서 첫째 손가락과 서로 힘을 균등하게 하고 손가락의 끝으로 붓대를 잡는다. 이렇 게 하면 붓대는 똑바로 서게 되어 큰 글씨를 쓸 때에는 위팔을 사용하며 작은 글씨를 쓸 때 에는 아래팔을 사용하여 종이에 팔이 닿지 않으니 붓 움직임이 뜻대로 되어진다. 이렇게 쌍구법으로 붓을 잡는 것은 초학자에게 적당한 방법으로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 이 제창하고 있었다.
4.단구법(單鉤法)이란 무엇인가?
단구(單鉤)란 '단포(單포)'라고도 하며 붓을 잡는 방법 중의 하나다. 단구법은 첫째와 둘째 그리고 셋째 손가락으로 붓대를 잡는 방법을 말한다. 둘째 손가락 은 붓대의 밖에서 갈고리 모양을 하여 안으로 향하게 하며, 셋째 손가락의 손톱뿌리 부분을 밖으로 부닥뜨리게 하고 나머지 두 손가락은 셋째 손가락의 아랫부분에 붙이도록 한다. 이 런 종류의 집필법(執筆法)을 사용하는 사람은 매우 적으며, 당나라 서예가인 한방명(韓方明) 은 이 방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수필요설(授筆要說)>에서 "만약 단구법으로 붓을 잡게 되면 힘이 부족하게 되고 신 기(神氣)가 없게 된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매우 합당한 말이다. 쌍구법(雙鉤法)으로 붓을 잡으면 높게 혹은 낮게 잡을 수도 있어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단구법을 사용하면 낮게 잡 을 수는 있어도 세 손가락이 손바닥을 막고 있어서 텅 비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 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맣은 이들이 이 방법을 꺼리고 있다.
5.오지제력(五指齊力)이란 무엇인가?
오지제력(五指齊力)이란 붓을 잡을 때 다섯 손가락의 힘이 모두 균등하게 붓대에 보내져 어느 손가락의 힘도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오지제력은 글씨를 씀에 있어서 중요한 방법 중에 하나다. 오지제력이 된 후에 비로소 팔 목팔꿈치어깨의 힘을 가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다. 만약 손가락의 힘이 강하지 못하면 기타의 것도 장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지제력을 하려면 먼저 넷째 손가락의 힘을 길러 전체를 균등하게하여야 한다. 다음은 첫째 손가락을 옆으로 버팅겨 잡음으로써 네 손가락의 힘이 중심으로 향할 수 있으며 동시 에 각 손가락의 마디를 밖으로 돌출하게 하고 손가락 사이의 경중과 강약을 고르게 조절하 여야만 다섯 손가락의 힘이 균등하게 되어진다. 오지제력은 5형제와 같아서서로 협조하고 제약하여야만 비로소 강해질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다섯 손가락의 힘은 균등하게 되 어지지 않는다.
6.팔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붓을 자는 방법을 이해하였으면 다음으로는팔을 움직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글씨를 쓸 때 손가락의 힘보다 더 중요한 팔의 힘 심지어는 어깨의 힘까지도 운용할 줄 알 아야 하기 때문이다.팔을 움직일 때에는 팔목의 관절을 운용하여 글씨를 쓰게 된다. 그러나 팔을움직일 때에 는 손가락팔꿈치어깨등허리와 몸 전체의 배합작용을 떠날 수는 없다. 큰 글씨나작 은 글씨를 막론하고 모두 팔을 움직여 글씨를 써야 한다. 이것은 팔의 힘이 손가락의 힘보 다 클 뿐더러활동범위도 넓고 조정의 폴도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붓을 들려고 하면 붓 끝에 힘을 주어 그 탄력으로 거두어 들이고, 붓을 누르려고 하면 붓 끝을 땅에 펴서 전개시 키면 된다. 손가락으로 운용하며 힘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범위도 좁아 단지 작은 글씨를 쓰기에마 적당하다. 그러므로 글씨를 쓸 때에는 충분히 팔의 힘을 운용하여 손가락의 힘을 도와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붓도 힘있게 되어 쓰여진 글시가 혈육이 포마하고 뼈와 힘줄 이 강하고 웅건하여 세력이 강하면서도 유창하게 된다.팔을 움직이는 동작은 곧 손바닥의 긑 부분을 움직이는 것이니 이 부분을 죄우로 움직임 에 따라 붓도 눌러지고당기게 되고 꺾이게 되어 경중과 빠르기도 함께 변하게 된다. 따라서 움직이는 폭과 대소는 글씨의 크고 작음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움직이는 도중에 특별히 팔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뒤집으면붓은 자연히 끌리게 된다. 이와 같이 하며 붓은 손에서 활동이 자연스럽고 범위도 넓게 된다. 이때 주의할 점은 필획의 변화가 어떻든지 붓은 항상 곧바로 되게 하여 붓 끝이 항상 중심이 되도록 하는 중봉(中鋒)을 유지하여 전개하여야 한 다.행서나 초서를 쓸 때에는 유동성이 크기 때문에 팔의 동작도 특별히 나타나지마 해서는 유동성이 작기 때문에 동작도 비교적 완마하여 잘 나타나지 않는다. 글시를 쓸 때 한 획을 긋거나 하나의 점을 찍거나 할 것 없이 모든 획의 경중이나 속도는 바로 팔의 움직임에 달 려 있다. 따라서 팔의 움직임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서예의 중요한 기교 문제다. 팔의 움직임으 잘하면 글씨도 정신과 풍채가 우러나오지마 이것을 잘못하면 직접적으로 그 영향 이 글씨에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초학자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이니 반드시 많은 숙련과 실천을 쌓아 고도의 기교를 터득하여야 한다.
7.침완법(枕腕法)이란 무엇인가?
왼손의 손바닥으로 오른손의 팔목을 베게 하거나 오른 손목을 책상 위에 대고 쓰는 것을 침완법(枕腕法)이라고 한다. 침완법은 손가락 끝의 힘으로 글시를 쓰기 때문에 팔 전체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이 방법은 현완법(懸腕法)과 제완법(齊腕法)에 비교하면 크게 다른 점이 있으니 팔의 유동성을 상실한 것이다. 옛날부터 이 방법은 글씨 쓰기에 적당한 방법이 아니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 은 이 방법으로 작은 글씨를 써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작은 해서를 쓰게 되면 영활한 글씨가 되지 않는다. 신축성이 크지 않기 때문에 글씨는 판에 박은 듯하며, 손가락의 힘으로 글씨를 쓰게 되므로 생동감이 없고 필력도 강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 방법은 반 드시 취할 것이 못된다
8.제완법(齊腕法)이란 무엇인가?
팔꿈치는 책상에 대고 손목은 들고서 쓰는 방법을 제완법(齊腕法)이라고 한다. 옛사람들이 말하길 붓을 내릴 때에는 천 길 벼랑에서 떨어지는 듯하게 하라 하였는데 이것은 팔을 높이 든 후에 붓을 지면에 대라고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붓을 댈 때에는 힘있게 하여 사면이 펼쳐지게 하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팔을 높이 들어야 그 웅건한 자태를 나타낼 수 있 다. 제완법은 중간 글자를 쓰기에 적당하나 큰 글자나 행초(行草)에는 적당한 방법이 아니다. 이 방법은 팔꿈치를 책상에 대기 때문에 붓을 움직이는 폭에 제한을 받을 뿐만 아니라 기세 있는 작품을 쓰기에도 곤란하다. 초학자들이 단번에 현완법을 사용하기 어려울 때 잠시 이 방법을 쓸 수는 있으나 반드시 팔을 높이 들고 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계속해서 팔꿈치 를 책상에 대고 쓰게 되면 이력이 어깨를 통과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글씨에도 그 영향 이 미치기 때문이다.
9.현완법(懸腕法)이란 무엇인가?
팔에서 팔꿈치를 모두 들고 책상에 대지 않는 방법을 현완법(현완법)이라고 한다. 원(元)나라 진역회(陳繹會)는<한림요결(翰林要訣)>에서 "팔을 공중에 드는 것이 가장 힘 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청(淸)나라 주리정(朱履貞)은 <서학첩요(書學捷要)>에서 "팔을 들 면 뼈의 힘이 함께 이르게 되어 글자의 형세도 끝이 없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현완법 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칭찬한 말들이다. 팔에서 팔꿈치에 이르는 부분을 책상에 대지 않 고 들고서 글시를 쓰게 되면, 온 몸의 힘이 붓 끝에까지 미칠 분만 아니라 붓도 곧바르게 되어 종횡으로 움직일 적마다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다. 또한 큰 글씨나 행초를 막론하고 움직임이 영활하기 때문에 생기발랄하면서도 막히지가 않게 된다. 이러한 현완법이 초학자에게 있어서는 쉽지 않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붓을 떠는 현상도 생기게 되어 많은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상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위축되지 말고 정진하게 되면 팔의 힘도 자연히 조금씩 즈강하게 된다
10.만호제력(萬毫齊力)이란 무엇인가?
글씨를 쓸 대에 모든 붓털이 힘을 골고루 발휘하는 것을 만호제력(萬毫齊力)이라고 한다.어떻게 하여야만 모든 붓털이 힘을 골고루 발휘할 수 있는가? 먼저 붓이 손가락 가운데 있으면서 손가락의 간격은 조밀하게 하여 그것의 힘이 필봉(筆鋒)에 직접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일보하여 팔의 힘과 어깨의 힘이 직접 붓 끝에까지 전달할 수 있으면 만호제력이 된다.그러면 어떻게 하여야만 팔의 힘과 어깨의 힘이 직접 붓 끝에까지 전달될 수 있는가? 팔과 손가락을 긴밀하게 하여 붓을 움직이지 않아야 하며 어깨도 움직이지 말아야 된다. 그런 다음 팔꿈치가 책상에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하며 이때 팔은 반드시 허공에 있어야만 붓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면 붓에는 완전히 팔의 힘이 전달되어진다. 또한 어깨의 힘과 손가락은 긴밀하게 하여 붓을 움직이지 않고 팔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팔과 팔꿈치가 평행되게 하면 붓에는 자연히 어깨의 힘이 전달되게 된다.어깨의 힘을 운용할 때 만일 너무 강하게 하면 팔의 위치가 팔꿈치보다 높아져 힘이 어깨에 그대로 남게 되낟. 또한 힘을 적게 쓰면 반대로 팔꿈치의 위치가 팔보다 높게 되어 힘을 붓에 쏟아붓는 형상이 된다. 여기서 아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서 힘을 붓 끝에 전달시켜 만호제력을 이룩하느냐에 있다. 이에 대한 관건은 바로 글씨를 쓰는 사람의 운필의 기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오랜 숙련을 통하여 운필의 기교를 습득하면 자연히 힘을 붓 끝에 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한낱 탁상공론에 불과할 따름이다.
11.먹은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나?
서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붓과 먹을 다루는 기교다.먹물은 입자가 가늘고, 접착성이 약하고, 색이 검고,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먹을 사용할 때에는 삼생(三生)을 귀히 여기느데, 생연(生硯), 생수(生水), 생묵(生墨) 등이 바로 그것이다.이른바 생연이라고 하는 것은 벼루에 물을 부었을 때 먹이 있어서는 안되며 매일 저녁에 한 번 씻어서먹물이 골고루 조화를 이루어야만 효과를 상하지 않게 된다. 생수하고 하는 것은 먹물을 사용할 때 잡된 물을 써서는 안되며, 차를 끓인 물을 사용하면 먹물의 광택을 해치게 되며, 끓인 물을 사용하게 되면 먹이 닳아지고, 빠르게 갈면 빨리는 갈리나 먹의 입자가 거칠어지므로 좋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먹물은 빗물이나혹은 자연수인 생수를 사용하는 편이 좋다.생묵이라고 하는 것은 묵직하면서도 가볍게 갈려야 하며 먹이 수직으로 곧게 되어 있어야만 동일한 방향으로 갈기가 좋다. 하룻밤을 재운 먹물은 먹의 부스러기와 거품이 섞여 있기 때문에 글씨를 쓰기에 좋지 않다.이외에 먹물의 농도와 양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이나 일반적으로 강한 붓은 진한 먹을 사용하여야 하고 부드러운 붓은 연한 먹을 써야만 글씨 쓰기가 편하다. 그리고 해서(楷書)를 쓸 때에는 약간 진한 것이 좋으며, 행서(行書)나 초서(草書)를 쓸 때에는 약간 흐려도 무방하다.동기창(董其昌)은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말하길 "글씨의 공교함은 붓을 사용하는 데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먹을 사용하는 데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서예의 묘미가 필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먹을 사용하는 법에 따라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먹을 사용하는 법에 대하여 옛사람은 먹물이 흐리면 정신과 풍채가 상하기 쉽고, 너무 진하면 먹이 붓 끝에서 막히게 된다고 말하였다. 만일 먹이 흐리면 붓이 너무 축축하게 스며들어 제어하기 힘들고 붓 밖으로 먹물이 터져나와 묵창(墨漲)이라는 병에 걸리게 되어 작품에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반대로 먹이 진하면 붓이 펴지지 않아 움직이기 곤란하여 좋은 작품을 이룰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를 쓸 때에는 먹의 특성을 발휘하여 지면에 효과적으로 써야한다. 먹이 진하여 붓이 막히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또한 흐려서 글씨가 뜨지 않도록 하여야 먹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만일 먹물이 진하면 맑은 물을 더 가하여 고르게 다시 갈아서 붓이 막히는 폐단을 없애야 한다. 반대로 너무 흐리면 먹을 더 갈고 붓에 먹물을 많이 묻여서는 안된다. 붓에 먹물을 너무 많이 묻히면 묵창이라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먹의 건습과 농담은 각각 쓰이에 따라 적절히 쓰면 서로 반대되면서도 어울려 빛나게 된다. 그리고 먹을 말릴 때에는 가을 바람에 쐬어야 하며, 윤택은 봄의 빗물을 머금어야 한다. 예사람들이 글씨를 쓸 때에는 대부분 진한 먹을 잘 사용하였다. 억대의 서예작품들을 다세히 살펴보면 지금까지도 먹색이칠흙같이 빛나며 정채를 발하고 있어 남은 향기가 흩어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소동파(蘇東坡)가 먹을 쓰는 것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은 진한 먹을 가장 잘 사용하는 사람이라고하였다. 그는 먹을 사용할 때 먹물의 말기가 마치 어린아이의 눈동자처럼 되어야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먹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가장 생생하고 적절한 표현이다. 글씨를 쓸 대에는 먹물은 진하게 하고 붓을 강하게 하여야만 힘있는 글자와 기운이 넘치는 작품이 될 수 있다.흐린 먹으로 작품을 하는 것도 예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능한 일이다. 옛사람도 종종 흐린 먹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청(淸)나라 왕몽루(王夢樓)와 같은 사람이 그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흐린 먹으로 꽃의 눈을 찾아야 한다는 찬미론을 폈다. 최근 일본에서는 많은 서예가들이 흐린 먹으로 작품을 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흐린 먹을 쓰는 수단은 중국화에서 잘 나타나는 현상으로, 윤택함과 연미함을 추구하여 온화하고 세련된 맛을 표현한다. 그리고 흑백 대비의 예술적 효과를 꾀하여 선명하고 산뜻한 정취를 자아내기도 한다. 흐린 먹으로 좋은 작품을 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때에도 서예의 예술적 기교와 소양에 근거를 두어야지 억지로 무리하게 해서는 안된다. 대부분 성공한 서예가들을 보면 전후의 호응과 먹색의 윤택함을 잘 배합하고 있다. 하나의 작품에서도 이것은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먹을 한 번 찍은 다음 일필휘지로 몇 자를 쓰면 먹이 마르게 된다. 이때 다시 먹물을 찍어서 쓴다. 그렇게 되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불과 몇 번밖에는 먹을 찍지 않았지만 먹색의 변화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속에는 먹물이 많이 찍힌 곳, 적게 찍힌 곳, 진하고 흐린데가 서로 섞여 있으면서도 맥락이 연결되고 하나의 실을 펼친 것과 같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변화가 있어 그 묘한 맛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한다.
12.조윤(燥潤)이란 무엇인가?
조윤(燥潤)이란 먹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표현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燥)라는 것은 먹색이 마른 것을 말하며 윤(潤)이라는 것은 먹색이 축축한 것을 말한다.먹을 사용하는 것은 서예의 중요한 기법 중의 하나로서 작품의 정신과 풍채를 나타내는 데 관건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먹을 사용하는 기법에는 어려움이 따르며 경험잇는 서예가들도 이것을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붓을 사용하는 것도 어렵지만 먹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며 특히 마르고 축축하고 진하고 흐린 것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먹을 사용하는 기법을 말할 때 서예가들이 추구하는 것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기호도 역시 일정하지는 않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진한 먹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흐린 먹을 좋아하기도 한다.먹색이 마르고 축축한 것은 왕왕 작품을 강하고, 부드럽고, 웅장하고, 수려하고, 기이하고, 험악한 예술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옛사람들은 축축한 것으로 연미함을 취하고 마른 것으로 험악함을 취한다고 하였으니 매우 일리가 있는 말이다. 반천수(潘天壽)는 "마른 붓을 사용하면 막히기가 쉬우므로 운치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강한 팔의 힘을 사용하여 붓을 움직이면 화목함을 얻어 상쾌하고 매끄럽지 않고 기이한 맛을 내어 운치가 저절로 생긴다. 축축한 붓을 사용하면 먹물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뼈대가 없어진다. 그러나 먹을 많이 사용하면 붓을 쓰기가 부드럽기 때문에 어지러워도 다스림이 있어 골격이 스스로 이루어진다."라고 하였다.이것은 마르고 축축한먹물을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마르고 축축한먹물을 사용하면공교한 작품을 이루기가 힘들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요령을 깨우치면 오히려 더 좋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서, 예서, 전서 등을 쓸 때에는 먹물이 약간마른 것이 좋지 너무 축축하면 풍채를 이루기가 힘들다. 행서와 초서를 슬 대에는 모름지기 마르고 축축한 것이 서로 섞여 있어야 붓도 움직이기가 편할 뿐만 아니라 기운과 맥락이 서로 통할 수 있다. 마르고 축축한 것을 작품상에 표현하는문제는 하루 아침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소양의 정도를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요원하여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경지의 수법은 아니므로 글씨를 쓸 때 자세히 관찰하고 생각하면 점점 그 묘를 깨달을 수 있다.
13.농담(濃淡)이란 무엇인가?
농담(濃淡)이란 먹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표현으로 농(濃)이란 먹색이 진한 것을 말하고 담(淡)이란 먹색이 흐린 것을 말한다.서예에서는 먹물이 마르고 축축한 것보다 진하고 흐린 것을 더욱 중요시 여기고 있다. 그것은 각각 특색이 있기 때문에 상호 보완하여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옛사람들은 축축한 것으로 연미함을 취하고 마른 것으로 홈악함을 취한다고 하였다. 진한 먹은 작품에서 웅장한 기세를 표현하기에 적당하며, 흐린 먹은 고상한 경지를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그러므로 한 폭의 작품 안에는 마르고 축축한 것이 서로 어우러져 진하고 흐린 것으로 체를 이루어야 걸작이 될 수 있다.농담의 관건은 흐린 먹으로 육중함을 나타내고 진한 먹으로도 막히지 않고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진한 먹을 쓰더라도 둔하지 않으며 흐린 먹을 쓰더라도 애매모호하지 않은 글씨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반천수(潘天壽)는 "먹은 반드시 흐린 가운데도 진한 맛이 있어야 하며 진한 가운데도 흐린 맛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흐리더라도 웅장한 맛을 나타내어 평평하면서도 평평하지 않은 글씨가 된다." 라고 하였다. 글씨의 묘미는 바로 이 말 가운데 있으니 먹의 농담을 잘 연구하면 좋은 작품을 이룰 수 있다.
14.글씨를 쓸 때는 어떠한 붓이 적당한가?
서예를 쓰는데 있어서 강한 붓[狼毫]으로 쓰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부드러운 붓[羊毫]으로 쓰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문제는 서예계에서 줄곧 쟁론이 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강한 붓이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부드러운 붓이 좋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습관에 의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옛사람은 그 일을 잘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공구를 날카롭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우리도 붓에 대한 인식을 올바르게 하여야만 글씨에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강한 붓과 부드러운 붓은 모두 글씨를 쓰는 도구지만 성능면에서 오히려 다른 점이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붓털의 강하고 부드러움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필봉의 장단과 살찌고 파리함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강한 붓은 필봉이 짧고 탄력성의 폭이 적고 내제된 힘이 없기 때문에 한 번 먹을 찍어 글씨를 쓰면 점과 획은 이룰 수 있지만 면은 이루지 못한다. 또한 필두가 날카롭고 강하면 단지 매우 가는 필획만 쓸 수 있기 때문에 작은 글씨를 쓰기에 적합하다. 만약 강한 붓으로 큰 글씨를 쓸 경우에는 표현력에도 한계가 있어 강렬한 느낌을 주지 못한다. 부드러운 붓의 필두는 둥글고 건장하며서도 길기 때문에 먹물의 함유량이 많아 쉽게 사방으로 쓸 수 있으며 마른 먹이나 축축한 먹으로도 충분히 영활하게 움직일 수가 있다. 그리고 탄력성의 폭이 크고 내재된 힘이 있어 한 번 먹을 찍으면 점과 획은 물론이고 면까지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굵고 가는 획, 길고 짧은 획, 마르고 축축한 것들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고, 신축성이 강하여 붓의 사면팔방을 골고루 쓸 수가 있다. 따라서 작은 글씨의 해서에서부터 아주 큰 글씨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글씨를 쓸 수 있기 때문에 풍부한 예술적 표현을 할 수 있다.서예는 표현을 추구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먼저 음률과 리듬감이 있어야 한다. 이런 리듬감은 붓을 운용할 때 붓을 일으키고 누르고 꺾고 머무르게 하는 데에서 발생하게 된다. 용필에 있어서 장봉(藏鋒)과 회봉(回鋒) 등은 분명하고도 함축적인 교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씨가 판에 박은 듯하여 부자연스럽고 생동감이 없게 된다. 글씨를 쓸 때에 부드러운 붓 또는 강한 붓을 막론하고 연구해야 할 것은 붓을 일으키는 부분과 짜임새에 대한 부분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붓으로는 장봉과 회봉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붓을 엎는 방법으로 붓을 일으키고 짜임새를 제대로 짤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고 소박하면서도 둥글고 착실한 맛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한 붓으로 붓을 돌릴 때 자연스럽지 못하여 장봉과 회봉을 표현하기에 곤란한 점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부드러운 붓을 운용하여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등의 글씨를 쓰면 점과 획이 부드러우면서 후박하게 되어 필의가 생동감이 넘치고 자연스럽게 된다. 때때로 붓 잡은 손을 한 번 움직이기만 하여도 붓을 일으키는 곳의 윗면이 평평하면서도 만족하게 되고, 붓을 맺을 때 가볍게 한 번 누르면 외형이 완전히 차게 된다. 그러나 강한 붓으로 이러한 점과 획을 표현하려고 장봉과 회봉을 사용함녀 생경하고 판에 박은 듯이 나오게 되며, 붓을 운용할 때 정신을 집중시켜 조심하지 않으면 붓털이 삐져나와 거칠게 되므로 소박하고 부드러운 맛이 나지 않게 된다. 또한 윗획과 아랫획의 호응관계에 있어서 만약 부드러운 붓을 사용하게 되며 단지 가볍게 한 번 움직이는 붓의 추세에 의하여 이것이 암시되며, 이어서 계속 글씨를 쓰게 되면글자의 형세도 붓을 따라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므로 앞뒤의 호응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부드러운 붓으로 무겁게 누르면 굵은 획이 나오게 되고, 가볍게 뽑으며 가는 획이 실같이 나와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생동감이 있으며, 굵고 가는 획이 서로 교차하기 때문에 풍부한 리듬감이 있어 상쾌한 기분을 자아내게 한다. 대체로 강한 붓으로 이러한 것을 표현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며 더욱이 큰 글씨에 있어서는 더욱 곤란하다.다음으로 서예는 모든 글씨체를 막론하고 획에 있어서 살과 힘줄과 골격을 추구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붓과 이것을 운용하는 기교의 결정체다. 만약 좋은 솜씨를 가진 서예가가 있다 하더라도 좋지 못한 붓으로 글씨를 쓰게 되며 아무래도 정확하고 훌륭한 작품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만약 초서를 슴에 있어서 탄력성이 풍부한 부드러운 붓으로 쓴다면 종횡으로 휘두를 수 있으며, 먹을 한 번만 듬뿍 묻혀도 몇 자 또는 몇 줄까지도 쓸수가 있고, 굵고 가는 획 또는 강하고 부드러운 획 심지어 먹의 농담에 이르는 변화까지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강한 붓으로는 이러한 기세를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필봉에 묻히는 먹물에도 한계가 있으며 탄력성도 적기 때문에 부드러운 붓을 사용하였을 때처럼 다양한 리듬감과 기세가 부족하여 효과적인 예술감각을 창출할 수가 없게 된다.반백응(潘伯鷹)은 "만약 큰 글씨의 해서나 전서 혹은 예서를 쓸 때 양호(羊毫)를 사용하면 우아한 맛을 나타낼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매우 정확한 말로서 해서전서예서 등의 글씨는 장봉과 회봉을 중심으로 하는 필법을 주로 쓰는 것이고 단숨에 내려긋는 글씨가 아니기 때문에 멈추는 곳에서 왕왕 함축과 후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양호의 붓을 사용하면 힘은 능히 솥을 들 정도이며 기는 침착하게 가라앉힐 수 있어 골격과 기세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만약 강한 붓을 사용하게 된다면 획이 단순해지고 판에 박은 듯하게 되므로, 더욱이 축축한 붓으로 윤기를 표현하고 마른 붓으로 기세를 취하는 법도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강한 붓보다는 부드렁누 붓을 써야지 서예의 지수를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다.엣사람들의 경험을 빌리면 부드러운 붓을 사용할 때에는 붓을 높이 들어 팔의 힘을 제대로 활용하여야 한다. 반천수(潘天壽)는 양호가 손에 가장 적합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초보자는 물론이고 기초가 잡힌 사람도 유의하여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부드러운 붓으로 글씨를 쓸 때 붓을 엎으면 그대로 주저앉게 되어 이것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붓의 탄력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팔의 힘이 부족하거나 너무 붓으 눌러 필봉의 탄력을 잃게 하기 때문이니 꾸준히 노력하여 이것을 극복하여야만 부드러운 양호의 특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종합하여 말하면 붓을 선택할 때에는 강한 붓보다는 부드러운 붓을 사용하는 편이 좋다. 이것에 대한 문제를 어떤 사라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도 있겠지만 한단계만 실천하게 되면 자연히 그 속에서 유익함을 스스로 느끼게 된다.
15.붓은 어떻게 선택하여야 하는가?
역사의 문물을 근거로 할 때 멀리 신석기 시대에 이미 짐승의 털로 붓을 만들었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전국(戰國)시대에 대나무나 일반 나무에 토끼털을 끼워서 사용한 것과 한(漢)나라 때 나무 붓대를 만들어 썼던 것이 지금의 붓과 비교하여 별 차이가 없다.서예의 도구 중에 제일 주요한 것이 바로 붓이다. 어떤 사람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결코 붓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 같다. 붓이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마치 썩은 대나무로 노를 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송(宋)나라 미원장(米元章)은 "그 일을 잘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좋은 도구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글씨를 씀에 있어서 마음과 손에 맞는 붓이 있어야만 더욱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모필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말갈기로 만든 것, 토끼털로 만든 것, 이리털로 만든 것, 양털로 만든 것, 닭털로 만든 것, 쥐의 수염으로 만든 것 등 매우 다양하며 이외에 겸호(兼毫)와 태호(胎毫)라는 것도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짐승들의 털을 사용하기 때문에 각각의 성질도 다르다. 말갈기로 만든 것과 쥐의 수염으로 만든 것이 제일 강하고, 토끼털로 만든 것이 그 다음이며, 이리털은 토끼털 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편이다.양털로 만든 것도 비교적 부드러우나 닭털로 만든 것이 더 부드럽다. 겸호는 양털과 다른 짐승의 털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부드럽고 강한 조화를 맞추기 위한 것이다. 태호는 현대에 와서 개발한 것으로 막 태어난 어린 아이의 머리털로 만든 것으로 비교적 부드러운 편에 속한다. 모필의 성능성으로 볼 때 강한 붓, 부드러운 붓 그리고 이 두 가지의 특성을 섞은 붓 등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강한 붓과 부드러운 붓은 일반적으로 한 종류의 털로 만들며, 겸호는 이 두 종류의 털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예를 들어 오자삼양(五紫三羊)이라고 하면 토끼털과 양털을 5대 3의 비율로 만든 것을 말한다. 강한 붓은 단단하여 탄성이 비교적 강한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이리털쥐의 수염돼지털말갈기산토끼털 등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하여 부드러운 붓은 비교적 부드러운 털로 만들기 때문에 탄성의 폭이 비교적 크고 일반적으로 양털이나 산양털 혹은 닭털로 만든다. 겸호의 특징은 강하고 부드러운 털을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비교적 탄성이 강한 편으로 일반적인 것들은 대개가 산토끼의 털에다 양털을 섞든지 아니면 토끼털에다 양털을 섞어 만들고 있다. 모필은 필봉을 얼마마늠 누를 수 있느냐에 따라 장봉(長鋒)중봉(中鋒)단봉(短鋒)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장봉은 필봉이 길고 부드럽기 때문에 먹물을 많이 묻힐 수 있고, 단봉은 필봉이 짧기 때문에 먹물을 적게 묻히고 중봉은 이 두 가지의 중간 정도이다.붓은 글씨의 크기에 따라 정해지는데 일반적으로 소필(小筆)중필(中筆)대필(大筆)이 있고, 이것보다 더 큰 붓은 병필(屛筆)연필(聯筆)제필(題筆)등이 있으며, 가장 큰 붓은 사필( 筆)이라고 한다. 그리고 좋은 모필은 원(圓), 첨(尖), 제(齊), 건(健) 등 네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자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원(圓) : 필두(筆頭) 주위가 둥글게 꽉 에워싸여 둥근 송곳모양을 하면서 어느 한쪽이 파리하거나 결여되어서는 안된다.첨(尖) : 붓 끝을 모으면 뾰쪽하여야지 뭉뚝해서는 안된다.제(齊) : 붓털을 쥘부채터럼 쫙 펼쳤을 때 중간에 갈라짐이 없고 붓 끝이 가지런하여야 된다.건(健) : 탄력성이 풍부하여 붓을 눌러 쓴 다음 다시 거두어들일 때 휘었던 붓털이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와야 한다.
모필은 부드럽고 풍부한 탄력성이 있기 때문에 글자를 쓸 때 누르고, 꺾고, 머무르고, 가볍게 하고, 무겁게 하고, 빠르게 하고, 천천히 하는 것에 따라 획도 굵고, 가늘고, 크고, 작고, 둥글고, 모나고, 강하고, 부드러운 맛이 나며 여기에 먹물의 농담에 따라 무궁한 변화를 창출할 수 있다.모필을 선택할 때에는 글자의 크기와 글씨체에 따라 달리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큰 글씨를 쓸 때에는 대필(大筆), 작은 글씨를 쓸 때에는 소필(小筆), 병푸이나 영련(楹聯)을 쓸 때에는 병필(屛筆) 또는 연필(聯筆), 편액이나 초패(招牌)를 쓸 때에는 제필(題筆), 이보다 더 큰 글씨를 쓸 때에는 사필( 筆) 등으로 써야 한다. 또한 쓰려고 하는 글씨가 모나고 명확할 때에는 강한 붓으로, 풍만하고 둥글 때에는 부드러운 붓으로, 뻣세고 강할 때에는 단봉(短鋒)으로, 유창하면서도 자유분방한 행서나 초서를 쓸 때에는 양호(羊毫)로 만든 장봉으로 쓰는 것이 좋다. 그리고 획이 굵고 후박한 큰 글씨를 쓰려고 할 때에는 부드러운 대필이, 정밀하고 작은 소해(小諧)를 쓰려고 할 때에는 강하거나 겸호인 소필이 적당하다.물론 이러한 것에 구애를 받지 않고 때로는 자기의 습관에 의하여 적당한 붓을 골라 쓰는 것도 좋지만, 초학자들은 파르이 힘과 필력을 단련시키기 위해서라도 부드러운 붓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한(漢)나라 채옹(蔡邕)은 "붓이 부드러우면 기이한 맛을 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매우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가끔 어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강한 붓으로 글씨를 가르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방법이다. 만약 처음부터 부드러운 붓이나 양털로 만든 장봉으로 가르친다면 팔의 힘을 운용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장차 해서나 초서를 슬 때에도 상당히 유익하게 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처음부터 부드러운 붓으로 글씨를 쓰면 나중에 강한 붓을 잡더라도 가볍고도 편한 느낌이 들지만, 반대로 처음부터 강한 붓으로 쓰게 되면 나중에 부드러운 붓을 잡더라도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새로운 붓을 사용할 때 주의하여야 헐 점이 있으니, 새 붓에는 아교나 풀의 성분이 남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맑은 물이나 미지근한 물로 이것을 깨끗이 빨라 없애야 한다. 이때 끓인 물을 사용하면 붓털이 오그라들어 붓의 탄력성을 잃게 되니 조심하여야 한다. 그 다음 붓을 보관할 때에는 반드시 먹물을 깨끗이 빨아 없앤 다음 통풍이 잘 되는 곳에 걸어 두어야 한다. 이때 붓 끝이 아래를 향하도록 해야지 거꾸로 하면 그 속에 나아 있는 물기가 필두에 스며들어 썩을 염려가 있으니 붓걸이 등을 이용하여 항상 붓 끝이 아래를 향하도록 하여야 한다.
16.먹은 어떻게 선택하여야 하는가?
멋은 붓과 마찬가지로 글시를 씀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로 상당히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서안(西安) 반파(半坡)에서 출토된 앙수문화의 도기에 먹으로 그린 사람의 얼굴물고기사슴식물 등의 모양이 보인다. 상대(商代)에도 먹으로 쓴 수골(獸骨)이나 도편(陶片)들이 전해진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먹은 광물질로 만든 것이며, 위진(魏晉) 때에 와서야 비로소 칠연(漆煙), 송연(松煙) 등과 여러 가지를 혼합하여 만든 묵환(墨丸)이 나오게 된다. 당나라 때에는먹을 만드는 기술이 아주 정교하였으며 당시 이름난 사람으로는 이초(李超)와 그의 아들 이정규(李庭珪)와 이정관(李庭寬)들이 있었다. 이들의 솜씨는 매우 뛰어난 것으로 남당(南唐)의 후주(後主)인 이욱(李煜)이 극찬할 정도였다. 이때부터 이정규의 먹은 만천하여 명성을 날려 황금은 쉽게 얻을 수 있으나 이씨의 먹은구하기가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 소안라 때 이묵(李墨)은 주로 휘주(徽州)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휘묵(徽墨)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하였다. 명청(明淸) 이후에는 먹을 만드는 기술을 더욱 개발하여 질이 더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명문이나 낙관까지 새길 정도로 발전하였다. 광서(光緖)년간에는 사송대(謝松岱)사송량(謝松梁) 형제가 나와 묵즙(墨汁)의 일종을 창조하였는데 이것을 운두염(雲頭艶)이라고 일컫었으며 현대 묵즙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먹의 품종도 매우 다양하나 중요한 것으로는 유연(油煙), 송연(松煙), 선연(選煙) 등의 세 가지가 있다. 유연묵(油煙墨)은 오동나무 씨나물깨돼지기름 등을 태워 만든 그을음에다 아교사향용뇌향료 등을 섞어 만단다. 유연묵은 다시 석칠연(石漆煙), 초공연(超貢煙), 공연(貢煙), 정연(頂煙) 등 네 가지로 나누는데 이중에서 석칠연을 지엘로 친다. 이 먹은 질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잘 갈리며 검은 빛을 찬란하게 발하나, 아교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다. 송연묵(松煙墨)은 소나무 가지나 송진등을 태워 만든 그을음에 아교와 약재 그리고 향료를 섞어 만든 것으로, 색이 검고 광택이 적으며 아교가 적고 질이 엉성하여 물에 닿으면 쉽게 녹는다. 선연묵(選煙墨)은 산업용 석탄에다 아교와 향료를 배합하여 만든 것으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으며 초보자에게도 적당한 먹이다.먹은 글씨를 쓸 때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먹의 좋고 나쁨이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좋은 먹은 글씨를 쓸 대 부드럽거나 강한 붓이나 할 것 없이 모든 붓의 움직임이 영활하여 늘어붙거나 껄끄럽지 않고 또한 막힘이 없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로 많은 서예가들이 먹을 신중하게 골라서 썼다. 먹의 좋고 나쁨을감정할 때에는 먼저 입자가 가늘고 부드러운 것을 골라야 한다. 만져서 거칠거나 굵은 느낌이 나면 좋지 않은 것이다. 다음은 먹색이 ㅂ룩은 빛을 띠는 것이 좋으며,푸른 빛을 띠면 이보다 좋은 먹이 아니다. 그런 뒤에 다시먹의 향을 살피는데 먹 자체는 향내가 없으나 이것을 갈 대 오히려 은은하게 맑은 향이 풍기는 것이 좋은 먹이다. 먹을 구입할 때에는 먼저 먹에다 입김을 쏘인 다음 얼른 코로 냄새를 맡아 사향이나 용뇌의 향기가 은은하게 나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좋은 먹은 무겁고 나쁜 먹은 가벼우며, 좋은 먹은 두드렸을 때 맑고도 청아한 소리가 나지만 나쁜 먹은 소리가 없다.종합적으로 말하면 좋은 먹이란 입자가 가늘고, 아교성분이 적으며, 색이 검고, 소리가 맑아야 한다. 입자가 가늘다는 것은 먹 속에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기포가 적거나 없으며, 먹 자체가 단단하여 푸석푸석한 느낌이 없으며, 갈 때 입자가 고르면서도 가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아교성분이 적어야 갈 때 먹의 농담에 구애받지 않아서 붓을 움직임에 영활하게 된다. 먹색이 검다고 하는 것은 먹색이 침착하게 가라앉아서 정신과 풍채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묵경(墨經)>에서 보면 "먹을 갈 때 나타나는 색이 붉은 것이 제일이며, 순수하게 검은 색이 그 다음이며, 푸른 빛이 나는 것이 그 다음이며, 하얀 빛이 나는 것이 그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소리가 맑다는 것은 먹을갈거나 두드렸을 때 들리는 소리가 맑고도 청아하면 좋은 것이고, 둔탁하고 굵으면 나쁜 것이라는 뜻이다.평상시 연습할 때 값이 비싼 유연묵과 같은 좋은 먹을 선택하여 쓸 필요는 없고 보통먹이나 기계로 간 먹물을 사용하여도 무방하지만 묵즙은 지양하는 편이 좋다. 왜냐함녀 묵즙은 화학제품이기 때문에 냄새가 고약할 뿐만 아니라 붓도 잘 나가지 않으며, 심지어 이것을 오래 쓰면 붓이 탈색되고 탄력성도 잃게 되므로 아주 급할 때가 아니면 되도록 삼가하는 편이 좋다. 기계로 간 먹도 연습용으로는 적당하나 작품을 하기에는 먹의 입자가 너무 굵고 진하기 때문에 붓이 잘 나가지 않는 단점을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큰 글씨를 쓸 때에는 먹의 입자가 좀 굵어도 상관 없으나 작은 글씨를 쓸 때에는 반드시 먹의 입자가 작아서 먹물이 맑아야 제대로 써지게 된다.먹을 가는 물은 잡된 것이 섞이지 않은 맑은 물을 써야 하며 끓는 물이나 보리차 혹은 달인 물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끓는 물은 비록 먹이 빨리 갈리나 입자가 굵어지고, 보리차 혹은차를 달인 물은 먹의 광택에 손상을 입힌다.먹을갈 때에는 무겁게 누르면서 가볍게 움직이는 것이 좋으며, 먹은 항상 곧바로 세워가지고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먹색의 농담은 자기가 쓰는 붓과 쓰려고 하는 글시체에 따라 정한다. 강한 붓을 사용하려면 약간 진하게 하는 편이 좋으나 부드러운 붓을 사용할 때 너무 진하면 글씨 쓰기가 곤란하다. 해서나 전서를 쓸 때에는 조금 진한 편이 좋으며, 행서나 초서를 쓸 경우에는 조금 흐려도 무방하다. 먹물의 양은 자기가 쓰려고 하는 글자수의 다소에 따라 정하나, 일반적으로 처음 물을 따를 때 벼루의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인 연지(硯池)와 먹을 가는 부분인 봉망(鋒芒)과 수평되게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먹은 용도에 따라 갈아야 하며, 먹물은 막 갈아서 신선할 때 써야지만 붓이 상쾌하게 나가며, 하룻밤을묵히면 입자가 굵어지고 아교성분이 풀어져서 붓을 제어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
17.종이는 어떻게 선택하여야 하는가?
중국은 세계 최초로 종이를 발명한 나라다. 과거에는일반적으로 채륜(蔡倫)이 동한(東漢,89~105) 때 종이를 발명하였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 이래로 신강(新疆)섬서(陝西)감숙(甘肅) 등지에서 네 차례나 출토된 서한(西漢)의 고지(古紙) 등으로 채륜이 발명한 때보다 먼저 종이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증명하였다.종이의종류도 매우 다양한데 중국 서화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선지(宣紙)라고 한다. 선지는 15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으로 부드럽고 질기기가 명주와 같으며, 희기가 마치 백설 같으며, 무늬나 결은 깨끗함녀서도 치밀하고, 쉽게 썩지 않으며, 벌레나 좀이 잘 쏠지 않으며, 변색이 잘 안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안휘경현(安徽涇縣)에서 생산되는 선지를 일컬어 천년수지(千年壽紙) 또는 지중지왕(紙中之王)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천년을 가는 단청(丹靑)과 같은 풍류와 운치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지의 질은 부드럽고 먹이 잘 스며들며 감촉이 매우 좋기 때문에 먹과 붓에 대하여 오묘한 변화를 창출하게 도와준다. 서화작품용 선지는 먹이 뒤에 까지 스며들기 때문에 먹색이 더욱 윤택이 나서 감상자들에게 상쾌하고도 정아한 느낌을 준다.선지의 종류는 일반적으로 생선(生宣), 숙선(熟宣), 반숙선(半熟宣)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진다.생선(生宣)에는 단선(單宣), 중단선(重單宣), 정피선(淨皮宣), 협선(夾宣) 등이 있는데 흡수력이 매우 강한 것이 특징이다. 좋은 생선은 먹의 광택을 보존하며, 먹이 마른 뒤에 이곳에 물이 닿아도 번지지 않으며, 오래 지나도 산화가 되지 않는다. 생선에다 붓을 움직여 글씨를 쓸 때 먹이 번지면 운용하기가 좋을 뿐만 아니라 운치도 나기 때문에 특별한 정신과 풍채가 나타남으로 어떠한 글씨체를 쓰더라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초보자가 여기에 글씨를 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먹물이 진하면 붓이 나아가지 않게 되며, 반대로 먹물이 흐리면 먹이 나무 번지게 되기 때문에 묵창(墨漲)이라는 병에 걸리기가 쉽다. 따라서 생선을 사용하는 것은 오랜 숙련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숙선(熟宣)은 생지(生紙) 위에 백반을 발라 가공처리를 한 다음 만든 것이기 때문에 질은 매우 강하나 먹이 잘 흡수되지 않는다. 운모전(雲母篆), 선의전(蟬衣篆) 등도 모두 숙선에 속하는 종이다. 이러한 종이들은 표면이 비교적 매끄럽기 때문에 먹이 번지지 않고, 비록 번진다 하여도 그 정도가 아주 미약하여서 글씨를 쓰기에는 적합치 않으며, 일반적으로 화공들이 그리는 그림 따위에 주로 쓰이고 있다.반숙선(半熟宣)은 생지를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성능은 생선과 숙선의 중간이어서 먹이 너무 번지지도 안번지지도 않으며, 이층옥판(二層玉版)삼층옥판(三層玉版) 등도 모두 이 반숙선에 속하는 종이다. 이 종이도 글씨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만약 처음부터 생선을 쓰기가 적당하지 않게 여겨질 때에는과도기로 이런 종이 위에 연습을 한 다음 익숙하게 된 연후에 다시 생선을 쓰면 용이하게 쓸 수 있게 된다.처음 글씨를 배울 때에는 지나치게 비싸거나 좋은 종이를 쓸 필요가 없다. 그리고 너무 서둘러 선지에 쓰는 것도 좋지 않다. 처음에는 당지나 시험지 혹은 신문지 등을 이용하여 쓰는 것도 좋다. 당지는 원래 복건성(福建省) 장락현(長樂縣)이나 강서성(江西省) 태화현(泰和縣)이 원산지나 지금은 많은 곳에서 이를 생산하고 있다. 이 종이는 부드럽고 먹이 잘 스며들어서 글씨 쓰는 사람들이 대단히 좋아한다. 시험지는 원래 부양(富陽)소산(簫山) 등지에서 생산되며 당지에 비교하여 차이가 조금 있으나 초학자들이 글씨 쓰기에는 비교적 적합한 종이다. 신문지도 글씨 쓰기에 적합하나 여기에는 인쇄용 기름기가 남아 있어서 붓이 상하기가 쉽고, 많은 글자들이 인쇄되어 있어 정신이 산만해지는 결점이 있다.종합적으로 말하면 글씨를 연습할 때 사용되는 종이는 너무 이것저것을 따질 필요가 없으며, 단지 무늬가 비교적 가늘고 먹을 흡수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너무 매끄럽고 질긴 종이, 예를 들면 모조지, 켄트지, 기름종이 등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18.벼루는 어떻게 선택하여야 하는가?
멀리 신석기 시대에 인류는 도기 위에 다양한 색채의 물감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짐승의 모양을 가늘게 그렸는데 이것은 당시 먹을 갈았던 도구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서안(西安) 반판(半坡)의 원시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를 보면 표면에 물감을 갈아 썼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으니 이것은 그 당시부터 벼루를 사용하기 사작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벼루는 대개 한(漢)대에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 당시에는 옥으로 만든 벼루는 드물었고, 대부분 돌이나 오지그릇으로 만들었다. 동한(東漢) 때 묘에서 출토된 동연(銅硯)이 보여지고,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에는 기와나 돌을 새겨 만든 벼루도 있었으며, 수당(隋唐) 시대에 와서 벼루의 재료와 형상이 더욱 다양해지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이미 돌로 만든 벼루가 보편화되었는데 광동(廣東) 고요현(高要縣)의 단석(端石)과 안휘(安徽) 무원현( 源縣)의 흡석(翕石)이 벼루의 재료로 쓰였는데 이것이 중국 벼루의 진수를 이루고 있다.벼루의 재료로는 질그릇돌기와벽돌옥오지그릇 등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모양도 매우 다양하여 모난 것둥근 것장방형인 것타원형인 것 등 매우 다체롭다.초학자들에게 있어서 벼루는 실용적인 것이 좋으며, 모양이나 질에 대하여 너무 따질 필요는 없다. 좋은 벼루는 입자가 가느련서도 매끄럽지가 않고, 단단하면서도 성급하게 갈리지 않는 것이다. 매끄럽지 않기 때문에 먹이 빨리 갈리며, 성급하지 않기 때문에 먹이 윤기를 머금을 수가 있다. 이러한 특징이 있기 때문에 먹을 갈아도 입자가 가늘면서도 고르게 되어, 붓 끝을 자치지 않게 되며, 글자도 광채를 발하여, 붓이 갈라지지 않게 된다. 나쁜 벼루는 석질이 매조미쌀과 같이 굵기 때문에 붓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먹을 갈 때 거품이 일어나며 이것으로 쓴 글씨는 윤택한 맛도 나지 않는다. 벽돌로 만든 벼루는 너무 거칠고, 오지그릇으로 만든 벼루는 너무 매끄러워 모두 실용적이 되지 못한다. 초학자들이 벼루를 선택할 때에는 석질이 가늘고 깊이 패여있어서먹물을많이 저장할 수 있는 것으로 보통 정도의 것이면 충분하지 구태여 비싼 벼루를 살 필요까지는 없다.벼루를 사용할 때에는 먼저 벼루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제거한 다음 생수를 오목하게 파진 부분[硯池]에 가득 부어 벼루면과 수평을 이루게 한 다음, 먹을 곧바로 세워 가장 큰 타원형을 그리면서 간다. 만약 좋은 벼루를 사용할 때 나쁜 먹을 사용하면 벼루면이 상하며 수명에 지장을 받으며 갈려진 먹물도 좋지 않다. 먹을 다 갈았을 때에는 반드시 먹을 벼루밖에 노하야지 벼루면 위에 놓게 되면 꽉 늘어 붙게 되어 벼루가 상하게 되고 글씨를 쓰기에도 불편하다. 연지(硯池)에는 항상 먹물을 묵혀두어서는 안되며, 글씨를 다 쓰고 벼루를 닦을 때에는 차갑고 맑은 물로 씻는 것이 좋다. 만일 뜨거운 물로 씻으면 연대(硯臺)가 끊어지기가 쉽다. 물로 씻은 뒤에 수건종이송 등으로 닦지 말며, 태양에 쪼이지도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마르도록 하는 것이 좋다. 벼루를 쓰지 않을 때에는 맑은 물을 연지에 부어 습기를 유지하여야 한다. 만일 벼루가 건조해 있으면사용할 때 먹의 흡수가 너무 빠르게 되기 때문이다. 연대를 깨끗하게 보존하려면 벼루에 맞는 뚜껑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이것이 들어갈 수 있는 상자 등을 사용하여 보관하는 것이 좋다.
서체에 대해
1.갑골문(甲骨文)이란 무엇인가?
갑골문(甲骨文)이란 귀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의 약칭으로 결문(契文)복사(卜辭)귀갑문자(龜甲文字)은상문자(殷商文字)라고도 한다.은(殷)나라 때에는 항상 귀갑수골(龜甲獸骨)을 이용하여 길흉을 점치곤 하였는데 점괘를 얻은 뒤에는 항상 그 위에 새기고 그것과 관계가 있는 사항을 문자로 기록하였다. 갑골문(甲骨文)의 글씨는 일반적으로 상형문자가 대부분인데 어떤 것은 매우 복잡하여 그림에 가까운 것도 있다.갑골문(甲骨文)은 청(淸)나라 광서(光緖) 25년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에서 서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소둔촌(小屯村)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은왕조의 수도였던 자리다. 고증에 의하면 갑골문은 기원전 1300년에서 1100년에 걸쳐서 통용되었던 글자다. 이것은 칼로 새겨서 점괘를 얻었기 때문에 결문 또는 복사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또 이것이 당시 발견되 장소가 은허(殷墟)이기 때문에 후인들은 이것을 연구하기 위하여 은허문자(殷墟文字)은허서결(殷墟書契)은허복사(殷墟卜辭)라고 일컬었다.지금까지 과거에 사용되었던문자 중에서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발견된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중국 최초의 문자라고 인식하고 있다. 1954년 서안(西安) 반파촌(半坡村)에서 출토된 앙소문화(仰韶文化)의 채색도기 위에 있는 것은 일종의 부호를 새겨놓은 것이다. 임동채도기(臨潼寨陶器) 위에 새겨진 문자는 1974년 반파촌에서 서쪽으로 거의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도기 위에 대량으로 새겨놓은 문자의 부호다. 청해성(靑海省) 낙도현(樂都縣)의 유만문자(柳灣文字)의 부호는 갑골문과 금문(金文)에 새겨져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지금부터 6000년 전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갑골문의 필획은 직선이 대부분이고 곡선은 매우 드물다. 선도 매우 가늘기 때문에 새길 때 무척 정성을 들여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글자의 크기는 반촌이 넘는 것도 있으며 작은 것은 깨알만한 것도 있다. 필획과 필순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어떤 것은 왼쪽으로 향하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향하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갑골문을 서체적으로 분석한다면 전서(篆書)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나 짜임새와 필법은 그 나르대로 독특한 경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독립체에서 합체로 향하고 있으며 대량의 형성자(形聲字)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진보된 문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글자는 필획과 부분적으로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장단과 대소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에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점이 있다. 그렇지만 필획에서 힘을 가하고 짜임새에서 성김과 빽빽함을 안배하여 참차(參差)를 이루면서 비교적 엄정한 맛을 느끼게 한다. 글자의 짜임새와 전체적인 배치는 매우 타당성이 있으며 형체도 고아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의 글씨에 대한 기교와 각법이 익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갑골문의 필획이 비록 가늘다 하더라도 법도에 있어서는 오히려 모난 것과 둥근 것, 살찐 것과마른 것을 잘 살리는 조화를 느낄 수 있다. 필획에 있어서 모난 것이 대부분이지만 둥근 획도 있다. 둥근 획에서는 고리를 두른 것처럼 둥글게 획을 꺾었는데 이것이 매우 자연스러워 근본적으로 칼을 댄 것 같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서예적으로 볼 때 갑골문 중에서 큰 글씨는 웅장하고 힘이 있으며 까깡지른 듯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갑골문자는 먼저 글씨를 쓰고 난 뒤에 각을 하였는가 아니면 직접 칼로써 각을 하였는가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먼저 글씨를 쓰고 난 뒤에 각을 하였다고 인정하고 있다.
2.종정문(鐘鼎文)이란 무엇인가?
종정문(鐘鼎文)을 금문(金文)이라고도하며오로지 은주(殷周)시대에 청동기 위에다 새긴 문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청동기 중에서 종(鐘)과 정(鼎)이 비교적 유명하기 때문에 종정문(鐘鼎文)이라고 하는 것이다.종정문은 직접적으로 갑골문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의형체와 짜임새는 은(殷)나라 말기의 갑골문과 매우 근접하고 있다.종정문은 대부분 종(鐘), 정(鼎), 이(彛), 기(器) 등의 위에다 문자를 새긴 것으로 이중에서도 종(鐘)과 정(鼎)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종은 악기의 일종으로 대들보에 매달고 두들겨서 소리를 내는 악기다. 정은 제기에 속한 것으로 세 발과 두 개의 귀를 가지고 있으며 향로와 비슷한 모양으로 크고 작은 것이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국가의 보배로 전해져 내려왔다. 이른바 구정(九鼎)이라고 하는 것은 하우(夏禹) 때 구주(九州)의 금속들을 녹여서 만들었다고 한다.후세에 발견된 종정문의 대부분은 청동기가 주를 이루며 주(周)나라 때 시긴 것으로 내용은 제사, 칙명, 정벌, 계약 등에 관한 말들이 많으나 명문이 없는 것들도 있다. 곽말약(郭沫若)은 <고대문자지변증적발전(古代文字之辯證的發展)>에서 "은나라의 금문은 글자수가 많지 않은데 이것은 명문이 있는 청동기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은나라 말경의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주나라에 이르러 명문은 200내지 300자에 달하게 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모공정(毛公鼎)으로 499자에 달하고 있다. 종정문의 명문은 음각으로 낙관을 하였으며 양각으로 본문을 처리하였다. 종정(鐘鼎)의 주물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다르며 글씨체도 각각 같지 않다. 이중에는 갑골의 상형문자나 고문, 육국(六國)의 이문(異文)들도 섞여 있다.여기에 새겨진 글씨는 모두가 주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필획이 갑골문에 비하여 장중하고 응축되어 있으며, 곡선과 직선의 변화도 비교적 맣아서 자유로운 풍격을 나타내고 있다. 짜임새를 보면 획들이 서로 호응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획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고, 행간과 글자들도 비교적 정제된 맛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볼 때 갑골문보다는 표현형식이 풍부하지만 명문의 지위와 크기의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배치가 빈틈이 없으며 빙 둘러 채우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종정문을 보면 편안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정밀한 기교를 엿볼 수 있다. 주나라 초기의 명문을 분석하여 보면 필획이 갑골문보다 약간 거칠면서 글씨체는 은(殷)대의 것을 답습하고 있다.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이후의 명문에 이르면 가교의 발전은 더욱 성숙하여져 점획이 둥글고 글씨체도 온화한 맛을 내며 골격도 갖추어져 비교적 자유스러운 맛을 개척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모공정(毛公鼎)과 산씨반(散氏盤)이다.
3.석고문(石鼓文)이란 무엇인가?
석고문(石鼓文)은 주(周)나라때에 만들어진 것으로중국 최초로 돌에다 새긴 문자다. 이것은 열 개의 북 모양을 한 돌에다 주문(籌文)을 사용하여 사언시(四言詩)를 새겨 놓은 것으로 한 개의 크기는 3척여 정도 되며 내용은 진시황(秦始皇)이 사냥을 즐겼던 상황을 적어놓았기 때문에 엽갈(獵碣)이라고도 한다.석고문은 당(唐)초 협서성(峽西省)의 서쪽 서봉상(西鳳翔)에서 출토되었다. 이것을 봉상부자묘(鳳翔夫子廟)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오대(五代)의 난리에 한 번 잃어버렸다. 송(宋)대에 들어와 다시 이것을 수집하여 봉상부학(鳳翔府學)의 서쪽 방에다 보관하였다. 송(宋) 휘종(徽宗) 대관(大觀,1107~1110)년간에 봉상(鳳翔)으로부터 개봉(開封)으로 옮겨 보화전(保和殿)에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금(金)나라가 송(宋)을 물리친 후에 이것을 다시 북경으로 옮겼으며, 청(淸)나라에 와서는 국자감(國子監)에 보관시켰다.석고문의 연대에 대하여 장회관(張懷瓘)은 주선왕(周宣王)이라고 하였으며, 한유(韓愈)도 <석고가(石鼓歌)>를 지어 주선왕 때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위응물(韋應物)도 <석고가(石鼓歌)>를 지어 이것은 주문왕(周文王) 때 짓고 주선왕(周宣王)때 제작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 정초(鄭樵)만이 유독 진(秦)나라의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석고문은 진양공(秦襄公)8년(BC763)의 작품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으며 자세한 것은 곽말약(郭沫若)의 <석고문연구(石鼓文硏究)>를 참고하기 바란다.석고문이 비록 사주(史籌)에 의하여 쓰여진 작품이 아니지만글씨체는 소전(小篆)이전의형태를 벗어나지 아니한 대전(大篆)의 글씨체에 속한 것으로, 이 분야에서의 유일한 법칙을 간직하고 있다. 석고문의 글씨체는 상당히 규율적이며 필획이 굳건하고 묵직하며 짜임새도 매우 엄밀하면서 변화가 있다.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이것을 칭찬하여 말하길 "자제의 형상이 뛰어나 옛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주옥 같으며 맥락이 통하고 있어 소전의 조종이 되고 있다."라고 하였다.이러한 평을 참고로 하면 석고문의 글씨체와 형상이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구슬과 같은 둥근 획이 많고 생동감이 넘치는 획으로 점철되어 있어, 갑골문(甲骨文)과 종정문(踵鼎文)의 뒤를 잇고 이사(李斯)의 소전에게는 종주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唐)대의 서예가인 구양순(毆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楮遂良) 등은 물론이고 송(宋) 이후의 역대 서예가들이 모두 이것을 추종하여 전서(篆書)의 모범으로 삼고 있다.
4.과두문( ?文)이란 무엇인가?
과두문( ?文)은 과두( 頭) 혹은 과두서( ?書)과두전( ?篆)이라고 하며 글씨체의 한 종류로 한말(漢末)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과두라고 이름한 것은 붓이 처음 들어갈 때 뾰쪽하게 시작하여 움직일 때에는 처음엔 무겁고 뒤에는 가볍게 하며, 머리 부분은 굵고 꼬리 부분은 가늘어 올챙이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과두문이라고도 한다. 이런 종류의 글씨체는 드물게 보이지만 간혹 발견되 작품에서 그 풍격을 찾아볼 수 있다. 서주(西周)의 종정문에서 이러한 흔적이 발견되며, 은(殷)대의 갑골이나 옥편(玉片)도기(陶器) 위에 쓰여진 글씨에서도 발견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고 과두문의 특지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위(魏)의 정시석경(正始石經)에 씌어진 소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을 보면 필획이 비록 비교적 가늘지만 항상 붓이 들어갈 때는 눌렀으며 거둘 때에는 뾰쪽한 필봉을 그대로 유지하는 특색을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풍격은 탄력성을 이용하여 시작되고 멈추는 곳이 뾰쪽하며 중간 부분은 앞 부분에 비교하여 약간 굵어 모필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5.조충서(鳥蟲書)란 무엇인가?
조충서(鳥蟲書)란 충서(蟲書)라고도 하며 전서(篆書)의 변체다. 조충서라고 한 것은 문자의 형태가 벌레나 새의 형상을 많이 닮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충문자는 춘추전국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주물 혹은 병기의 낙관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한(漢)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이미 도장의 글씨로 발전하였다. 이런 글씨체는 작은 곡선의 장식과 새의 형상을 지니고 있어 각별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전서의 일종이나 머리와 꼬리는 뾰쪽하고 가슴은 살쪄 있으며 때때로 모무르고 누른 흔적이 있어 사람들은 이를 충전(蟲篆)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진(秦)의 석각과는 정제미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는 것들이 서로 다르다. 이러한 풍격은 남북조(南北朝)의 비액(碑額)과 묘지명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북위(北魏)의 숭령묘비액(崇靈廟碑額)에서 붓을 대고 떼는 부분은 조충서의 수법과 아주 흡사하다.
6.와당문(瓦當文)이란 무엇인가?
진한(秦漢)시대 궁전의 와당에 새긴 문자를 와당문(瓦當文)이라고 한다. 와당문은 고대 사람들의 훌륭한 예술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궁전이나 기와집을 지을 때 사용하였던 기와에 서로 다른 무늬와 문자를 장식하여 이를 아름답게 하였다.초기의 와당문은 구름무늬의 도안이었으나 진(秦)에 들어와 비로소 문자가 나오게 되었다. 문자는 길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천추만세(千秋萬歲)' 혹은 '연년익수(延年益壽)'등을 새겼다. 글자수는 적으며 한두 자, 많으면 열 자 정도에 이른다. 형태는 원형 또는 반원형의 두 종류가 있으며, 글씨체는 모두 양각의 소전체로 씌어졌으며 필획은 형세를 따라 굽은 것이 대부분이다. 장법(章法)은 구속받지 아니하였으며 의취가 묘하여 질박하고 전아한 예술미를창출하고 있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왕왕 옛날 기와를 쪼아 벼루로 만들어 거기에 이런 형식을 응용하여 낙관을 만들어 즐기곤 하였는데 지금도 고상한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7.소전(小篆)이란 무엇인가?
소전(小篆)이란 진시황(秦始皇)때 이사(李斯)가 대전(大篆)의 복잡하고 번잡한 획들을 간단하게 마든 글씨체의 하나로 갑골(甲骨), 종정(踵鼎), 석고(石鼓)와 구별하여 진전(秦篆)이라고도 부른다.한(漢)나라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문에서 "7개국의 언어가 다르고 문자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승상인 이사가 이것을 정리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이사는 <창힐편(倉署篇)>을,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는 <원력편(爰歷篇)>을, 태사령(太史令) 호무경(胡毋敬)은 <박학편(博學篇)>을 각각 지었는데 모두 대전(大篆)의 복잡한 것을 생략하고 간단히 하였으니 이를 소전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장회관(張懷瓘)도 <서단(書斷)>에서 "소전이라는 것은 진시황때 승상 이사가 지은 것으로 대전과 주문( 文)의 획을 생략하고 간단히 하였으니 이를 진전(秦篆)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이사의 소전은 결코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었던 문자를 완전히 개조한 것은 아니다. 다만 복잡하고 통용이 되지 않은 문자를 통일시키고 진(秦)나라의 문자와 합치되지 않은 것을 폐기하여 실제에 적용시키고 쓰곙 간편하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번잡한 것을 고쳐 간단하게 한 것은 당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단행한 일대의 중대한 개혁이다. 동주(東周) 이후 제후들은 군웅할거하여 각자의 정치구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방언(方言)이 생기게 되었다. 진나라가 통일을 한 이후에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어 정치를 실현하고 교화를 함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통일시켜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진시황은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문자통일에 대한 일대혁신을 단행하여 대전(大篆)의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한 소전(小篆)을 정식 문자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한자(漢字)의 규범화를 촉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소전의 형체는 둥글면서도 정제되어 있고, 둥글고 모나고 곧바른 획들은 모두 법에 맞으며, 붓을 씀에 있어서는 마치 붓 속에 철을 품고 쓴 것 같으며, 붓의 움직임은 봄에 누에가 실을 토해내는 듯하여 모난 것을 버리고 둥근 획을 취하고 있다. 소전은 또한 상당히 규범적이고, 부수(部首)와 변이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필획의 둥근 것이나 직선이 모두 단선으로 되어 있고, 굵고 가늠이 변하지 않으며, 비교적 둥근 획으로 간격들이 고르고, 조금 길쭉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글자의 상반부는 비교적 빽빽하고 하반부는 늘씬하고 여유가 있어 부드러운 가운데도 강함을 볼 수 있어 상쾌하고 굳건한 느낌을 준다.
8.간서(簡書)란 무엇인가?
간서(簡書)란 한간(漢簡)이라고도 하며 서한(西漢) 시대에 목간(木簡)이나 죽간(竹簡)에 먹을 사용하여 글씨를 썼던 것을 말한다.간서는 동한(東漢)의 예서(隸書)처럼 성숙된 맛은 없지만 오히려 사람들에게 질박하고 분방한 예술미를 풍겨준다. 출토된 간서 중에 유사추간(流沙墜簡), 거연한간(居延漢簡), 무위한간(武威漢簡), 무위한대의간(武威漢代醫簡) 등을 보면 각각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은 자연의 정취가 있어 대범하고 질박하고 변화가 있어 구속받지 아니하는 느낌이 들고, 어떤 것은 필획이 굳건하고 움직임이 빨라 상쾌한 느낌이 들며, 어떤 것은 파책이 기이하고 형체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들며, 어떤 것은 고박하면서도 표일한 느낌이 나고, 어떤 것은 전서 같기도 하고 예서 같기도 하면서 자유분방하여 혼연일체를 이루기도 한다.간서는 필법상으로 볼 때 대부분 장봉과 중봉을 운용하고 있으며 작은 글자들은 손가락의 힘을 움직인 곳도 많은데 이는 간서의 대부분이 작은 글씨체로 되어 잇기 때문이다. 이외에 큰 글자들은 잠두연미(蠶頭燕尾)의 특징과 누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수의 작은 글자들은 모두 전서의 필법을 이어받고 있으며 여기에 초서의 맛을 가하였기 때문에 붓을 처음 댈 때 역봉(逆鋒)을 한 흔적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으며 심지어는 노봉(露鋒)을 사용한 것도 보여지낟. 형체는 진예(秦隸)를 닮고 있으며, 장법(章法)과 배치는 한계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있으니 정제된 것과 파격적인 것이 서로 어울려 종횡으로 변화가 풍부하다. 먹의 사용은 질박하면서도 호박한 기세를 표현할 수 있게 하였다.서체의 변천과정으로 볼 때 간서의 출현은 예서의 성숙발전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서(草書)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9.예서(隸書)란 무엇인가?
예서(隸書)에는 진예(秦隸)와 한예(漢隸)의 두 가지가 있으며 좌서(佐書) 또는 사서(史書)라고도 한다. 예서는 전서를 간편화한 것으로 진(秦)나라에서 시작하여 한위(漢魏)시대에 통용되었던 서체다.위항(衛恒)은 <사체서세(四體書勢)>에서 "진(秦)나라에서는 전서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일들이 번잡해지자 이것으로는 도저히 이 일들을 제대로 다 기록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급관리에게 명령하여 전서를 도울 수 있는 글씨[佐書]를 쓰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예서다."라고 하였다.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예서는 진(秦)나라 정막(程邈)이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막(程邈)이라는 사람은 대전(大篆)을 잘 썼으며 문자의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죄를 지어 감옥에 있었다. 당시 그는 감옥에서 간수들이 공문서가 많은데 복잡한 전서는 쓰기에 불편하여 도저히 이것을 다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본 정막은 전서의 복잡한 획을 간결하게 하고, 전서의 둥근 획을 모나게 꺾고, 짜임세는 상형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필획화하여 쓰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은 이것을 보고 매우 칭찬하여 그의 죄를 사면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사(御史)로 기용하기 까지 하고 이를 예서라고 이름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기의 예서로서 진예(秦隸)라고 부른다. 이러한 유적은 전해져 내려오는 진(秦)나라의 도량형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나, 예서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아직 창시단계여서 완전한 성숙은 되지 않았으며 한(漢)대에 이르러 성숙하게 되었다.한(漢)나라의 예서를 통틀어 한예(漢隸)라고 부른다. 현재 발견되 왕망(王莽) 천봉(天鳳) 2년(15년)의 석각을 보면 글씨체에 점점 파책이 붙어 있다. 이 시기의 예서는 성숙단계로 파책이 없는 진예와는 아주 다른 맛을 나게 한다. 동한(東漢) 중엽에 이르러 석각은 점점 많아진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89년)의 석각을 보면 점과 획 그리고 파책이 더욱 뚜렷하여져 순수한 한예로 변모한다. 순제(順帝, 126~144)에 이르러서는 진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환제(桓帝,147~167) 영제(靈帝,168~189)때에는 기교가 무르익어 한예의 극성시기를 이루고 있다.글씨를 평하는 사라이예서는 모름지기 모나고 굳건하고 고졸하여야 하며, 못을 꺾고 쇠를 분지를 만큼 강하여야 하고 평평하면서도 뻣세어 돌을 뚫을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한예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한예의 특징은 향배가 분명하고, 파책이 생동감 있으며, 잠두연미(蠶頭燕尾)가 있고, 형세가 시원하게 열려 있으며, 용필과 짜임새가 대단히 변화있다. 자형의 구조에서 용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전서의 흔적을 탈피하여 종횡무진한 변화를 추구하여 독특한 풍격을 갖춘 예서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전해 내려오는 예서의 작품을 보면 형식과 풍격이 영활하고 다양하여 각각 그 묘를 다하고 있어 중국 서예의 금자탑을 이루고 있다.
10.팔분서(八分書)란 무엇인가?
팔분서(八分書)를 넓은 의미로말함다면 고예(古隸)를 제외한 예서(隸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팔분서와 예서는 소전(小篆)과 대전(大篆)의 관계와 같으며, 고예의 연변에서 생겨난 것으로 필세상의 구별이 있을 뿐 짜임새에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점도 없다. 왜냐하면 팔분(八分)이란 고예에서 점점 파책(왼쪽으로 삐치는 획을 파라 하고 오른쪽으로 삐치는 획을 책이라고 한다.)이 생기고 글자의 팔면이 모두 충분히 배치되고 정제한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팔분 두 자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어떤 이는 글자의 길이가 팔분 정도 되며 모범적인 글씨라 하여 팔분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전서의 맛이 20%요 예서의 맛이 20%라고 하여 팔분이라 한다고 하였으나, 내 생각으로는 八자의 형태처럼 흩어져 있기 때문에 팔분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포세신(包世臣)은 이에 대하여 "八은 형세가 죄우로 나누어 서로 등지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당육전(唐六典)>에서는 "네번째가 팔분인데 이것은 비석에 쓰여지는 글자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팔분(八分)에 대한 의견은 구구하지만 대체로 장회관(張懷瓘)의 설법을 따르고 있다.팔분서의 기원에 대한 설은 일정치가 않지만 대체적으로 전서(篆書) 이후 진예(秦隸)의 앞으로 잡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한말(漢末)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본다.팔분서에 대하여 장회관은 <서단(書斷)>에서 다음과 같이 칭찬하고 있다."신선이 남긴 법이요, 영활한 자태와 빼어난 모양에 파도를 일으키는 듯하여 금의 형상에 옥의 바탕을 옮겨 놓은 것 같다. 용사비등한 모양은 마치 호랑이가걸터앉은 것과 같으며 형세는 일정치가 않구나. 창과 칼이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이 웅건하고 표일한 기운을 발하면서도 묘한 법을 가지고 있고, 아름답고 착실한 기풍을 간직하고 있도다."팔분서의 대표작으로는 <예기비(禮器碑)>, 을영비(乙瑛碑)>, <서악화산묘비(西嶽華山廟碑)>등이 있다.
11.위비(魏碑)란 무엇인가?
위비(魏碑)는 해서(楷書)의 범주에 쏙하며 500년 전후로 한 북위(北魏)시대의 비석에 주로 쓰여져 유행하였던 글씨체의 한 종류다.이비의 행필은 신속하며, 점획은 날카롭고, 전절(轉折)은 측봉(側鋒)으로 형세를 이루고 있으며, 획의 안쪽은 둥글고 바깥쪽은 모나 있으며, 갈고리와 파임은 힘이 있으며, 삐침이 거듭 누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짜임새에 있어서는 성김과 빽빽함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종횡이 기울고 착란되어 있으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있다. 초기의 위비는 웅장하고 험한 기세가 있으며 획이 굵고 강하다. 이에 반하여 후기의 위비는 남조 서풍의 여향을 받아 점점 연미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글씨체는 당시의 조상제기(造像題記)나 묘지(墓誌) 혹은 벼랑에 세워진 비석(碑石)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용문이십품(龍門二十品)>, <정문공하비(鄭文公下碑)>, <석문명(石門銘)>, <장맹룡비(張猛龍碑)>등이 있다.위비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포세신(包世臣)은 "북조(北朝) 사람들은 붓을 댈 때 날카롭게 하며 짜임새는웅장하면서도 온화하게 한다. 먹을 사용할 때에는 껄끄럽게하면서도 신속하게 처리하여 형태를 크게 잡는다. 획의 출입과 거두고 내보내는 것과 눕고 우러러보는 것과 조아리고 삐치는 획들이 모두 제대로 법도를 지키고 있다."라고 하였다. 강유위(康有爲)도 "뼈와 살이 날카롭고도 팽팽하며, 졸한 것과 후덕함이 모두 기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라고 칭찬을 하였다. 그는 또 이 글씨체의 특징을 '십미(十美)'로 나타내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혼과 힘은 웅장하면서도 강하고, 기상은 자연적이면서도 화목하고, 필법은 뛰어 넘는 듯하며, 흥취는 한창 오르는 듯하며,뼈와 피는 통달한 맛이 있으며, 짜임새는 자연스럽고, 획들은 풍요로우면서도 아름답다.글씨체로 말할 때 위비는 당해의 견실한 기초와 풍부한 영양분을 형성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12.해서(楷書)란 무엇인가?
해서(楷書)는 진서(眞書)정서(正書)정해(正楷)라고도 부르며 옛날에는 이를 해예(楷隸) 또는 금예(今隸)라고도 불렀다.한위(漢魏)시대에는 한(漢)대의 예서를 정서라고 하였으며, 육조(六朝) 시대에 그들의 비를 진서라고 하였으며, 당(唐)의 해서를 당시에는 정해라고 불렀다.해서는 예서에서 비롯된 것으로 초서와 예서의 변천과정으로 이루어진 모범적인 글씨체를 말한다. 또한 해서는 초서의 어지럽고 난문하여 표준이 없는 것을 바로 잡을 목적으로 한예(漢隸)의 파책을생략하고 예서의 평평하고 곧은 획을 모나고 바르게 변형시켜 가히 모범이 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은 한말(漢末)에서부터 시작되다가 위진남북조(魏秦南北朝)에 성행하였으며, 당나라에 들어와 점점 자리를 잡게 되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초기의 해서는 아직 예서의필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진(漢晉)의 목간(木簡)에서 발견된 글자의 형태와 필의를 보면 예서와 초서에서 점차 해서의 모양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에 해서는 과도기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약정된 모범적인 문자로 세상에 등장하게 된다. 해서가 비록 다양한 예술풍격을 가지고 있지만 행서와 초서와 비교할 때 해서는 필획과 형태가 평온하고 단정하며, 짜임새는 배합적이고, 장법의 형식은 정제된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초서처럼 다양한 형태의 변화나 활발한 형세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역사상으로 해서는 당비(唐碑)와 위비(魏碑)의 두 체계로 구분한다. 위비에 대하여서는 앞에서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생략하고 당비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겠다.당비는 당나라의 서예로 위진(魏晉)과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흡수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창출한 글씨다 때로는 조용한 가운데 험악함을 구하기도 하고 온건한 속에 천진하고 후박함을 추구하기도 하며 때로는 정제된 속에서 뻣셈을 나타내기도 하고, 근엄한 가운데 응축되고 무거움을 느끼게도 한다. 당(唐)대의 서예가들은 각자의 서풍을 창안하여 나름대로의 풍격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 遂良), 안진경(顔眞卿) 등의 글씨가 그러하다. 이 사람들의 글씨는 후세에 이르도록 해서의 모범으로 추앙받고 있다.
13.행서(行書)란 무엇인가?
행서(行書)는 가장 실용적인 글씨체로 유창하면서도 순리적이지만 해서처럼 정제되 맛이나 초서처럼 자유분방한 맛은 없다.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행서라는 것은 후한(後漢) 영주(潁州) 사람인 유덕승(劉德昇)이 창조한 글씨체로 해서를 조금 변형시켜 간편하고 쓰기 쉽게 하였으므로 세간에 유행되었으니 이를 행서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행서는해서의 기초 위에서 빠르고 쓰기에 간편하게 마들어 초서의 방종함과 해서의 근엄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니 해법(諧法)과 초법(草法)을 융합시킨 글씨체라고 할 수 있다.행서는 다른 글씨체와 같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쓰는 법칙이 해서에 가까우면 행해(行諧)라고 하고, 방종함이 많아 초서에 접근하고 있으면 행초(行草)라고 부른다. 당나라 서예가인 손과정(孫過庭)은 "달리고 변하는 것을 때에 맞게 하는 것이 행서의 요령이다."라고 하였으니 행서는 해서보다 배교적 간편한 글씨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행서는 해서와초서의 중간에 위치하며서 신축성이 크고 변화가 많은 것은 해서와 초서의 운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붓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해서의 법을 따르고 붓을 움직일 때에는 초서의 법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점과 획은 서로 호응을 이루고, 붓은 멈췄으나 기운은 연결되어 있고, 필획은 침착한 것을 주로 하고, 연결부분은 가볍고도 가늘게 하여 눕고, 우러러보고, 기대고, 바른 획을 이용하여 생동감을 나타낸다. 왕민(王珉)은 <행서장(行書狀)>에서 행서의 형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숭산(崇山) 같이 아득하고 태산 같이 험준하며, 찬란하기는 아름다운 하늘이 머무른 것과 같도다. 큰 글씨는 뻣셈이 특징이고, 기이한 글씨는 특출나게 빼어나고, 파도를 일으키고 재주를 뽐내는 듯하고, 고운 나머지 표일함을 느끼게 하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솔개가 걸터앉은 것 같으며, 용이 기지개를 켜고 자벌레가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종요(鍾繇)의 정밀함과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의 장점을 골고루 하여 문채와 바탕의 아름다움을 다하였도다. 자세히 형체를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붓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찬란하고 위대함이 옥과 같이 빛나는도다. 완연함은 이무기가 우러러보는 형세며, 봉황새가 편안히 날개를 펼치는 것과 같도다. 혹 붓을 휘두르면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고, 현란함과 고운 맛이 어울려 종횡으로 날고 기는 도다."이상 상술한 것을 다시 정리하여 행서의 특징을 말하면 행서는 해서도 아니고 초서도 아니다. 방종하지 않고 구속받지도 않으며 지나치게 빠르거나 천천히 쓰는 것도 아니다. 행서는 초서의 운필법에 해서의 짜임새를 개량하여 용필은 비교적 마음에 따르고 짜임새는 해서보다 유동적이어서 해서의 필획을 약간 생략하고 영활한 맛을 첨고하여 생동감을 나타나게 하였다.행서는 진(晉)나라 때에 가장 흥성되었으며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행서는 신품(神品)으로 모두 25사람을 들었는데 그중에서 왕희지(王羲之), 종요(鍾繇), 왕헌지(王獻之), 장지(張芝)등이 유명하며 왕희지(王羲之)는 서성(書聖)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그후 당(唐)에 이르러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 遂良), 안진경(顔眞卿), 이옹(李邕) 등이 고수로 등장하였고, 송(宋)대에 이르러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미원장(米元章), 채군모(蔡君謨) 등의 행서가 후세에 추종을 받고 있다.행서의 실용적 가치와 예술적 효과는 다른 글씨체에 비교하여 상당히 우위에 있으며 지금까지도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여 줄곧 대중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14.장초(章草)란 무엇인가?
장초(章草)란 예서의 발전에서 생겨난 글씨로서 예서의 초서라고 할 수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제(齊)나라 재상인 두도(杜度)가 이 글씨체를 잘 썼으며 장제(章帝)가 이를 좋아하여서 상주문을 올릴 때에는 이 글씨체를 쓰도록 하였기 때문에 장초라 한다고 하였다.장초의 기원에 대하여서는 구구한 설이 많지만 허신(許愼), 조일(趙壹), 위항(衛恒) 등의 설법을 근거로 할 때 진말한초(秦末漢初)에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연변을 살펴볼 때 장초는 예서를 흐트러 놓아 쓰기에 간편하게 하였다. 예서와 장초를 비교하면 이 점은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붓을 처음 대는 곳과 특히 파임의 꼬리 부분에서는 완전히예서의 법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장초의 매글자의 필획 중에는 이미 연결의 필법이 담겨져 있어 초서에서 연결성을 중시하는 필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또한 장초는 고예(古隸)와 더불어 해서(楷書)를 완성시키는 데에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후한(後漢) 때 장지(張芝)는 장초를 잘 쓰기로 유명하였으며 지금의 초서를 창시 하기도 하였다.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장초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떨어져 있으나 장지가 이것을 변형시켜 오늘날의 초서를 만들었다. 그는 장초에 속도감을 더해주고, 띠를 뽑아 부드럽게 위아래의 획을 연결해 주기도 하고, 글자의 끝획을 빌려 다음 글자의 시작으로 삼기도 하고, 기이한 형태로 붙이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조화를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장초가 지금의 초서와 비교할 때 다른 점은 장초가 비록 예서를 흐트러 놓은형세를 하고 있지만 아직 예서의 흔적이 남아 있고, 각 글자가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다만글씨를 쓸 때 예서보다 조금 빠르고 민첩하게 붓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뿐이다.장초의 특징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글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형체에 아직 예서의 맛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로획에서 끝이 조금 윗부분으로 향하고, 왼쪽의 삐침과 오른쪽의 삐침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필획이 얽혀 있는 부분에서 가는 획이 연결되어 있으며, 둥글게 꺾는 획들이 많이 나타나 있는데 이는 예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획이며, 초서에서나 볼 수 있는 획들이다. 이것들을 종합하면 장초는 가로획과 세로획이 고박하여 예서와 같은 맛을 느낄 수 있으나 필획이 얽혀 있는 곳에서는 돌려 꺾어서 마치 초서의 필법과 같은 것이 장초의 기본적인 법칙이다. 또한 장초의 필획은 평정을 유지하고 있어 초서처럼 어그러지고 기울고 하는 형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필법은 예서에서 연원하였기 때문에 탄실하면서도 질박한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장초는 초서 중에서도 갖아 고아한 것으로 한(漢)의 유명한 초서의 대가인 사유(史游)와 두조(杜操)가 이를 잘 쓰기로 이름 났다. 장지(張芝), 황상(皇象), 삭정(索靖), 왕희지(王羲之) 등도 모두 장초의 대가미여 장회관(張懷瓘)에게 장초의 신(神)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15.초서(草書)란 무엇인가?
초서(草書)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 볼 때 어떤 글씨체에 초서의 기운이 섞여 있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전서에 초서의 기운이 들어 있으면 이것을 초전(草篆)이라 하며, 예서에 초서의 기운이 들어 있으면 이를 초예(草隸)라고 한다. 좁은 의미로 보면 전서예서해서와 더불어 글씨체의 한 종류로 취급하는 것이다.초서는 장초(章草), 금초(今草), 광초(狂草)의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초서는 한(漢)나라초부터 시작되었으며 당시통용되었던 것은 초예로서 초서의 기운이 있는 예서였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장초가 되었다. 한(漢)나라말에 와서는 장지(張芝)가 장초 중에 아직 남아 있는 예서의 필획을 제거하여 위아래 글자의 필세를 연결시키고 맥락을 통하게 하여 금초(今草)를 만들었으니 일반적으로 이것을 초서라고 한다. 당(唐)나라에 이르러 장욱(張旭), 회소(懷素) 등이 금초에다 방종함과 획을 빙빙 돌려 연결하는 필세를 더하여 자형의 변화를 꾀하고 붓의 흔적을 없게 하였으니 이를 광초라고 한다. 이것이 기본적인 초서의 발달과정이다.강기(姜夔)는 <속서보(續書譜)>에서 "초서란 글씨체는 마치 사람이 누워서 거꾸로 다니는 것 같으며, 겸손하고 싸우는 듯하며, 배를 타고 말을 달리느 형세며, 춤을 추며 펄쩍펄쩍 뛰는 듯하면서 모든 형태의 변화가 구차하지 않다. 그리고 한 글자 안에 무수한 변화가 있어 일어나고 응답하는 것과 같아 각각 도리와 이치를 갖추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초서의 특징과 기본 법도를 잘 설명한 말이다.초서는 작가의 의도 아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일필휘지로 글자를 써나가는데 때로는 연결되지 아니한 부분도 있게 된다. 그러나 혈맥은 끊어지지 않고 있으며 연결된 부분은 공기가 그 사이로 통하는 것처럼 위아래가 서로 이어지고 있다. 초서의 가로획은 기울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고, 곧바르기도 하여 일정치는 않다. 그리고 갈고리는 가락지처럼 둥글면서 구불구불하기도 하다. 글씨를 슬 때에는 획에 따라 빨리 쓰기도 하고 천천히 쓰기도 하면서 순식간에 가고 오면서 획을거두는 등 매우 다양한 필법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짜임새에 있어서는 장법과 배치가 모두 형세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서로 호응을하면서 정을품고 있다. 행과 행 사이는 마치 잠을 깬 봄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것과 같으며, 글자들은 가을 뱀들이 겨울잠을자려고 서로 엉키어 있는 형상과 같아 전체의 맥락은연결되고 기운은 생동감이 넘치는 예술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광초는 금초에 비하여 붓의 움직임이 더욱 자유롭고 구속되지 않아 격렬한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고, 놀란 뱀이 풀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추구하는필세속에서의 점과 획의 변화는 강렬한리듬감이 있어 더욱아름다운 맛을더해 주고 있다. 짜임새에 있어서는 어떠한 속박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성기기도 하고 때로는 빽빽하기도하여 허하고실한 멋을 적절하게 운용하며, 기세는 드높고, 자태는 천태만상이어서 광초야말로 정말 초서 중에 초서라고 할 수 있다.
16.관각체(館閣體)란 무엇인가?
관각체(館閣體)란 글씨체 이름이다. 명청(明淸) 시대에 과거를 볼 대 답안지의 글씨는 까마귀 같이 까만 글씨로 방정하고 깨끗하고 대소의 크기가 마치 주판알 같아야 하였다. 청(淸)대의 중엽에 이르러서는 더욱엄격하여 서예의 예술적인 맛을 경직시켰다. 명(明)대에는 이러한 글씨체를 대각체(臺閣體)라고 하였으며, 청(淸) 대에는 관각체라고 불렀다. 이는 당시 관각(館閣) 및 한림원(翰林院)의 관료들이이런 종류의 글씨를 주로 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후에 딱딱하고 근엄하고 판에 새긴 듯한 글씨를 낮추어 대각체 혹은 관각체라고도 불렀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은 당시의 관료들이 즐겨 썼던 글씨체다. 이런 글씨체의 형성은 당시 사회와 정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강희제(康熙帝)는 동기창(董其昌)을 아끼고 건륭제(乾隆帝)는 조자앙(趙子昻)의 글씨를 무척 좋아하였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과거에 응시하여 답안지를 작성할 때 황제의 취향에 들기 위하여 당시 유행하였던 글씨체를 본받아 썼기 때문에 동기창과 조자앙의 글씨가 서단을 좌우하면서 일대를 풍미하였다. 건륭(乾隆) 후기에 이르러 서단에서는 개혁파가 나와이런글씨를 숭상하던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준 것은 볼 만한 일이었다. 청(淸)대 서예의 변천에 대하여 강유위(康有爲)는 "모두 네 번 변천이 있었는데 강옹(康雍)시대에는 동기창의 글씨가 유행하였고, 건륭 때에는 조자앙의 글씨가 유행하였다. 구양순(歐陽詢)의 글씨는 가경(嘉慶)과 도광(道光) 사이에 성행하였으며, 북비(北碑)는 함풍(咸豊)과 동치(同治)년간에 싹이 터서 지금에 이르니 비(碑)를 연구하는 풍토가 더욱 성하여졌다."라고 하였다.
17.비학(碑學)이란 무엇인가?
비학(碑學)이란 두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비각(碑刻)의 원류, 시대, 체제, 진위, 내용 등의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비각을 숭상하는 서파를 말하는 것이다.비학은 청(淸)나라 학자이며 동시에 서예가이기도 한 완원(阮元)이 <南北書派(남북서파)>,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제출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포세신(包世臣), 강유위(康有爲) 등이 이를 계승하여 첩(帖)을 숭상하는 서파에 도전하여 비(碑)를 숭상하는 서파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비학(碑學)과 첩학(帖學)이라는 명칭도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비와 첩은 서로 상대적이어서 각각 독립성을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구분도 비교적 명확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것의 구분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섞어서 혼용하여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비(碑)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그것을 첩(帖)이라고 하며, 반대로 첩(帖)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그것을 비(碑)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서예가나 이것을 연구하는 학자들 심지어는 수장가들 까지도 이것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알고 있어야 제대로 응용할 수 있다. 비와 첩은 서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서예를 연구하고 익히는 사람은 꼭 숙지하고 있어야만 한다.이른바 비(碑)라고 하는 것은 옛사람들의 진적(眞迹)을 돌 위에 새긴 것을 말한다. 유협(劉 )은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상고시대 황제들의 기록을 봉선(封禪)이라고 하였으며, 나무나 돌에다 새겨 성가퀴나 큰 산 위에 세워둔 것을 비(碑)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비(碑)는 당시 공업이 있는 사람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것이며, 또는 경치나 사물혹은 일에 대한기록을 하여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碑)의 내용은 대부분 옛사람을 찬양하거나 후인들에게 계시하여 지침으로 삼도록 하는 것을 주로 담아 영구히 보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한(漢)에서 당(唐)나라사이에 세워진 비는 매우 많다. 청말(淸末) 완원, 포세신,강유위 등은 비학에 주력하여 글씨를 배우는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매우 일리가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북비(北碑)는 골격을 중요시 하였으며 운치 또한 아름다웠다. 이에 반하여 남첩(南帖)은 운치를 중요시하였는데 후대로 갈수록 골력이 점점 미약해졌다. 왕희지(王羲之)에서 구양순(歐陽詢)안진경(顔眞卿)이북해(李北海)에 이르는 명서예가들은 모두 비(비)를 연구한 사라들이다. 왕희지는 자기가 배운 글씨에 대한내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내가 어렸을 적에 위부인(衛夫人)의 글씨를 배웠는데 장차 훌륭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양자강을건너 명산을 유람하면서 이사(李斯), 조희(曹喜)등의 글씨를 보았다. 또 허하(許下)에 가서는 종요(鍾繇)양곡(梁鵠)의 글씨를 보았으며, 낙양(洛陽)에 가서는 채옹(蔡邕)의 석경삼체(石經三體)를 보았고, 사촌형이 있는 곳에 가서 장창(張昶)의 화악비(華岳碑)를 보아 처음 배운위부인의 글씨에서 탈피하였으니 이것은 여러 비(碑)를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길 비(비)를 배우고 첩(帖)을 배우지 않는 것은 가능한 일이나 첩을 배우고 비를 배우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하였다.초학자가 비각을 배우려면 마땅히 육조(六朝) 이상의 것 중에서 잘된 것을 골라 써야만 한다. 이것을 다년간 연습하여 진수를 깨우치면 속스럽고 부염한 병폐를 물리쳐 대성할 수 있게 된다.
전각과 서예
1.전각(篆刻)과 서예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전각(篆刻)은 독특한 풍격을 지닌 예술이다. 이것과 서예나 회화의 원리원칙과는 서로 통하는 점이 있으면서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서예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반천수(潘天壽)는 "도장에 사용되는 문자는 전서를 위주로 하고 있으나 때로는 예서나 해서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배우려고 하는 자는 모름지기 먼저 문자에 대한 공부와 서예의 모든 서체를 통달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는 돌을 끊어 여기에다 새기고 파는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하여 포정해우(敍丁解牛)나 유인유여(遊刃有餘)의 고사처럼 막힘이 없어야 한다. 네 번째는 마땅히 도장 위에 도장 위에 우활한 기세나 소박하고 후한정신 그리고 고상하고도 우아한 풍격 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보면 서예나 회화의 원리 원칙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각예술은 회화나 조각 예술의 특색 외에 서예를 기초로 하여야만 제대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중국 문자의 시작에 결서(契書)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 결(契)이라는 의미는 새긴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갑골(甲骨), 종정(鍾鼎), 비갈(碑碣), 와당(瓦當) 등을 보면 서예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조각예술의 절묘함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것들은 서예의 범위를 무한히 넓혀줄 뿐만 아니라 전각예술의 창조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예회화전각 등은 이것을 연원으로 삼아 과도기를 거쳐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것들이 서로 고유한 특성을 가지면서 제각기 분주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예술적인 규율에서 보면공통점을 지니면서 일맥상통하고있는 것이다. 전각을 할 때에는 대다수가 말하길 칼을사용하는 것을 마치 붓을 움직이는 것처럼 하여야 된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집도여집필(執刀如執筆) 또는 운도사운필(運刀似運筆)이라는 말로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서에에서 필정묵취(筆情墨趣)라는 것을 말하는데, 전각에서도 마찬가지로 도정석취(刀情石趣)라는 것을 추구하고 있으니 각각 미를 나타내려고 하는점에 있어서는 똑같은 것이다. 이것은 전각에서 도미(刀美)석미(石美)라고 표현되며, 서예에서 필미(筆美)정취(情趣)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돌은 마치 화선지와 같으며 도봉(刀鋒)은 필봉(筆鋒)과 같아 이것을 가지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침착하고통쾌한 맛을 나타내며, 고박하면서도 굳센 느낌을 표현하기도 하며, 깎아지른 듯한 느낌과 호매한 풍격을 갖게 하며, 단정하면서도 전아한 분위기를 창출하기도 하며, 수려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그리기도 하고, 거칠면서도 호방한 기분을 표현하는 등의 것이 바로 칼끝에서나오면서도 서예의 필미(筆美)를 잃지 않는다.서예에서 붓을 사용하며 필법(筆法)의 미를 표현하듯이 전각에서도 칼을 이요하여 도법(刀法)의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그러나 예술적인 면에서 보면 여기에서 진일보하여 서예에는 금석의 맛이 있어야 하며 금석에는 서에의 맛이 나야 하니, 이 두 가지는 아주 밀접한 연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전각은 반드시 서예의 기초를 가지고 있어야만 비로소 운도여필(運刀如筆)의 경지를 터득하여 일가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서에에서는 한 장의 화선지와 같은 것으로 장법에 있어서도 마땅히 똑같은 것은피하여 다른 형태로 표현하여야 하며, 많은 자태에서도 아름다운 변화를 추구하여서 획들이 서로 돌아봄에 정감이 있어야하며, 생동감있게 활발한 경지를 구축하여야 하는 것이다. 확실히 재주있는 전각가들의 작품을 보면 글자들의 호흡이 고르며, 기운(氣韻) 중에 시를 읊는 듯한 감동이 있어 작품에서 부드럽기가 마치 봄에 까치가 나는 듯하며 침착함이 추운 겨울에 눈이 쌓인 듯하다. 그리고 때로는 표일함이 마치 가벼운 구름이 움직이는 듯하며, 굳세기가 오래된 소나무와 같고, 짜임새의 하나하나가 생공감과 치밀함이 어우러진 도안(圖案)을 가지고 있다. 이름을 새긴 전각작품에서는 작가의 개성과 기질 심지어는 예술수양까지도 엿볼 수 있다. 역대 이래로 유명한 전가가는 서예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회화나 시문에도 비교적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작은 돌 위에다 범위를 확대시키고 대담하게 칼을 휘둘러 전각예술의 온갖 아름다운 경치를 다 표현하였다.
1-1◈전각의 이해◈
전각(篆刻)은 서화(書畵)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용구이자, 하나의 예술품이다. 잘 쓰여진 서예작품이나 그림에 전각이 찍혀있지 않으면 미완성 작품으로 인식될 정도로 그 중요성이 크다.
전각이란 말은 전자(篆字)의 글씨를 이용하여 새겼기 때문에 불리어지고, 흔히 낙관(落款)이란 말로 많이 불리어진다. 낙관이란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준말로 낙관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뒤 관지(款識)를 하고 작가의 도장을 찍는 전체를 이르는 것을 말한다.
예로부터 도장에는 전서 외에도 해서와 예서, 그림이나 동물 따위의 형상을 새겨왔었다. 인물이나 동물의 형상을 도형화시킨 것은 초형인(肖形印)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작품에 사용하는 낙관용 전각은 일반적으로 중국 명나라 문팽(文彭:字는 壽承, 別字는 三橋, 文徵明의 長男으로 江蘇省 長洲 사람이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문팽은 전각에 관한 학술적 논거(論據)를 처음으로 확립한 사람이다. 또 전각을 하나의 예술적 기호(嗜好) 및 필수품으로 등장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 후 전각은 새로운 예술로 점차 확대 인식되어졌으며, 전각이 지닌 문자학적(文字學的), 서사적(書史的), 예술적 가치의 중요성이 시대가 갈수록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다.
전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장법(章法)이다. 서예에서 결구(結構)라고 하는 것이 장법이다. 이 장법을 등산목 같은 이는 목수가 집을 짓기 전에 해야하는 기초공사인 '정지 작업'에 비유했다. 기초공사가 제대로 되어야 그 위에 세워지는 건물을 생각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이지 실제는 그와 같지는 않다. 도장이란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형태에서 파악해야 하는 직접적인 것이며, 건물은 수용능력과 기능에 따른 연구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장식성을 떠날 수 없다. 우선은 항상 정감이 가도록 해야 한다. 모처럼 제작된 것이 한두 번 보는 사이에 싫어지게 되면, 그만큼 그 작품은 조형성이 결려되어 있다는 증거다. 좋은 것은 항상 옆에 두고 보거나 사용해도 정감이 끈끈하게 흐르고 애착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도장은 모두 적색으로 찍혀 있다. 물론 붉은 문자는 주문(朱文), 백색의 문자는 백문(白文)으로 구분한다. 또 이것을 양각과 음각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음양각으로 말하기보다는 주백문(朱白文)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올바른 방법이다. 참고:전각(김태정 著)
낙관에 대해
1.낙관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낙관은 서예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본문과 유기적인 성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제된 화며에 왕왕 충실하고, 안온하고, 대비를 이루면서 주제와 서로 어울려 작품의 정취를 더욱 나타내는 작용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구도를 더욱 중요시한다.낙관은 일반적으로 위에다 하는 상관과 아래에다 하는 하관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낙관의 길이에 따라 긴 것을 장관(長款), 짧은 것을 단관(短款)이라고 한다. 상관은 일반적으로 시(詩)나 사(詞)의 제목 혹은 증여받을 사람의 이름 등을 적는다. 그리고 하관에는 작품을 쓴 사람의 이름이나, 연월일 혹은 쓴 장소 등을 적는다. 상관이 없고 하관만 있을 때에는 단관이라 하며, 상관과 하관이 함께 있을 때에는 쌍관(雙款)이라고 한다. 장관과 단관은 낙관할 장소의 공백에 따라 작가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단관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의 호와 이름 또는 연월일만 적는 것을 말하고, 이에 비하여 정관이라는 것은 단관에서 쓰는 것 이외에 내용을 첨부하는 것으로 제기(題記)나 혹은 이 작품에 대한 배경과 내용 등을 서술하여 비교적 글씨가 많은 것을 말한다.서예에서 낙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본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창작활동이다. 형식상에 있어서도 이것은 매우 풍부하고 다채롭다. 어떤 사람들은 낙관에 대한 연구가 없이 항상 이름과 연월일만 적는데 이것은 생각하여야 할 문제다. 만약 낙관에 대하여 진지한 생각이 없으면 작품의 기세나 운치 등의 예술효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역대 서예가들은 낙관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무척 고심하였으며, 적절한 글귀를 찾지 못하여 고민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낙관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낙관할 때 주의할 점을 5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1.낙관을 요란하게 하여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된다.제관(題款)과 본문을 분명하게 차이를 두어서 구별하여야 하는데, 먼저 본문은 뚜렷하게 부각시킨 다음 왼쪽 모서리 아랫면에 낙관을 한다. 만약 왼쪽 윗부분의 공백이 너무 넓으면 공허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때에는 공백이 넓지 않게 하는 것이 좋으나 글자를 크게 하여 본문을 다치게 하면 전체의 균형을 잃어 자연스럽지가 않게 된다.
2.낙관을 할 때의 글씨체는 원칙적으로는 본문과 일치하여야 한다.그러나 때때로 다른 글씨체로 이것을 고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전서나 예서로 본문을 썼을 경우 낙관의 글씨체는일반적으로 해서나 행서로 하며, 해서를 썼을 경우에는 해서나 행서로 하며, 행서를 썼을 경우에는 행서나 초서로 하며, 초서를 썼을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본문과 일치하게 한다. 이외에 육조를 썼을 경우에는 본문과 일치시키거나 행서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낙관을 할 때 때때로 나이를 분명하게 표시하는 경우가 있다.예를 들면 '沙利書時年八十有六'과 같은 형식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거나 비교적 일가를 이룬 노서예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그 목적은 후인들에게 작가의 경력이나 경로 등을 고증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니 젊은 서예가들은 함부로 이것을 흉내내서는 안된다.
4.단관은 엉성해지기 쉽고 장관은 몰리기가 쉽다.따라서 작가는 이 점을 주도면밀하게 고려하여 성긴 데 산만하지 않게 하며, 빽빽하더라도 몰리지 않게 하여야 한다. 또한 글자수를 너무 많게 하거나 적게 하여 여백이 없어도 안되며 또 너무 많아서도 안된다.
5.낙관을 할 때에는 작가의 신분이나 항렬을 분명하게 적어야 한다.이러한 형식은 옛날에는 비교적 많이 보여졌으나 요즈음은 매우 드물게 사용하고 있다. 만일 보내는 사람이 선배선생친구일 경우에는 반드시 질(侄)생(生)노우(老友) 등과 같은 것을 분명히 표시하여야 한다. 자칫 실수를 하면 후세에 큰 조롱거리가 됨을 면할 수 없다.
이상을 볼 때 낙관은 본문과 어울리게 하여야 하며 전체작품의 구성이나 장법을 도와주면서 전체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까지도 한다. 단관이나 쌍관 혹은 기타 형식의 낙관도 다 좋으나 항상 고려해야 할 것은 글씨체와 글자 크기의 대소나 위치 등을 감안하여 본문과 서로 조화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2.낙관의 도장은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
서예작품에서 도장을 찍는 것은 독특한 예술로서 지금까지도 이 방법을 고수하여 전해 내려오고 있다.글자와 도장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정취를 발하는데 이는 구성상에 있어서 강렬한 효과를 낼 뿐 아니라 작품상에 있어서도 풍부한 예술미를 풍겨주고 있다.서예작품에서 도장은 일반 손도장과는 다른 것으로 스스로 일정한 법도를 지니고 있다. 만약 일반 손도장을 작품에 찍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금상첨화의 작용을 하지 못할 분만 아니라 작품의 예술미도 손상시키게 된다. 서예작품에서 사용되는 도장은 먼저 작품의 크기와 글자의 대소, 낙관 후의 공백 등을 고려하여 배치하고 선택하여야 한다. 일반적인 규율로 볼 때 도장은 서명을 할 아랫부분이나 왼쪽에 찍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장을 행간에다 찍어서도 안되며, 본문의 끈부분보다 쳐져셔도 안되며, 본문의 긑부분과 나라히 되어서도 안된다. 도장의 크기는 낙관의 글씨와 비슷한 것이 좋은데 이보다 조금 작은 것은 무방하나, 낙관의 글씨보다 도장이 커서는 안된다. 도장을 가장 적게 찍을 때는 하나를 찍으며 보통은 두 개를 찍는다. 만약 두 개를 찍을 때 같은 형태는 피하여 하나는 주문(朱文), 또 다른 하나는 백문(白文)으로 하는 것이 좋다.서예작품의 도장은 위에서 말한 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대부븐의 작품에는 허한 곳과 실한 곳, 성긴 곳과 빽빽한 곳이 있기 마련이다. 너무 빽빽한 곳은 긴장감을 덜어주기 위하여 도장을 찍어 이것을 보충하고, 반대로 너무 성긴 곳도 도장을 빌려 충실함을 채웢주도록 하여야 한다. 특히 작품이 시작되는 곳에 도장을 찍는 것을 일반적으로 두인(頭印) 또는 한장(閑章)이라고 한다. 한장은 백문주문 이외에 반달모양, 장방형, 원형, 반원형, 타원형, 오로병형, 자연형, 꽃모늬형 등 매우 다채롭다. 내용도 일정하지 않아서 서재명이나 연호 또는 성어나 경구 등을 새겨넣기도 한다. 사용할 때에는 공간의 넓이와 내용 등을 고려하여 정하는 것이 좋다. 도장은 합당한장소에 제대로 찍어야 생명감이 발휘된다. 필묵의 작용에서 붓은 일으켰는데 먹은 따라오지 않은 것에다 한장을 찍게 되면 한가롭지 않게 되니, 이것을 이른바 판에 박은 듯한 것을 파괴하여 안온하고 평형을 이루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할 수 있다.서예에서 도장은 결코 함부로 찍어서는 안된다. 먼저 도장과 글씨체가 조화를 이루었는가를 고려하여야 한다. 대개 제백석(齊白石) 풍의 도장은 단도직입적인 급취장(急就章)에 어울리고 정성을 들여 깨알 같이 쓴 소해(小楷)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자유분방하게 쓴 작품에 가는 철사줄 같이 새긴 도장을 찍는다면 조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작품의 풍격에 따라서 도장도 거기에 어울리는 것으로 선택하여야 한다.다음으로는 작품의 먹색을 고려하여야 한다. 도장은 작품의 먹색에 따라 백문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주문으로 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하여야 한다. 만약 먹색이 농도가 짙은 작품일경우에는 백문을 선택하여 찍으면 붉은 빛의 인주 색깔과 검은 빛의 먹색이 강렬한 대비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작품의 효과도 그만큼 지대하게 나타날 것이다. 만약 먹색이 여리고 우아한 작품이라면 주문을 선택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좋다. 어떤 사람들은 작품의 성질과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마구 도장만 많이 찍으면 좋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경계하여야 할 일이다. 작품에 있어서 도장은 마치 여자가 화장을 다한 뒤에 바르는 입술 연지와 같아서 산뜻하면서도 격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함부로 하게 되면 오히려 격이 떨어져서 천한 맛을 면치 못하게 되니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비첩과 임모에 대해
3.구궁격(九宮格)이란 무엇인가?
구궁격(九宮格)이란 비첩(碑帖)을 임서할 때 사용하는 종이로 정사각형 안에 정(井)자형의 줄을 그어 9등분한 것을 말한다.구궁격은 당나라 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 그들은 이것을 통하여 옛사람들의 글씨의 법과 짜임새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글씨의 자형과 점과 획의 위치 등을 익히는데 아주 적합하다. 뒤에 사람들은 이를 응용하여 전자격(田字格)혹은 미자격(米字格)등을 발명하였다.그 쓰임새는 구궁격과 같이 글자의 자형을 익히는데 사용되었다. 물론 이러한 방법에도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글자의 자형과 점획의 위치를 정확하게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단점은 글자를 너무 판에 박은 듯이 쓰기 때문에 융통성과 필력이 향상되지 못한다.초학자들은 처음에 글자의 형태를 익히기 힘들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하여 어려운 점을 보완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글자의 자형이 익숙한 뒤에는 이것을 버리고 다시 임모(臨摹)를하여야 한다. 구궁격은 약간 번잡한 점이 있으니 미자격을사용하여도 무방하다.
4.법첩(法帖)은 어떻게 선택하여야 하는가?
초학자들이 글씨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적합한 법첩(法帖)을 선택하여 임서를 하는 것이다. 법첩을 선택하는 것도 초학자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학문이다. 만일 올바른 법첩을 선택하였다면 글씨의 진보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미궁 속을 헤매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초학자는 법첩의 선택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그러면 어떻게 법첩을 선택하여야 하는가?첫째, 초학자에게 마땅한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 둘째, 자기의 취미와 기호에 맞아야 한다. 셋째, 본인의 성격을 근거로 하여 골라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법첩을 고르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중국 서예는 풍격이 다양하고 유파가 분분하여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유형을 얼마든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글씨는 표일한 맛이 충만되어 있고, 어떤 이는 힘이 강하고 뻣세며, 어떤 이는 자유분방하며, 어떤 이는 온화하면서도 고박한 맛이 있는 등 매우 다양하다. 사람들의 취미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법첩을 선택하는 대상도 획일적이 될 수는 없다. 글씨를 가르치는 선생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학생에게 가장 적합한 법첩을 골라 주어야 한다. 어떤 학생의 글 솜씨가 조금 모자라면 이를 개발할 수 있는 법첩을 선택하여 이를 교정해 주어야 한다.예를 들면 당나라 구양순(毆陽詢) 글씨의 풍격은 필법이 험준하고 강하면서도 엄숙하고 수법은 수려하면서도 활발하니 이것으로써 거친 것을 보완할 수 있다. 안진경(顔眞卿)의 풍격은 기상이 종횡을 누비는 듯하며 단정하면서도 웅장하고 발전적이며, 수법은 근엄하니 이것으로써 나약한 글씨를 보완할 수 있다. 유공권(柳公權)의 풍격은 파리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맑고 힘이 있으며 수법은 순박하니 이에 맞는 사람에게 선택해주면 된다.어떤 사람들은 초학자는 구양순의 글씨를 써야만 획이 올바르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여서는 안된다. 소심한 사람이 구양순의 글씨를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 평평하고 곧게 되지 아니하며, 발전성이 더욱 없어진다. 이러한 사람은 오히려 구양순의 글씨보다는 안진경의 글씨를 배우는 편이 더욱 쉽게 목적을 이룰 수 있다.초학자가 법첩을 선택할 때 주의할 점은 이것이 글씨를 처음 배우는 데 과연 적당한 것인가를 고려하여야 한다. 이 법첩은 어느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며, 짜임새는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는가 혹은 붓의 움직임이 제대로 되었는지 연구하여야 한다. 안진경의 비첩(碑帖)은 세상에 많이 남아 있으나 처음 배울 때 너무 큰 글시를 쓰게 되면 곤란함을 느끼게 된다. 즉 붓을 어떻게 시작하고 보내고 거두어 들어야 하는지를 모르게 된다.예를 들어 <동방삭화찬(東方朔畵贊)>은 중년에 쓰여진 작품이고 <다보탑비(多寶塔碑)>는 이보다 일찍 쓰여진 작품으로 추구하는 필의(筆意)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해법(解法)도 자연히 차이가있다. 전자의 것은 초학자에게는 어려운 점이 많이 있으며, 후자의 것은 짜임새가 단정할 분만 아니라 붓의 움직임도 법도에 맞기 때문에 초학자가 배우기에는 적당하다.법첩을 선택할 때에는 마땅히 진당(晉唐)의 것을 골라야 한다. 옛사람도 해서(楷書)의 법은 진당에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 당시의 글씨들이 비교적 격조가 높고 필법과 짜임새에 있어서도 일정한 법도를 간직하고 있어서 완전한 아름다운과 정성이 깃들여 있다. 이것은 서단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내용이다.오떤 초학자들은 위비(魏碑)를 쓰면 어떠냐고 묻는데 가능한 일이다. 위비는 홀로 독특한 경지가 있다. 골법(骨法)이 철저하며 짜임새가 매우 엄숙하고 단정하다. <용문조상(龍門造象)>과 같은 것은 짜임새가 평평하면서도 곧바르며 단정하면서도 엄숙한 맛을 느끼게 한다. <석문명(石門銘)>과 같은 것은 풍요롭고 윤택이 나며, 웅장하면서도 광활하며, 구름을 타고 학과 같이 춤추는 듯하며, 의믹와 자태가 기이하면서도 표일한 느낌을 준다. <장흑녀묘지(張黑女墓誌)>와 같은 것은 필법이 이미 당해(唐偕)에 접근하고 있어 글씨가 연미하면서도 가볍지 않아 북위(北魏)의 강한 필의를 느끼게 한다. 이것을 볼 때 위비는 서예의 풍부한 변화와 아름다움을 무수히 간직하고 있는 글씨체다.
5.비첩(碑帖)의 임모(臨摹)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임모(臨摹)는 글시를 배워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다. 주성연(周星蓮)은 <임지관견(臨池管見)>에서 "처음 글씨를 배울 때 임모는 꼭 거쳐야 할 단계다. 임서(臨書)는 필의(筆意)를 얻을 수 있으며, 모서(摹書)는 자형의 체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모를 오래 하려면 많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변통을 잘하여야 한다. 소동파(蘇東坡)는 글씨를 배울 때 항상 옛사람의 작품을 벽에 걸어 놓고 자세히 관찰한 다음 마음으로 모(摹)를 하면서 손으로 따라 써서 대의를 얻곤 하였다. 이 가운데 진리가 있으니 배움에 스승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또 일찍이 그는 이러한 시를 읊었다. "시에서는 공교하고 기이한 것을 추구하지 말고 천진난만한 것을 스승으로 여겨라(詩不求工字不奇, 天眞爛漫是吾師)."라고 하였다. 이것은 임모의 기본에 대하여 설명한 말이다. 그러나 임모를 할 때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먼저 글자의 형태를 이리저리 살핀 다음 저과 획 그리고 필의와 짜임새의 특징을 세밀히 살핀 다음 붓을 대어 마음에 들 때까지 열심히 하여야만 실패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초학자들은 임모를 함에 하나만 알았지 둘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붓을 들어 임모를 하기 전에 먼저 법첩(法帖)을 보면서 생각하여야 한다. 생각하면서 다시 보아 마음에 글씨가 들어와야 한다. 마음 속에 글씨의 형태가 잡혔으면 비로소 붓을 들어 임모를 시작한다. 마음에 깨달음이 있다는 것은 옛사람의 정신을 얻었다는 것이니 검을 함부로 뽑아서는 안된다. 만약 법첩을 한 번 훑어보고 붓을 들어 한획을 보고 그대로 그리면 반드시 어지러움이 심하여서 그 묘를 제대로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임첩(臨帖)이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쓸 비첩(碑帖)을 전면에 펼쳐 놓고 그것에 쓰여진 점과 획 그리고 짜임새와 필의를 그대로 종이 위에옮겨 놓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구궁격(九宮格) 혹은 미자격(米字格)을 이용하는 편이 좋은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된다. 길어야 3개월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너무 빠르게 하면 필의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함녀 판에 박은 듯하여 자연스러운 맛을 내기가 어렵다.처음에는 자형을 먼저 익히고 다음에는 점과 획이 결함이 없도록 한다. 그런 다음 짜임새를 숙련하게 하고 다시 필의와 정신을 구하여야 한다. 이때 주의할 점은 먹을 한 번 찍어 한 자의 글씨를 완성해야 하며 한 획을 그을 때마다 먹을 묻힌다면 전체의 맥락이 통일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힘도 없게 된다.모첩(摹帖)이라는 것은 투명한 종이를 비첩 위에 대고 글자의 윤곽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쌍구(雙鉤) 또는 공심자(空心字)라고도 한다. 이렇게 하면 글씨의 윤곽만 남고 획의 가운데는 비어 있는 상태가 된다. 이 비어 있는 공간에 다시 먹을 묻힌 붓으로 메우게 되면 가장 모범적인 모서(摹書)가 되는 것이다.모첩을 할 때에는자세하면서도 정확하게 하여 획과 점이 틀림없어야 하며, 일단 짜임새의 특징을 파악하였으면 점과 획 긔록 전절(轉折)과 필봉의 움직임에 대한 기교를 익혀야 한다. 만일 필획이 거칠고 가늘어서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꺽고 누르는 정도가 어떠하며, 점획의 빠르기와 변화는 어떠하고, 어디가 방필(方筆)이고 어디가 원필(圓筆)인가 등을 자세히 모를 때에는 마땅히 원첩(原帖)을 참고하여 필의와 정신을 탐구하여야 한다.이 두 가지를 비교할 때 모첩이 비교적 용이하지만 그 효과가 더욱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첩이 비록 원첩과 흡사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일단 원첩을 덮어두고 한 번 써보아 기교의 정도를 비교하며 공부하여야 올바른 방법이라고 하겠다.
5-1選帖
選帖은 서예를 배우는데 처음으로 거치는 단계로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1)먼저 어떤 서체를 배워야 좋은가? 篆·隸·楷·行·草는 대체적으로 서예의 형성과 발전
과정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 순서를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선택해도 좋은가?
2)임모를 함에 碑拓이 좋은가? 아니면 帖本이 좋은가?
3)2가지 서체를 동시에 배우는 것은 좋은가?
4)"范本"이라고 하는 것의 선택기준은 무엇인가?
초학자는 먼저 正書로부터 서예를 배워야 한다고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청대의 朱和羹(주화갱)은 일찍이 말하길"作書從平正一路作基, 則結體深穩, 不致流於空滑."서예를 처음배울때는 먼저 비교적 규범이 있는 靜態서법인 篆書 혹은 隸書를 배우는 것이 좋다. 혹은 예서나 해서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인 견해는, 서예를 처음 배울 때는 먼저 해서를 배워야 한다. 해서를 먼저 배우게 되면 法度를 쉽게 익히게 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자기의 성격이나 학습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서체 발전규율에 따라 먼저 篆書·隸書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서법은 중봉을 강조하는데 전서를 배움으로서 중봉을 숙달할 수 있다. 전서를 통해서 중봉의 필법을 익히면 이후의 서법을 익히는데 튼튼한 기초를 다지게 된다. 예서는 해서의 모체로서 필획의 변화는 해서보다 단순하여 쉽게 입문할 수가 있다.
같은 서체라 할지라도 各家의 서풍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자기의 성격이나 愛好에 따라 처음에는 한사람의 글씨를 택하여 배우게 된다
*임모의 목적
서예를 배우는 자첩의 임모를 시작으로 해야하는 것은 아주 독특한 현상이다. 임모와 서법 미학이론의 연구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서법미학이론의 연구를 통하여 이러한 현상의 진정한 함의를 명확히 할 수 있다.
먼저, 서법미와 구체적 자연대상물과는 직접적인 대응관계가 없다. 서법이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추상적인 형식 결구이며, 서법에 대해 더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고전 회화식의 입장을 취할 수 없다.
描繪와 재현이 교학중에 반영되는 것은 곧 사생의 기교 훈련이다--대상의 표현을 좀더 세밀하고 조리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예의 학습은 이러한 사생이 필요치 않다. 서예는 직접적인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문학을 매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예의 교학은 엄격히 말해서 이것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단지 고전 명작을 배움으로써 기교적인 숙달에 이르는 목적을 달성하면 된다.
다음으로, 서예는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서예는 상당히 명확한 표현 격식을 가지고 있다. 서예의 기교체계는 상당히 전문화 세분화되어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명확한 규정에 따른다. 자연중에는 찾기어렵고 다른 곳에도 역시 찾기 어렵다. 고정된 격식은 단지 고정적 형식 결구중에서 얻어야 하므로 서예중에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표현 대상"의 구호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회화는 대상의 규정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 수단상으로는 그다지 계획적이지 않지
만, 서예는 오히려 그 대상이 추상형식이기 때문에 서예의 수단은 반드시 규정에 맞아야 한다.
예를들어 우리가 자연 시각적 평형원리와 율동원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기울고 躁動치는 법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서예미의 규율에도 맞지않고 서예 교학적으로도 충분치 못하다. 이것은 아주 비좁고도 세밀한 범위에 국한함에서 자신의 매력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서예가 반드시 고대서법의 기교를 학습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서예의 율동은 심리 발전의 과정으로 보통 시각예술 교육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선조의 움직음은 가장 자유롭게 발휘할 가능성도 있지만 오히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방임성을 결핍하게 된다. 고대 서예명작의 임모 학습을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러한 율동의 기본적인 특성과 확장 범위를 체험하고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가 피아노를 배울 때 세계의 명곡을 반복해서 익히지만 아무 생각없이 따라하는 것은 아니다. 서예의 임모는 기존의 시각 형태 형식을 따라 배우는 것은 다음이고 그것을 통하여 깊은"음악발전"의 성적을 익혀서 고전 명작을 통해여 심리변화의 간격과 속도 리듬등의 내용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서예 교학은 이러한 과제에 별로 주의를 기우리지 않고 있다.
이상의 3가지 이유로 서법 교학은 기존의 자첩을 근거로 한 임모를 통하여 이루어 져야 한다. 서법임모중에 우리는 반드시 아래의 몇가지 목적을 파악해야 한다.
①선조의 아름다운에 대한 체험. 실제 임모를 마친후의 자기의 감각과 선조의 리듬에 대한 분석, 반복 연습을 통한 심오한 서법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한다.
②서예 형식에 대한 인식. 추상미에 대한 인식과 서법 추상의 규정성.--한자결구의 존재가치를 인식, 서법 풍격간의 비교를 통하여 특정한 형식의 특징을 알자.
③기법을 익히자. 점획의 결구와 필법의 질삽과 돈좌을 익히고 운용할 수 있게 한다. 풍격문제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어떤 서법 풍격의 전제하에 기법 규정의 격식을 익힌다.
④창작 학습의 예비 단계로 학생에게 임모에 충실하게 한다. 이것은 이후에 창작에 임할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많은 기법 문제에 창작의 예술적 성과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반드시 임모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창작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손과 눈을 통한 관찰력과 표현력의 조화에 도움이 된다. 사실 창작력은 작가의 창조 의식과 눈과 손의 협조능력에 좌우된다. 그렇지만 최소한 임모능력에 뛰어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손과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4개 목적을 2개의 상대적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선조미의 체험에 대한 서법형식의 풍격 전승은 한조의 대비관계이고, 기법의 학습이 서예의 기초와 창작을 위한 응용으로 작용이 또한 하난의 대비관계이다. 이 두조의 관계가 대체적으로 서법임모학습의 목적 범위을 포함하고 있다.
*모첩(摹帖)-임모의 방식
자형의 결구등 표현 형식의 기교를 익히기위해 투명한 종이를 이용하여 자첩위에 놓고 필획을 그대로 그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모서(摹書)라고 하는데, 또는"雙鉤廓塡"이라고 한다.
범본위에 투명한 종이를 올려놓고 字의 筆劃 양쪽을 그대로 그리는 것을 "雙鉤"라 하는 것이며, 여기에 먹을 채우는 것을 "廓塡"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인쇄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서는 "雙鉤"만으로도 충분하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廓塡"의 과정은 생략해도 좋을 것 같다. 초기에 학습할때는 서예에 대한 기본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서예의 각종 기법(運筆, 結構, 轉折)을 배우게 되는데 초보자가 서예의 형식을 익히기 위해서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우리가 유의할점은 비록 摹의 방법이 가장 초보의 단계로 혹은 어린이들에게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의 가장 뛰어난 효과는 빠르게 서예의 형식을 배울 수 있어 초학자가 자첩에 대한 익숙하지 않으면 모의 방법을 이용해 볼만 하다.
어느정도 수준의 사람이라도 새로 자첩을 시작하기 전에 모의 방법으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서예를 배울 때 효
율적인 학습이 중요하다. 한번쯤 시도해 볼만 하다. 어린이가 서예를 배울 때, 초학자가 서예를 처음배울 때, 처음 어떤 자첩을 배울 때 모두 이 방법으로 시작하기를 권한다.
*독첩(讀帖)
서예를 배우는데 많이 쓰는 것 많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마치 독서를 하듯이 자기가 임모하는 帖을 항상 반복적으로 보는 일은 많지 않다. 사실 "讀帖"은 아주 중요하다.
臨帖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불과 字中의 字이지만, 독첩을 많이 하면 깨닫는 것이 점차 많아져서 "字中有字, 字外有字, 全從虛處着精神"(蘇東坡)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淸代의 周星蓮은 말하길"坡翁學書, 嘗將古人字帖懸諸壁間, 觀其擧止動靜, 心摹手追, 得其大意."라고 하였는데, 여기
서 말하고 있는"心摹"가 곧 "讀帖"을 말하는 것이다. "手追"는 당연히 臨帖을 말하는 것이다.
讀帖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泛讀·細讀·精讀의 3가지가 있다.
*대임(對臨)
자첩을 앞에 놓고 잘 관찰을 한후 모방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대임이라고 한다. 대임은 자기의 연습지와 자첩지간의 거리가 있으므로 당연히 모보다는 정확히 임모하기 어렵다. 그래서 고인이 말하기를 모는 글자의 형태를 얻는것이고, 임은 글자의 정신을 구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임모의 어려움은 당연히 모보다 어렵다. 대임은 여러번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눈으로 보이는것--시각적 인상, 마음의 깨달음--내심의 분류와 분석, 손으로의 표현--기교동작의 재현, 이 3가지 과정중에 하나라도 잘못이 생기면 모든 과정이 엉망이 된다. 그래서 이것은 관찰력,이해력과 표현력이 종합적으로 요구되는 훈련이다.
대임의 목적은 당연히 완벽하게 재현하는데 있다. 정확한 글자의 형태를 모방함은 물론 그 과정에서 정확한 이해력을 배양하게 된다. 이과정에서 개성이나 자아를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즘의 서예교학 과정중에 대임은 가장 흔히 볼 수있고 응용의 범위가 넓은 교학방식의 하나이다.
옛사람과 지금의 우리는 여러 가지 환경이 다르므로 자첩을 기계적으로 정확히 모방하기는 어렵다. 관찰과 깨달음의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릴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과정에서 교사의 역할은 학생들이 올바르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사는 정확한 유도와 분석으로 학생들을 일깨워 서예의 기법과 형식을 파악하게 하여 임모의 기본 목표에 달성을 도와주어야 한다.
*배임(背臨)
만약 대임이 학생들의 관찰력, 이해력과 표현력의 훈련과정이라면 배임은 곧 학생들의 기억력을 증가시킨다.
교학과정중에 반복은 중요하다. 대임을 여러번 반복한후 자첩을 덮고 기억력과 임모의 인상만으로 원자첩의 풍격과 기법등 일반적인 결구 특징을 기억한다. 머리속에 남아 있고 배임으로 표현이 가는한 것은 종종 이미 숙달된 기법의 하나이고 홀시한 것이 있다면 점차 익히도록 하자.
배임은 학생으로 하여금 자첩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관찰하게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첩을 볼 때 직관적을 보이는 풍격만을 기억할뿐 세심한 기법의 처리등은 보지 못한다.
임모는 우리에게 깊은 관찰을 할 수 있게 하고 배임은 즉 우리가 자주 소홀하게 되는 부분을 우리에게 알려주어 좀더 객관적인 입장이 되게 도와준다
*의임(意臨)
만약 배임의 과정을 마쳤다면 일반적으로 임모의 목적은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은 이미 각종 서예 기법훈련에서 모두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의임은 임모와 창작의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의임은 수준높은 반 창작식의 임모이다. 서예의 대가들도 종종 이러한 방식을 채용하기도 하는데 훌륭한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학상의 의임과 일시적인 흥취에 의한 의임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후자는 교학적 목적을 가진다고 볼 수 없고, 교학법의 연구상에도 그다지 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의임 교학은 학생의 창작 창작 활동력과 상상력을 배양하는데 있고 서법 임모중의 取捨 능력의 高下를 구체적으로 검사하는 것으로, 이것은 비교적 어려운 훈련 과목이다. 학생은 반드시 협소한 범위안에서(예를 들어 한 자첩의 풍격 규정 안에서)자기의 이해정도를 운용하여 변화있는 임모를 행하고, 자첩의 용필을 기초로 하되 그 결구는 취하지 않는다; 자첩의 선질을 위주로 하되 그 연속기교는 취하지 않는다. 좋은 쪽으로 말하면, 대체적인 범위와 규정에 따르는 것이며 비교적 파악하기 쉽다; 불리한 방면으로 말하자면 일정한 범위의 제한속에서 取捨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보다 어려운 것이며 자유로운 자기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학생들은 이과정에서 표현의 정도가 다른데 종종 학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능력개발에 충실하지 않고 단지 표현적인 근거를 찾아내어 능력이 부족하다고 할 것이 아니다. 만약 평가의 근거를 잘못 적용하여 자첩의 부족한 곳만을 과장하여 말한다면 학생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잘못을 하게된다.
이과정에서 또한 교사의 능력도 엄중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학생의 취사 판단의 정확성여부는 직접적으로 교사의 능력 여부가 학생의 신뢰를 받게 된다.
교학경험에 의하면, 의임은 일반적으로 두가지의 다른 取捨를 이끈다. 하나는 자첩의 기법 체계의 간단화, 종합화로 넓은 범위 넓은 감각중에서 意를 개조한다.
다른 하나는 자첩의 기교체계를 더욱 세분화, 국부화하는 것으로 자첩의 주요특징을 과장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교학과 교사의 입장으로는 후자의 방법을 취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그 이유는 통상 임모 관찰력의 배양에서 학생은 최우선적으로 막연한 느낌으로 파악하고 있어 세부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모·대임·배임·의임의 이 4가지 임모방식은 기초단계에서 전문적 단계로 점차 발전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의임은 당연히 최고의 단계이다. 서법의 기본 기법이 부족한 사람과 어린이에게 의임단계를 요구하는 것은 대상에 다한 분석력과 취사능력이 부족하여 그들은 담당하기 어렵다.
모는 상대적으로 초급의 임모방식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의 외관을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의 4가지 방식를 파악하여 서로 다른 교학 환경에 운용하는 합리성을 가져야 한다.
6.독첩(讀帖)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독첩(讀帖)은 글씨를 배움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어떤 사람은 법첩(法帖)을 보면 습관적으로 임첩(臨帖)을 하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독첩을 할 때 진지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모두 글씨를 배우는 데 있어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독첩이란, 글씨를 쓰지 않을 때나 붓을 들기 전에 법첩을 펼쳐 놓고 자형의 형체나 붓을 움직이는 방법 등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영자팔법(永字八法)과 필획의 진행을 일일이 분석하여 방필(方筆)로 쓸 것인지 아니면 원필(圓筆)로 쓸 것인지를 결정하고 또한 장봉(藏鋒) 혹은 절봉(折鋒)을 결정한다. 그런 뒤에 다시 짜임새의 특징과 필획 사이의 간격, 장단, 대소, 신축(伸縮), 조세(粗細) 등을 연구한다. 짜임새에 있어서는 안을 빽빽하게 하고 밖을 성기게 할 것인지, 아니면 안을 성기게 하고 밖을 빽빽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한다. 이외에 글자의 형세를 연구하는 데 기로획은 어떻게 처리하였으며 세로획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하는 문제들들 세심히 살펴야 한다. 또한 짜임새에는 어떠한 특징과 변화가 있으며 어떠한 자태를 취하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틀어 독첩이라 하며 임첩의 기초가 된다.물론 초학자들은 이러한 것을 한꺼번에 파악하기는 힘든 일이고 그저 똑같게 쓰기만 하여도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노력하여야만 진보가 빠를 것이다. 포세신(包世臣)은 <예주쌍집(藝舟雙楫)>에서 말하길 "하나를 흉내내려면 먼저 살핀 뒤에 나아가라. 먼저 살핀 뒤에야 흉내를 낼 수 있는 것이다. 흉내가 정미하여야만 살핌도 정확하게 되어진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하나를 아해하면 하나의 진보가 있고 많은 것을 이해하면 많은 진보가 있으니 이해를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정수를 얻는다는 말이다. 초학자들은 독첩에 많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7.배임(背臨)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배임(背臨)이란 법첩(法帖)을 펼쳐놓고 이것을 암기한 다음 다시종이에 옮겨 쓰는 것을 말한다.배임은 글시의 단련과 기억력의 증강에는 도움이 되지만 독첩(讀帖)과 임첩(臨帖)을 할 때만큼 진지해지지는 않는다. 만약 독첩이나 임첩을 할 때 주의력을 집중시키지 않는다면 점획과 짜임새 혹은 용필(用筆) 등을 정확하게 익힐 수 없기 때문에 배임을 할 때 엉망이 되어 효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소에 많이 보고, 읽고, 생각하고, 검사하고, 대조하고, 관찰하고, 암송하려고 애써야 그 효과를 발휘 할 수 있는 것이다.동기창(董其昌)은 말하길 "내가 <난정서(蘭亭書)>를 배울 때 필의(筆意)로 배임을 하였지만 고비(古碑)에 대하여서는 이것을 흉내도 내지 아니아혔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흉내내려고 하는 초학자들에게는 귀감이 될 것이다.이외에 공임(空臨)이라는 것이 있는데 매우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어떠한 조건이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전면에 법첩(法帖)이나 필묵(筆墨)이 없어도 자기가 평소에 익힌 글자들을 모래 위에나 땅에다 그냥 기억하여 쓰기만 하면 된다.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서예의 훈련을 하곤 하였다.
8.법서(法書)와 법첩(法帖)이란 무엇인가?
법서(法書)와 법첩(法帖)의 의미는 거의 같은 것이다.법서란 간단히 말하여 좋은 작품으로 후인의 법칙과 모범이 될 만한 것을 말한다. 또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높여서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법첩이란 옛사람이 손수 쓴 작품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을 탁본하여 후인들이 이것을 본받아 임서(임서)를 하기 위한 것이다.만약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의 묵적(墨迹)과 함께 각을 하였을 때 이것을 총첩(叢帖)이라 하는데 세속에서는 이것을 투첩(套帖)이라고 부른다.송 태종(宋 太宗)은 순화(淳化) 3년(992)에 시서학사(侍書學士) 왕착(王着)에게 명령하여 비각(秘閣)에 소장하였던 법서를 모각(摹刻)하여 10권으로 하였는데, 매권의 첫머리에 법첩제입(法帖第入)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기 때문에 이를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 한다. 법첩이란 명칭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인들이 넓은 석판이나 목판 위에 옛사람들의 글씨를 모각한 것도 통틀어 법첩이라고 한다
9.첩학(帖學)이란 무엇인가?
첩학(帖學)도 비학(碑學)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법첩의 원류우열탁본의 선후와 좋고 나쁨을 고증하여 작품의 진위와 내용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쓰이고 있고, 둘째는 법첩을 숭상하는 서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첩학과 비학은 서로 상대적인 것으로 앞부분에서 거론하였기 때문에 중복되지 않는 것 중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사항을 두 가지로 설명하겠다. 첫째, 옛사람의 글씨를 임모(臨摹)하여 돌에다 새긴 것을 첩(帖)이라고 하고, 돌에 글씨를 새겨 세워둔 것을 비(碑)라고 한다. 둘째, 비란 작가가 직접 쓴 글씨를 새긴 것을 말하고, 첩이란 다른 사람의 글씨를 임모하여 새긴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비는 옛사람의 진적이라 할 수 있고, 첩은 후인의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진적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비와 첩 이외에 묵적(墨迹)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묵적은 글씨를 명주나 종이 위에 써서 당시나 혹은 후세에 전하는 것을 말한다. 첩(帖)이라는 개념을 살펴보면 수건 건(巾)변에 속해 있는 글자로 원래는 비단 위에 글씨를 쓴 것을 가리켰는데, 뒤에 와서는 화선지에다 쓴 것까지도 포함시켜 첩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는 명주나 종이위에 씌어진 명가의 묵적을 비롯하여 돌과 나무 위에 새긴 것을 책으로 펴낸 것까지도 첩이라고 하여 첩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종합적으로 말하면, 옛사람의 글시, 즉 묵적은 물론이고 비와 첩까지도 통틀어 첩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것을 또한 비첩(碑帖)이라고도 한다.비첩은 탁본의 글씨를 말한다. 옛날에는종이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단에다 글씨를 쓰곤 하였는데 이것을 첩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단은 오래 보관할 수 없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거기에 씌어진 글씨를 돌에다 새겨 놓기도 하였는데 이것 역시 첩이라고 부른다. 또 옛사람의 글씨를 돌에다 새기고 이것을 다시 탁본한 것도 역시 첩이라고 한다. 비라는 것은 본래 문자를 돌에다 새겨 죽은자의 묘 앞에 세워두고 그 사람의 사적을 전하거나, 공덕이 있는 사람을기리기 위하여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후인들이 이것을 탁본하여 전한 것도 역시 첩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탁본과 묵적을 통칭하여 비첩이라고 하는 것이다.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서예 작품과 탁본들 중에서 서예 학습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고 서법을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 통틀어 비첩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는 대가의 글씨에만적용시킬 수 있으며 철저한 고증이 뒤따라야 한다. <사해(辭海)>라는 중국사전에서 비첩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보면 "비라는 것은 비석에다 각을 한 것을 말하며, 첩이라는 것은 법첩을 말하는 것으로 세상에서는 이것을 함께 묶어 비첩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원 전 불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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