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後帖學期(1723-1795); 金石學과 서예의 만남
康熙帝의 뒤를 이은 世宗인 雍正帝는 만주족 통치의 淸나라 정권의 보전을 위하여 가혹한 獨裁政治를 실행하였다. 지식인들의 정치적 사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禁書를 정하고 여러 차례 文字獄을 일으켰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학문의 방향을 정치적 사상과 무관한 考證學쪽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考證學은 順治와 康熙 연간에 顧炎武, 黃宗羲, 王夫之 등에 의해 제창된 학문으로 그 연구는 문자를 통하여 經史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을 우선한다. 따라서 이 때부터 史料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청동기와 刻碑들을 대규모로 발굴하고 수집하게 되었다. 금석 문자의 내용에 관한 연구는 학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문자의 형식과 심미적 특징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嘉慶 연간 이후에 성행하는 碑學은 이와 같은 考證學의 성행에서 그 싹을 틔우고 있다.
서예사적으로 雍正의 짧은 시대는 帖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도기이다. 康熙 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董其昌의 書風이 주류를 형성하였으나 점차 趙孟頫의 서예로 눈을 돌리는 서예가가 많아 졌다. 雍正의 뒤를 이은 乾隆帝는 내부적으로는 雍正 시대에 실시한 사상의 통제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대외적으로는 영토를 확장하여 淸나라 황실을 굳건히 하고 국력을 배양하는 데 전력하였다. 그는 또 祖父인 康熙帝의 문화 사업을 찬양하였으며 자신도 康熙帝를 배워서 도서의 편찬 사업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특출한 것은 中國 최대의 문화 사업으로 불리는《四庫全書》의 편찬 사업이다. 《四庫全書》는 15년에 걸쳐 당시까지 전하고 있던 3457종, 약 7만 9천 권의 도서를 수집하여 經史子集의 四部로 나누어 편찬한 도서의 집대성으로 乾隆 46년(1781)에 완성하였다. 이 거대한 편찬 사업에는 당대의 대표적 학자 360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모두 일곱 질의 正本과 한 부의 副本을 제작하여 황궁 안의 文淵閣을 포함한 전국으로 일곱 곳에 소장하였으며 副本은 翰林院에 보관하였다. 또한 《四庫全書總目題要》200권을 편찬하여 《四庫全書》에 수록된 서적을 포함하여 약 만 종의 도서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였다.
《四庫全書》의 편찬 사업은 당시의 사상계와 학계 그리고 서예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도서의 수집과 정리 과정에서 滿洲族에 불리한 것이나 반만 사상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은 태워 버리거나 수정하게 하고 禁書를 지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반항이 일어나게 되었고 다시 몇 번의 文字獄이 발생하여 학문과 사상의 범위는 축소되었고 樸學은 더욱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한 질의 서적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서체의 통일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四庫全書》의 편찬에 참가한 수많은 학자 뿐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심미적 표준이 생겨나게 되었다. 乾隆帝는 王羲之의 서예와 元나라 시대 趙孟頫의 서예를 좋아하였다. 또한 淸末에서 근대를 살다간 서학자인 馬宗霍이 《霋嶽樓筆談》에서 乾隆帝의 서예를 “圓潤秀發, 盖仿松雪.”(원만하고 윤택하며 수려한 것은 대체로 松雪體를 모방하였다.)이라 한 것처럼 그는 趙孟頫의 서체를 배워서 자신의 書風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四庫全書》를 편찬하는 학자들은 乾隆帝의 뜻을 따라 松雪體를 표준으로 서체를 통일하게 되었다. 그 후 趙孟頫의 松雪體는 董其昌의 書風을 제치고 다시 서단의 중심 書風으로 대두하였다.
乾隆 시대에는《四庫全書》을 포함하여 역사, 과학, 지리 등 많은 영역의 편찬 사업 이외에 서예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사업도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法帖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刻帖을 제작한 것이다. 乾隆帝는 王羲之의 [快雪時晴帖], 王獻之의 [中秋帖], 王珣의 [伯遠帖]을 특별히 좋아하여 ‘三希’라 이름하고 궁중에 ‘三希堂’을 지어 寶藏하며 수시로 감상하였다. 당시 三希堂에 소장된 서예 작품은 이상의 명품 이외에도 수만 점이 있었다. 乾隆 12년(1747)에는 梁詩正과 汪由敦 등으로 하여금 三希堂에 소장된 작품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宋나라 시대의 [淳化閣帖]에 필적할 만한 [三希堂法帖]을 제작하게 하였다. 또한 궁중에 소장된 역대의 臨摹本 [蘭亭序] 일곱 종과 乾隆帝 자신이 臨書한 한 점을 합쳐 [蘭亭八柱帖]을 제작하였다. 이 밖에도 [三希堂法帖]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을 모아 [墨妙軒法帖]을 제작하였고 書畵 작품을 수록하고 평론을 실은 [石渠寶笈]을 편찬하였으며 乾隆 35년(1770)에는 [淳化閣帖]에 釋文을 단 [欽定重刻淳化閣帖]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刻帖의 제작 사업은 乾隆帝가 서예를 매우 좋아하였던 것과 康熙帝를 숭배하여 정치적 지주로 삼았던 까닭 등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四庫全書》등 많은 도서의 편찬과 여러 刻帖의 제작 사업은 서예의 학습, 창작과 감상의 심미적 표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도서의 편찬 사업에 참가한 학자들은 乾隆帝의 뜻에 따라 趙孟頫의 書風으로 통일하여 역대의 서적을 필사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趙孟頫의 서예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으며 松雪體는 그들의 심미적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東晋시대 이후 王羲之의 서예는 모든 왕조에서 서예의 표준이 되었으며 가장 정통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帖學이 생겨난 이래 刻帖의 제작은 王羲之의 서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王羲之의 書風은 곧 帖學의 심미적 표준이 되었다. 乾隆시대에 이루어진 刻帖의 제작도 역대 왕조에서와 같이 王羲之의 서예를 중심으로 하였다. 또한 王羲之의 [快雪時晴帖], 王獻之의 [中秋帖], 王珣의 [伯遠帖]을 ‘三希’라 하여 寶藏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乾隆帝는 唐太宗, 宋太宗과 마찬가지로 王羲之 서예와 그 書風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나 淸나라 시대에는 이미 王羲之의 眞蹟을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乾隆帝를 포함한 서예가들은 摹本이나 刻帖의 감상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東晋시대 이후 王羲之의 書風으로 가장 유명하였으며 元나라의 王羲之라 불리는 趙孟頫의 서예를 감상하고 배움으로서 구할 수 없는 王羲之 서예를 대신하려 하였다. 한 시대의 심미적 표준이 바뀜에 따라 서예가들은 康熙시대 이후 유행한 董其昌의 서예에서 부족함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표준에 맞는 趙孟頫의 서예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張照(1691-1745)는 江蘇省 華亭(지금의 上海 松江) 사람으로 字는 得天과 長卿을 사용하였고 涇南, 梧囱, 天甁居士, 天甁齋, 法華庵, 南華山人 등 많은 雅號와 堂號를 사용하였다. 康熙 48년(1709)에 19세의 나이에 進士에 급제하여 內閣學士, 刑部左侍郞, 左都御史 등을 거쳐 刑部尙書에까지 올랐다. 乾隆 10년(1745) 아버지의 喪을 당하여 돌아가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太子太保에 봉해지고 文敏의 詩號가 내려졌다. 張照는 학문과 詩文 뿐 아니라 書畵와 음악 등 문예의 모든 방면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飮酒와 歌舞를 좋아하는 등 풍류를 무척 즐겼다고 전하고 있다. 서예는 董其昌으로 입문하여 顔眞卿과 米芾을 배워 楷書와 行草에 가장 뛰어났고 특히 扁額의 큰 글씨는 당대 제일로 평가받았다. 康熙, 雍正, 乾隆 등 세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御製의 題跋이나 扁額은 대부분 張照에 의해 쓰여졌다고 한다. 康熙帝는 張照의 서예를 칭찬하는 詩에서 “書有米之雄, 而無米之略. 復有董之整, 而無董之弱. 羲之後一人, 舍照誰能若.”(서예에 米芾의 웅장함은 있으나 날카로움은 없고, 董其昌의 방정함은 있으나 연약함은 없다. 王羲之 이후 한 사람으로 張照를 버리고서 누구를 이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이라 하여 그의 서예는 米芾과 董其昌의 장점을 취하여 웅장하면서도 방정하다고 평가하였다.
梁同書(1723-1815)는 浙江省 錢塘(지금의 杭州) 사람으로 字는 元穎이라 하였으며 號는 山舟, 不翁, 등을 사용하였고 90세 이후에는 新吾長翁을 사용하였다. 그는 문학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大學士를 지낸 梁詩正(1697-1763)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서예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12세에 이미 扁額의 글씨를 썼다고 한다. 乾隆 17년(1752)에 會試에 응시하여 及第하지 못하였으나 특별히 進士에 봉해져 翰林院侍講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는 서예의 감상과 비평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어 서예 이론 저술인 《頻羅庵論書》, 《頻羅庵書畵跋》등을 남기고 있다. 梁同書는 顔眞卿과 柳公權의 필법으로 입문하여 중년 이후에는 米芾과 趙孟頫의 서예를 배웠다. 楷書와 行書에 가장 뛰어났으며 특히 老年에도 小楷를 매우 잘 썼다고 평가받고 있다. 당기 劉墉, 王文治와 함께 帖學의 三大家로 평가받았으며 梁國治, 梁巘과 함께 ‘三梁’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淸나라 시대의 吳修가 《昭代尺牘小傳》에서 “山舟書出於顔柳米董, 自立一家, 負盛名六十年, 所書碑版遍環宇.”(梁同書의 서예는 顔眞卿, 柳公權, 米芾, 董其昌을 배워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60년간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작품은 전세계로 두루 퍼져 나갔다.)라 한 것 같이 그의 서예는 당시의 朝鮮, 日本, 臺灣 등 주변 국가에서도 큰 명성을 얻었다.
翁方綱은 王羲之를 중심으로 한 刻帖과 趙孟頫, 董其昌 등의 서예로 입문하였고 후에 歐陽修, 虞世南, 顔眞卿 등 唐나라 시대의 楷書에서 得筆하였다. 그는 楷書와 行書에 가장 뛰어났으며 특히 小楷는 館閣體의 통일되고 고운 심미적 특징에서 벗어나 강건하면서도 질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翁方綱이 비록 唐나라 시대의 楷書를 많이 학습하였으나 그 기초는 帖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의 劉墉, 王文治, 梁同書와 함께 帖學의 四大家로 불려 帖學派 서학자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金石學과 서예학의 업적으로 후대에 이론적 기초로 삼은 碑學派 서예가로부터도 호평을 받았을 뿐 아니라 碑派의 서예가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을 근거로 할 때 翁方綱의 서예가 비록 王文治, 梁同書, 梁巘 등 帖派의 書風과 달리 질박한 맛이 있으나 전체적 심미적 특징은 유연하고 수려하다. 따라서 그가 비록 金石學에 조예가 깊었고 唐나라 시대의 서예를 배웠다고 하지만 帖學의 심미적 범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를 碑派의 서예가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碑派의 실천적 선구자라 할 수 있는 鄧石如의 서예를 용납하지 못하고 강하게 부정한 것으로 볼 때 비평의 심미적 기준도 碑學과는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雍正시대의 과도기를 지난 乾隆시대를 後帖學期라 할 수 있지만 이 시기에는 또 碑學이 탄생할 수 있는 싹을 잉태하고 있는 또 다른 과도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순수하게 帖學을 중심으로 학습하고 창작한 帖派의 업적 이외에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揚州八怪와 西泠四家의 활동을 들 수 있다. 揚州八怪는 江蘇省 揚州(지금의 江都縣)를 중심으로 활동한 書畵家들로 金農, 鄭燮, 李鱓, 羅聘, 李方膺, 黃愼, 汪士愼, 高鳳翰(혹은 高翔)을 가리킨다. 이들은 고대의 법칙을 거부하고 자기의 뜻이 움직이는 데로 창작하여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의 정치에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또한 이들은 吳門書派나 華亭書派와 달리 서로의 영향을 많이 받거나 같은 고향의 집단을 이루었던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書畵의 한 파로 분류하지 않는다. 다만 揚州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지명을 사용하고 괴이한 특징을 들어 揚州八怪라 부르고 있다. 揚州八怪는 서예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모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특히 서예는 당시에 유행하던 帖學의 형태와 심미적 범주로 창작하지 않고 篆書, 隸書, 狂草 등에서 자신들의 심미적 요구에 부합하는 것을 찾아내어 창작하였다. 그러나 옛 법칙을 닮으려 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심미적 세계를 개척하려 한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 가운데 자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金農과 鄭燮이다.
西泠四家는 丁敬, 蔣仁, 黃易, 奚岡으로 浙江省 杭州를 중심으로 활동한 서예가들이다. 이들은 특히 篆刻에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있으며 淸나라 후기와 民國시대의 篆刻 예술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西泠四家의 영향으로 杭州를 중심으로 한 남방은 篆刻 예술이 크게 성행하였다. 西泠四家를 포함하여 西泠八家라 불리는 陳豫鍾, 陳鴻壽, 趙之琛, 錢松를 배출하였으며 西泠印社를 탄생하게 하여 篆刻 이론과 창작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굳게 다졌다.
黃易(1744-1802)는 浙江省 錢塘 사람으로 字는 大易이고 小松, 秋盦, 秋庵, 秋影庵主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경제적으로 그리 부유하지 않은 가정 형편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詩文과 서예 그리고 篆刻에 매우 열중하였다고 전한다. 山東兗州府同知 등의 관직을 지내면서 틈만 있으면 각지를 돌아다니며 옛 刻石과 鍾鼎을 수집하고 拓本을 Em는 등 정리하여 《得碑十二圖》, 《小蓬萊閣金石目》, 《嵩洛訪碑目記》, 《武林訪碑錄》등 金石學의 저서를 남겼다. 乾隆 51년(1786)에는 山東의 嘉祥에서 武梁祠畵像을 발견하여 그 자리에 武氏祠堂을 건립하고 畵像을 보관하기도 하였으며 [漢石經], [範式碑], [三公山碑]를 찾아내어 세상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漢魏시대의 刻碑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방면에는 남다른 성과를 올렸으며 金石學과 碑學이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서예는 先秦시대의 [石鼓文]과 漢魏의 隸書를 배웠으며 隸書에 가장 뛰어났다. 蔣寶齡은 《墨林今話》에서 “精隸書, 尤得古法.”(隸書에 뛰어났으며 특히 옛 묘법을 얻었다.)이라 하였고 方朔은 《枕經堂題跋》에서 “小松司馬大隸書摹[校官碑額], 小隸有似[武梁祠題字].”(黃易의 큰 隸書는 [校官碑額]을 배웠고 작은 隸書는 [武梁祠題字]와 닮았다.)라 하여 黃易이 漢魏의 隸書를 배워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하였다. 篆刻은 丁敬을 배웠으나 스승보다 뛰어나 靑出於藍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漢印과 漢魏시대 刻石 篆書의 筆意를 흡수하여 웅장하면서도 질박한 刻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丁黃印譜]와 [秋景庵主印譜]가 전하고 있으며 [西泠八家印譜]에도 篆刻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3). 前碑學期(1796-1820); 碑派 서예가의 활약
淸나라 초기 顧炎武에 의해 시작된 考證學은 朱彝尊과 黃易 등의 계승과 발전에 의해 하나의 학문 영역으로 뿌리를 내렸다. 考證學은 經史의 校勘과 연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金石學, 文字學, 서예학 등의 학문을 크게 발전시켰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산과 들에 버려져 있던 고대의 金石들이 가장 중요한 학문적 자료로 인식됨에 따라 명문의 내용은 물론 서체도 깊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考證學, 金石學, 文字學을 연구하는 사람은 모두 당시의 뛰어난 학자일 뿐 아니라 서예가였다. 따라서 그들은 고대의 金石文字를 통하여 刻帖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심미적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고 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雍正과 乾隆시대 帖學의 주도 아래에서 지역적 특성을 띤 揚州八怪와 西泠四家에 의해 학습되고 창작된 金石 文字의 書風은 嘉慶시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당시의 서예가들은 刻帖을 중심으로 학습하는 帖學의 전통을 거부하고 先秦시대의 金石 文字는 물론 漢魏와 晋唐의 刻石 문자를 중심으로 학습하여 새로운 書藝學인 碑學이 탄생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乾隆의 후기와 嘉慶시대에 중점적으로 활동한 서예가는 대부분 帖學을 기초로 서예에 입문하였으나 金石學의 성행과 함께 금석 문자로 눈을 돌려 창작하였다. 그들은 碑學이 아직 완전한 서예학의 이론과 사상으로 자리잡기 이전에 금석 문자로 학습하고 그 심미적 특징을 표현하였다. 이 시대의 碑派 서예가로는 畢沅, 錢大昕, 桂馥, 鄧石如, 錢坫, 王昶, 洪亮吉, 陳豫鍾, 伊秉綬, 段玉裁, 孫星衍 등이 많은 명성을 얻었다.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서예가는 鄧石如이고 이밖에 桂馥, 伊秉綬, 孫星衍, 陳鴻壽 등이 서예의 창작에서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였거나 金石學과 文字學 그리고 서예 이론과 篆刻 등의 영역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서예가이다.
伊秉綬(1754-1815)는 福建省 汀州 寧化縣 사람으로 字는 組似이고 號를 墨卿이라 하였으며 晩年에 墨庵으로 바꾸었다. 어릴 때부터 程朱學으로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 伊朝棟(1729-1807)으로부터 程朱學과 서예를 배웠다. 또 同鄕인 대학자 雷鋐의 문하에 입문하여 程朱學을 배웠으며 그것으로 생활은 물론 예술 사상의 지주로 삼았다. 乾隆 54년(1789) 進士에 급제하여 刑部主事, 遷員外郞을 거쳐 惠州知府와 揚州知府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중앙에서 작은 관직에 몸담고 있을 때부터 학문과 인품으로 명성이 높았다. 《孟子正義》를 저술한 焦循은 “公起居言笑藹然君子儒也.”(公은 말씀과 행동이 모두 君子와 같다.)라 칭찬하였으며 四庫全書總裁官을 지낸 紀昀(1724-1805)은 伊秉綬의 학문과 인품을 신임하여 손자의 교육을 맡기기도 하였다. 惠州의 知府로 있을 때에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나 善政을 베풀고 청렴한 생활을 한 그를 존경하는 백성들에 의해 곧 풀려났다. 揚州에서 知府로 있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백성들은 歐陽修, 蘇軾, 王士禎을 모시고 있는 ‘三賢祠’에 그를 모시고 ‘四賢祠’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陳鴻壽(1768-1822)는 浙江省 錢塘(지금의 杭州) 사람으로 字는 子恭이고 翼庵, 曼生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嘉慶 6년(1801) 貢生에 급제하여 江蘇省 溧陽知縣, 淮安同知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문인 묵객들과의 폭넓은 교류를 하여 많은 친구가 있었으며 그의 집에는 항상 손님들이 가득하였다고 전한다. 술과 차를 모두 좋아하였고 溧陽知縣으로 있을 때는 그곳에서 생산되는 붉은 색 돌로서 만든 茶具인 ‘曼生壺’가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陳鴻壽는 시문, 書畵, 篆刻에 고루 뛰어났으며 시집으로는 《桑連理館詩集》이 전하고 있고 그림은 산수와 화훼를 잘 그렸으며 특히 蘭竹에 뛰어났다. 篆刻은 秦漢의 印章과 西泠四家의 刻法을 익혀서 일가를 이루었으며 西泠六家, 혹은 西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印譜로는 [種楡仙館印譜]가 전하고 있으며 [西泠六家印譜]와 [西泠八家印譜]에도 작품이 실려 있다. 서예는 篆書, 隸書, 行書, 草書에 모두 능통하였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隸書에 가장 뛰어났다. 蔣寶齡의 《墨林今話》에 의하면 그는 “凡詩文書畵, 不必十分到家, 乃見天趣.”(詩文과 書畵는 최고에 이를 필요가 없으며 天趣를 나타내면 된다.)라 하여 작품의 창작에서 뛰어 나려 하는 것 보다 자신의 성정을 표현하고 즐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서예 작품도 이와 같은 기준으로 창작하여 고대의 법칙이나 다른 사람을 닮으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심미적 세계를 개척하려 하였으며 隸書의 창작에서 그와 같은 욕구를 잘 표현하였다.
이상의 碑派 서예가 이외에 前碑學期에도 여전히 帖學을 심미적 표준으로 학습하고 창작한 서예가들도 여러 명 있다. 이들은 대부분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적 성향이 강한 서예가들로 앞 시대에 유행한 趙孟頫와 董其昌의 書風을 계승하였다. 姚鼐, 錢伯坰, 張問陶, 成親王, 鐵保 등이 前碑學期의 대표적 서예가이며 그 가운데 姚鼐(1731-1815)가 가장 뛰어나며 많은 명성을 얻었다. 姚鼐는 비록 考證學을 기초로 한 碑派 서예가들이 크게 활동한 대세에 묻혀 빛을 발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수준은 매우 높았다. 그의 서예는 元明이후의 보수적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行書와 草書에 뛰어났고 문인 서예의 심미적 범주인 書卷氣를 잘 표현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4). 後碑學期(1821이후); 서예의 百花齊放
淸나라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가장 번성한 시기는 康熙, 雍正, 乾隆의 三朝이다. 134년에 걸친 이시기를 漢나라와 唐나라의 전성 시기에 비교하며 역사에서는 康雍乾시대라 부른다. 嘉慶시대를 지나 道光시대 이후의 淸나라는 정치와 경제는 물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西歐의 큰 물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내외적으로 충격을 받게 되자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반에서도 큰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咸豊, 同治, 光緖의 三朝에서는 국가가 중심이 되는 문화 사업은 거의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문화와 예술은 거의 개인적 활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업적도 높지 않았다. 그러나 서예는 다른 문예 장르와 달리 百花齊放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淸나라 시대의 대표적 학문인 樸學이 考證學, 金石學, 校勘學, 文字學 등 여러 영역에서 집대성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金石 文字를 소재로 창작하는 서예가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은 비록 당시까지 金石 文字의 심미적 특징에 관한 이론적 근거를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金石學를 연구하는 가운데 본능적으로 그 속에서 심미적 요소를 발견하여 학습하고 창작하였다. 道光 시대에 이르러 乾隆과 嘉慶시대의 대표적 考證學者인 翁方綱이 唐나라 시대의 刻石 문자에 대하여 연구한 것을 기초로 字體의 바른 사용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翁方綱에 의해 唐나라 초기의 가장 모범적 글자체로 평가받은 歐陽詢의 서체는 서예가 뿐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의 중요한 학습 대상이 되었다. 乾隆시대 이후 碑派 서예가들에 의해 학습과 창작의 대상이 되어 왔던 금석 서체가 道光시대에는 모든 사람에 의해 학습되기에 이르렀다. 그 범위도 唐碑의 楷書와 秦漢 刻石의 篆隸에서 先秦시대의 金文과 南朝시대의 刻石은 물론 미개한 민족의 서예라 평가 절하하던 北朝시대의 魏楷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론은 실천을 낳고 실천은 또 다른 이론을 낳는 것은 역사이래 모든 학문의 공통적 특징이다. 이와 같은 법칙에 순응이라도 하듯 考證學과 金石學 등 樸學의 영향과 帖學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한 碑派 서예가가 많아짐에 따라 금석 서체의 역사와 심미적 범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인 碑學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帖學으로 입문하였으나 후에 刻石의 서예를 중심으로 학습하고 창작한 揚州八怪의 鄭板橋, 高鳳翰, 金農, 汪士愼, 高翔 등과 篆刻의 영향으로 篆隸에 관심을 가지고 창작한 西泠八家의 丁敬, 蔣仁, 黃易, 陳鴻壽 등에 의해 잉태된 碑學은 서서히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考證學, 金石學, 文字學 등을 집대성한 翁方綱, 戴震, 錢大昕, 段玉裁, 桂馥, 錢坫, 孫星衍 등의 이론과 실천은 碑學이 싹트기에 매우 충분한 영양이 되었으며 그 싹은 조금씩 발아하기 시작하였다. 이 밖에 刻石 서예를 중심으로 창작한 鄧石如와 伊秉綬의 성과와 명성이 帖派 서예가들을 앞지르게 되자 자연스럽게 ‘尊碑’ 사상이 형성되었으며 결국 碑學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碑學의 이론적 선구자는 阮元이고 계승한 사람은 包世臣이며 집대성한 사람은 康有爲이다. 嘉慶과 道光 시대에 阮元은《北碑南帖論》과 《南北書派論》을 저술하여 北魏를 중심으로 한 北朝의 刻石 서예가 叢帖의 수준에 뒤지지 않는다는 이론을 세상에 발표하였고 그 뒤를 이어 包世臣은 《藝舟雙楫》를 저술하여 北碑가 南帖보다 뛰어나다는 이론을 제기하였다. 이 후 道光, 咸豊, 同治, 光緖 시대의 서예가들은 가뭄에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맞는 金石 문자를 찾아 창작하였으며 계속하여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光緖 연간에 이르러 康有爲는 《廣藝舟雙楫》을 저술하여 역대의 刻石 서예는 물론 그것을 소재로 창작한 서예가들을 극찬한 이후 碑學은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하나의 완전한 서예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碑學이 탄생하고 확립된 시기는 淸나라 시대는 물론 전체의 中國 서예사에서도 가장 찬란한 꽃을 피운 시대라 평가받고 있다. 서예가 자각 예술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 東漢시대와 魏晋 그리고 唐宋시대에도 각 서체별로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훌륭한 서예가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明나라 시대 이전까지는 아직 서예의 창작이 수준의 높고 낮음을 떠나 대부분 실용의 범위 안에서 여가의 활용에 응용되었다. 그리고 창작 대상으로서의 서체도 東漢의 隸書, 東晋의 行草, 唐나라의 楷書와 行草 등과 같이 역사적 발전 규율에 따라 당시에 유행하던 서체에 국한되어 있었다. 碑學이 탄생한 이후 서예는 완전한 예술로서의 창작 영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서체의 제약이 없이 秦漢시대의 刻石 篆隸와 南北朝와 隋唐시대의 刻石 楷書를 비롯하여 先秦시대의 石鼓文과 金文 등 존재하는 모든 문자 자료와 서체는 창작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淸나라 후기에 집중적으로 출토된 殷商시대의 甲骨文과 戰國시대의 簡牘 문자까지도 창작의 소재 서체로 응용하여 碑學은 명실공히 창작의 황금기를 탄생시켰다고 평가 할 수 있다.
吳熙載(1799-1870)는 江蘇省 儀徵 사람으로 원래 이름이 廷颺이고 字가 熙載이며 讓之, 晩學居士, 言庵, 師愼軒 등의 雅號와 堂號를 사용하였다. 咸豊 연간 이후 字를 이름 대신 사용하였고 또 同治帝의 이름인 載淳의 ‘載’자를 피하기 위해 64세 이후 號인 讓之를 대신 사용하였다. 그는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書畵와 篆刻으로 직업으로 삼았다. 그림은 山水와 花卉를 즐겨 그렸으며 篆刻은 鄧石如의 刻法을 배워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현재까지 [師愼軒印譜], [吳讓之印譜] 등이 전하고 있다. 그는 또한 漢魏와 南北朝시대 刻石의 감정에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吳熙載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鄧石如의 입실 제자로 서예의 이론과 필법을 배웠다. 그는 包世臣의 제자 가운데 스승의 이론을 가장 성실히 배워 자신의 書風을 개척한 서예가로 평가받고 있다. 包世臣도 《藝舟雙楫》에서 “足下資性卓絶, 而自力不倦. 自能悟入單微, 故以相授.”(吳熙載는 자질과 천성이 뛰어나며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다. 스스로 능히 오묘함을 깨닫고 실천하기 때문에 傳授할 수 있다.)라 하여 吳熙載은 천부적 자질이 뛰어날 뿐 아니라 각고의 노력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包世臣이 서예의 필법과 창작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한 ‘逆入平出’, ‘奇巒’ 등의 문제를 吳熙載와 함께 토론한 것을 《藝舟雙楫․答熙載九問》에 기록한 것으로도 그가 얼마나 吳熙載를 높이 평가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吳熙載는 篆刻에서도 鄧石如를 계승하여 자신의 印風을 수립하였으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漢印의 摹刻으로 입문하여 자형을 익혔고 鄧石如의 篆刻에 심취하여 그의 精髓를 체득하였다고 평가받았다. 특히 그는 [天發神讖碑]를 연마하며 체득한 篆書의 필획을 印文에 그대로 응용하여 運刀의 맛과 運筆의 맛을 조화롭게 응용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邊款에서도 行書와 草書의 필획을 그대로 응용하여 부드러운 정취를 표현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印文과 邊款의 刀法과 章法은 이전의 篆刻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독창적인 기법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趙之謙, 吳昌碩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曾國藩(1811-1872)은 湖南省 湘鄕 사람으로 字는 伯涵이고 號는 滌生이라 하였다. 道光 18년(1838) 進士에 급제하여 翰林院檢討, 侍講, 侍讀, 內閣學士 및 侍郞을 거쳐 大學士에 올랐고 一等毅勇侯에 봉하여 졌다. 咸豊 2년(1852)에는 군대를 조직해 太平天國의 난을 진압하기도 하였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文正의 諡號를 받았다. 그는 정치가와 군사가이며 동시에 학자와 서예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曾國藩은 翰林院과 황제의 곁에서 관직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전통의 帖學과 館閣體에 기초를 두고 서예를 학습하고 창작하였다. 당시 書壇의 전체적 흐름은 금석 문자를 중심으로 한 碑學이 대세를 형성하였으나 科擧 시험이나 정부의 문서 그리고 개인의 서신과 저술에는 여전히 전통의 帖學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科擧를 치르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帖學의 심미적 표준에 맞는 서체를 연마하여야 했으며 그 후에 翰林院 등 조정의 내부에서 학문이나 문자와 관련이 많은 직책에 근무 한 사람은 여전히 帖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曾國藩이 바로 이와 같은 부류의 대표적 서예가이다. 그는 帖派의 필수 서체인 館閣體 楷書는 기본적으로 구사하였고 行書와 草書에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이전의 帖派 서예가와 달리 당시에 유행하던 篆書와 隸書도 열심히 연마하였으며 특히 鄧石如의 篆書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碑學이 성행하던 시기에 帖學으로 학습하여 명성을 얻은 사람은 많지 않으나 그 대표적 인물로 曾國藩 이외에 翁同龢가 있다.
張裕釗(1824-1894)는 湖北省 武昌 사람으로 字는 廉卿이고 號는 廉亭과 濂亭을 사용하였다. 道光 26년(1846) 鄕試를 통과하여 內閣中書를 거쳐 江寧書院, 湖北書院, 保定書院 등의 관리관을 지냈다. 曾國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훈고학, 音義學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고대의 文辭에 뛰어나 마지막 桐城派라 불렸다. 曾國藩의 제자인 黎庶昌, 吳汝綸, 薛福成과 함께 ‘曾門四弟子’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저서로는 《今文尙書考證》과 《濂亭文集》이 전하고 있다. 張裕釗의 서예는 魏碑를 기초로 하였으며 楷書와 隸書의 필획을 중심으로 쓴 行書가 가장 뛰어나다. 그는 碑學이 탄생하고 성행한 이래 처음으로 北朝시대의 楷書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창작하였으며 또 行書에도 응용한 서예가이다. 따라서 康有爲는 《廣藝舟雙楫》에서 張裕釗의 서예를 經學의 戴震, 騈儷文의 胡天游, 산문의 龔自珍과 비교하여 하나의 영역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또 “本朝書四家, 皆集大成以爲楷. 集分書之成, 伊汀洲也; 集隸書之成, 鄧頑伯也; 集帖學之成, 劉石庵也, 集碑學之成, 張廉卿也.”(淸나라 서예의 四大家는 모두가 한가지 서체를 集大成 한 것으로 모범이 되었다. 八分은 伊秉綬, 隸書는 鄧石如, 帖學은 劉墉, 碑學을 집대성 한 사람은 張裕釗이다)라 하여 張裕釗를 北魏시대의 서예를 중심으로 하는 碑學의 集大成者라 평가하였다.
楊守敬(1839-1915)은 湖北省 宜都 사람으로 字는 省吾이고 號는 鄰蘇이다. 상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同治 원년(1862)에 鄕試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會試에 몇 번 참가하였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理學에 심취한 동시에 金石學, 文字學, 지리학, 서예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서예의 창작 및 金石의 수장과 감상에도 매우 뛰어났다. 《日本訪書誌》, 《叢書擧要》, 《寰宇貞石圖》, 《學書邇言》, 《留眞譜》, 《壬癸金石跋》, 《平碑記》, 《平帖記》 등 金石學과 서예학 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겨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光緖 6년(1880)에 일만 점이 넘는 碑刻의 拓本과 法帖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서예 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다. 楊守敬의 渡日은 일본에서도 碑學이 성행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 서예의 새로운 시대가 개척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光緖 10년 모친의 병환으로 4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이후에는 黃州 부근에서 살았다. 黃州는 蘇軾의 東坡雪堂이 있었기 때문에 鄰蘇老人이라는 號를 지어 사용하였으며 金石學, 지리학, 서예학 방면의 저술과 서예의 창작에 전념하였다. 일본의 서예에 끼친 영향으로 1911년 辛亥革命 이후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그를 찾아와 작품을 구하였고 또 題跋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楊守敬의 작품은 中國 뿐 아니라 일본에도 많이 전하게 되었다.
楊守敬은 篆隸楷行草의 모든 서체에 능통하였으며 碑學의 이론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서예의 학습과 창작에서는 碑와 帖을 혼용하여 자신의 書風을 개척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서예의 창작에서 篆書는 秦篆의 書風을 표현하였고 隸書는 漢隸를 기초로 하였으나 淸나라 시대 명가의 書風을 많이 취하였다. 楷書와 行草는 魏晋시대의 刻帖과 南北朝시대의 刻碑 書風을 고루 취하였기 때문에 다른 碑派 서예가보다는 帖派의 書風이 많이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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