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思開/書畵理論

[스크랩] 청나라 시대 서예 개황 2

멍석- meongseog 2009. 4. 7. 14:05

2). 後帖學期(1723-1795); 金石學과 서예의 만남

康熙帝의 뒤를 이은 世宗인 雍正帝는 만주족 통치의 淸나라 정권의 보전을 위하여 가혹한 獨裁政治를 실행하였다. 지식인들의 정치적 사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禁書를 정하고 여러 차례 文字獄을 일으켰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학문의 방향을 정치적 사상과 무관한 考證學쪽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考證學은 順治와 康熙 연간에 顧炎武, 黃宗羲, 王夫之 등에 의해 제창된 학문으로 그 연구는 문자를 통하여 經史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을 우선한다. 따라서 이 때부터 史料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청동기와 刻碑들을 대규모로 발굴하고 수집하게 되었다. 금석 문자의 내용에 관한 연구는 학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문자의 형식과 심미적 특징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嘉慶 연간 이후에 성행하는 碑學은 이와 같은 考證學의 성행에서 그 싹을 틔우고 있다.

서예사적으로 雍正의 짧은 시대는 帖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도기이다. 康熙 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董其昌의 書風이 주류를 형성하였으나 점차 趙孟頫의 서예로 눈을 돌리는 서예가가 많아 졌다. 雍正의 뒤를 이은 乾隆帝는 내부적으로는 雍正 시대에 실시한 사상의 통제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대외적으로는 영토를 확장하여 淸나라 황실을 굳건히 하고 국력을 배양하는 데 전력하였다. 그는 또 祖父인 康熙帝의 문화 사업을 찬양하였으며 자신도 康熙帝를 배워서 도서의 편찬 사업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특출한 것은 中國 최대의 문화 사업으로 불리는《四庫全書》의 편찬 사업이다. 《四庫全書》는 15년에 걸쳐 당시까지 전하고 있던 3457종, 약 7만 9천 권의 도서를 수집하여 經史子集의 四部로 나누어 편찬한 도서의 집대성으로 乾隆 46년(1781)에 완성하였다. 이 거대한 편찬 사업에는 당대의 대표적 학자 360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모두 일곱 질의 正本과 한 부의 副本을 제작하여 황궁 안의 文淵閣을 포함한 전국으로 일곱 곳에 소장하였으며 副本은 翰林院에 보관하였다. 또한 《四庫全書總目題要》200권을 편찬하여 《四庫全書》에 수록된 서적을 포함하여 약 만 종의 도서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였다.

《四庫全書》의 편찬 사업은 당시의 사상계와 학계 그리고 서예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도서의 수집과 정리 과정에서 滿洲族에 불리한 것이나 반만 사상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은 태워 버리거나 수정하게 하고 禁書를 지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반항이 일어나게 되었고 다시 몇 번의 文字獄이 발생하여 학문과 사상의 범위는 축소되었고 樸學은 더욱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한 질의 서적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서체의 통일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四庫全書》의 편찬에 참가한 수많은 학자 뿐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심미적 표준이 생겨나게 되었다. 乾隆帝는 王羲之의 서예와 元나라 시대 趙孟頫의 서예를 좋아하였다. 또한 淸末에서 근대를 살다간 서학자인 馬宗霍이 《霋嶽樓筆談》에서 乾隆帝의 서예를 “圓潤秀發, 盖仿松雪.”(원만하고 윤택하며 수려한 것은 대체로 松雪體를 모방하였다.)이라 한 것처럼 그는 趙孟頫의 서체를 배워서 자신의 書風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四庫全書》를 편찬하는 학자들은 乾隆帝의 뜻을 따라 松雪體를 표준으로 서체를 통일하게 되었다. 그 후 趙孟頫의 松雪體는 董其昌의 書風을 제치고 다시 서단의 중심 書風으로 대두하였다.

乾隆 시대에는《四庫全書》을 포함하여 역사, 과학, 지리 등 많은 영역의 편찬 사업 이외에 서예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사업도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法帖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刻帖을 제작한 것이다. 乾隆帝는 王羲之의 [快雪時晴帖], 王獻之의 [中秋帖], 王珣의 [伯遠帖]을 특별히 좋아하여 ‘三希’라 이름하고 궁중에 ‘三希堂’을 지어 寶藏하며 수시로 감상하였다. 당시 三希堂에 소장된 서예 작품은 이상의 명품 이외에도 수만 점이 있었다. 乾隆 12년(1747)에는 梁詩正과 汪由敦 등으로 하여금 三希堂에 소장된 작품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宋나라 시대의 [淳化閣帖]에 필적할 만한 [三希堂法帖]을 제작하게 하였다. 또한 궁중에 소장된 역대의 臨摹本 [蘭亭序] 일곱 종과 乾隆帝 자신이 臨書한 한 점을 합쳐 [蘭亭八柱帖]을 제작하였다. 이 밖에도 [三希堂法帖]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을 모아 [墨妙軒法帖]을 제작하였고 書畵 작품을 수록하고 평론을 실은 [石渠寶笈]을 편찬하였으며 乾隆 35년(1770)에는 [淳化閣帖]에 釋文을 단 [欽定重刻淳化閣帖]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刻帖의 제작 사업은 乾隆帝가 서예를 매우 좋아하였던 것과 康熙帝를 숭배하여 정치적 지주로 삼았던 까닭 등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四庫全書》등 많은 도서의 편찬과 여러 刻帖의 제작 사업은 서예의 학습, 창작과 감상의 심미적 표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도서의 편찬 사업에 참가한 학자들은 乾隆帝의 뜻에 따라 趙孟頫의 書風으로 통일하여 역대의 서적을 필사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趙孟頫의 서예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으며 松雪體는 그들의 심미적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東晋시대 이후 王羲之의 서예는 모든 왕조에서 서예의 표준이 되었으며 가장 정통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帖學이 생겨난 이래 刻帖의 제작은 王羲之의 서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王羲之의 書風은 곧 帖學의 심미적 표준이 되었다. 乾隆시대에 이루어진 刻帖의 제작도 역대 왕조에서와 같이 王羲之의 서예를 중심으로 하였다. 또한 王羲之의 [快雪時晴帖], 王獻之의 [中秋帖], 王珣의 [伯遠帖]을 ‘三希’라 하여 寶藏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乾隆帝는 唐太宗, 宋太宗과 마찬가지로 王羲之 서예와 그 書風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나 淸나라 시대에는 이미 王羲之의 眞蹟을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乾隆帝를 포함한 서예가들은 摹本이나 刻帖의 감상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東晋시대 이후 王羲之의 書風으로 가장 유명하였으며 元나라의 王羲之라 불리는 趙孟頫의 서예를 감상하고 배움으로서 구할 수 없는 王羲之 서예를 대신하려 하였다. 한 시대의 심미적 표준이 바뀜에 따라 서예가들은 康熙시대 이후 유행한 董其昌의 서예에서 부족함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표준에 맞는 趙孟頫의 서예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康熙시대 이후 董其昌의 서예를 심미적 표준으로 하다가 趙孟頫의 松雪體를 심미적 표준으로 한 乾隆시대를 後帖學期라 부를 수 있다. 이 시기에 帖學을 중심 사상으로 학습하고 창작한 서예가로는 王澍, 張照, 汪由敦, 周于禮, 錢灃, 王文治, 劉墉, 梁同書, 梁巘, 翁方綱 등이 있으며 이들을 後帖學派라 이름할 수 있다. 이상의 帖學派 서예가 가운데 王澍는 前帖學期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론과 창작으로 碑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서예가이며 王文治, 劉墉, 梁同書는 후대의 前碑學期에 碑學派들과 대립하며 帖學의 영향을 끼친 서예가이다. 특히 劉墉은 淸나라 帖學을 집대성한 서예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翁方綱은 帖學을 중심으로 학습하고 창작하다가 말년에 唐나라 시대의 刻石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 서예가로 평가받고 있다.

王澍(1668-1743)는 江蘇省 金壇 사람이나 후에 無錫으로 옮겨 살았다. 字는 若霖(篛林, 若林으로 쓰기도 하였음)과 靈舟를 사용하였고 虛舟, 竹雲, 二泉寓客, 良常山人, 恭壽老人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康熙 51년(1712) 45세의 늦은 나이로 進士에 급제하여 庶吉士를 제수 받았으며 戶部給事中에 올랐다. 특히 篆書에 정통하여 五經篆文館總裁官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雍正 원년(1723)에는 吏部員外郞에 올랐다. 王澍는 歐陽詢과 褚遂良의 楷書와 董其昌의 行書를 집중적으로 배웠을 뿐 아니라 고대의 비첩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楷書와 行草는 물론 篆隸에도 뛰어났다. 특히 篆書는 秦나라 시대 李斯의 필법을 배워 당대의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왼쪽 눈을 실명하여 고금의 비석과 法帖 그리고 작품을 감정하고 평론을 하는 등 서예의 이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淳化閣帖考證》, 《古今法帖考》, 《竹雲題跋》, 《虛舟題跋》, 《論書賸語》, 《朱子讀書法》 등 많은 저작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서예 이론의 저술은 후대의 서예 이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또 王澍는 비록 帖學을 부정한 碑學派 서예가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과 이론은 후대 碑派의 서예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碑學이 성행하고 碑派의 서예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고 평가된다.

張照(1691-1745)는 江蘇省 華亭(지금의 上海 松江) 사람으로 字는 得天과 長卿을 사용하였고 涇南, 梧囱, 天甁居士, 天甁齋, 法華庵, 南華山人 등 많은 雅號와 堂號를 사용하였다. 康熙 48년(1709)에 19세의 나이에 進士에 급제하여 內閣學士, 刑部左侍郞, 左都御史 등을 거쳐 刑部尙書에까지 올랐다. 乾隆 10년(1745) 아버지의 喪을 당하여 돌아가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太子太保에 봉해지고 文敏의 詩號가 내려졌다. 張照는 학문과 詩文 뿐 아니라 書畵와 음악 등 문예의 모든 방면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飮酒와 歌舞를 좋아하는 등 풍류를 무척 즐겼다고 전하고 있다. 서예는 董其昌으로 입문하여 顔眞卿과 米芾을 배워 楷書와 行草에 가장 뛰어났고 특히 扁額의 큰 글씨는 당대 제일로 평가받았다. 康熙, 雍正, 乾隆 등 세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御製의 題跋이나 扁額은 대부분 張照에 의해 쓰여졌다고 한다. 康熙帝는 張照의 서예를 칭찬하는 詩에서 “書有米之雄, 而無米之略. 復有董之整, 而無董之弱. 羲之後一人, 舍照誰能若.”(서예에 米芾의 웅장함은 있으나 날카로움은 없고, 董其昌의 방정함은 있으나 연약함은 없다. 王羲之 이후 한 사람으로 張照를 버리고서 누구를 이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이라 하여 그의 서예는 米芾과 董其昌의 장점을 취하여 웅장하면서도 방정하다고 평가하였다.

王文治(1730-1802)는 江蘇省 丹徒 사람으로 字는 禹卿이고 號는 夢樓라 하였다. 乾隆 35년(1770)에 進士에 급제하여 翰林院編修와 侍講으로 관직에 나갔다. 후에 雲南臨安知府로 나갔다가 관직을 사퇴하고 평생 문인 묵객들과 교류하면서 지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詩文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袁枚와 함께 큰 명성을 얻었다. 시집으로는 《夢樓詩集》과 서예 이론 저작인 《快雨堂題跋》을 남기고 있다. 서예는 褚遂良의 楷書와 王羲之, 米芾, 張卽之, 趙孟頫, 董其昌 등의 行書를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王文治는 劉墉, 梁同書와 더불어 帖學의 중심 인물로 帖學派 서학자들로부터는 극찬을 받은 반면 碑學派로부터는 기운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梁同書(1723-1815)는 浙江省 錢塘(지금의 杭州) 사람으로 字는 元穎이라 하였으며 號는 山舟, 不翁, 등을 사용하였고 90세 이후에는 新吾長翁을 사용하였다. 그는 문학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大學士를 지낸 梁詩正(1697-1763)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서예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12세에 이미 扁額의 글씨를 썼다고 한다. 乾隆 17년(1752)에 會試에 응시하여 及第하지 못하였으나 특별히 進士에 봉해져 翰林院侍講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는 서예의 감상과 비평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어 서예 이론 저술인 《頻羅庵論書》, 《頻羅庵書畵跋》등을 남기고 있다. 梁同書는 顔眞卿과 柳公權의 필법으로 입문하여 중년 이후에는 米芾과 趙孟頫의 서예를 배웠다. 楷書와 行書에 가장 뛰어났으며 특히 老年에도 小楷를 매우 잘 썼다고 평가받고 있다. 당기 劉墉, 王文治와 함께 帖學의 三大家로 평가받았으며 梁國治, 梁巘과 함께 ‘三梁’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淸나라 시대의 吳修가 《昭代尺牘小傳》에서 “山舟書出於顔柳米董, 自立一家, 負盛名六十年, 所書碑版遍環宇.”(梁同書의 서예는 顔眞卿, 柳公權, 米芾, 董其昌을 배워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60년간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작품은 전세계로 두루 퍼져 나갔다.)라 한 것 같이 그의 서예는 당시의 朝鮮, 日本, 臺灣 등 주변 국가에서도 큰 명성을 얻었다.

翁方綱(1733-1818)은 順天 大興(지금의 北京) 사람으로 字는 正三이고 號는 覃谿와 蘇齋를 사용하였다. 15세에 鄕試를 통과하여 乾隆 17년(1752) 20세에 進士에 급제하여 編修, 侍講, 侍讀學士, 國子監司業, 四庫全書纂修官兼內閣學士, 鴻臚寺卿 등 주로 학문과 관련이 깊은 관직을 지냈다. 그는 經史와 문학 그리고 金石學과 서예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石州詩話》, 《小石帆亭著錄》, 《兩漢金石記》, 《粤東金石略》, 《蘇米齋蘭亭考》, 《蘇米齋唐碑選》등 많은 저술을 하여 탁월한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兩漢시대부터 宋나라 시대까지의 금석과 刻帖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하여 《漢八分考》, 《化度寺碑考》, 《孔子廟堂碑考》, 《天際烏雲帖考》등 수많은 문장을 남겼다. 이와 같은 업적은 明末淸初의 顧炎武을 鼻祖로 하는 金石學이 翁方綱에 이르러 그 꽃을 활짝 피웠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朝鮮의 金正喜를 통하여 한국의 金石學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翁方綱은 王羲之를 중심으로 한 刻帖과 趙孟頫, 董其昌 등의 서예로 입문하였고 후에 歐陽修, 虞世南, 顔眞卿 등 唐나라 시대의 楷書에서 得筆하였다. 그는 楷書와 行書에 가장 뛰어났으며 특히 小楷는 館閣體의 통일되고 고운 심미적 특징에서 벗어나 강건하면서도 질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翁方綱이 비록 唐나라 시대의 楷書를 많이 학습하였으나 그 기초는 帖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의 劉墉, 王文治, 梁同書와 함께 帖學의 四大家로 불려 帖學派 서학자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金石學과 서예학의 업적으로 후대에 이론적 기초로 삼은 碑學派 서예가로부터도 호평을 받았을 뿐 아니라 碑派의 서예가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을 근거로 할 때 翁方綱의 서예가 비록 王文治, 梁同書, 梁巘 등 帖派의 書風과 달리 질박한 맛이 있으나 전체적 심미적 특징은 유연하고 수려하다. 따라서 그가 비록 金石學에 조예가 깊었고 唐나라 시대의 서예를 배웠다고 하지만 帖學의 심미적 범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를 碑派의 서예가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碑派의 실천적 선구자라 할 수 있는 鄧石如의 서예를 용납하지 못하고 강하게 부정한 것으로 볼 때 비평의 심미적 기준도 碑學과는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錢灃(1740-1795)은 雲南省 昆明 사람으로 字는 東注이고 號는 南園이다. 乾隆 36년(1771) 進士에 급제하여 通政使參議, 太常寺少卿, 湖南學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시문과 書畵에 모두 뛰어났고 성품이 곧았으며 직언으로 朝野에 유명하였다고 한다. 서예는 당시에 유행하던 王羲之와 趙孟頫의 서체를 배웠으나 후에 歐陽詢, 褚遂良, 顔眞卿의 서예를 중점적으로 연마하였다. 楷書와 行書에 가장 뛰어났으며 특히 顔眞卿의 楷書는 宋나라 시대 이후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다.

雍正시대의 과도기를 지난 乾隆시대를 後帖學期라 할 수 있지만 이 시기에는 또 碑學이 탄생할 수 있는 싹을 잉태하고 있는 또 다른 과도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순수하게 帖學을 중심으로 학습하고 창작한 帖派의 업적 이외에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揚州八怪와 西泠四家의 활동을 들 수 있다. 揚州八怪는 江蘇省 揚州(지금의 江都縣)를 중심으로 활동한 書畵家들로 金農, 鄭燮, 李鱓, 羅聘, 李方膺, 黃愼, 汪士愼, 高鳳翰(혹은 高翔)을 가리킨다. 이들은 고대의 법칙을 거부하고 자기의 뜻이 움직이는 데로 창작하여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의 정치에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또한 이들은 吳門書派나 華亭書派와 달리 서로의 영향을 많이 받거나 같은 고향의 집단을 이루었던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書畵의 한 파로 분류하지 않는다. 다만 揚州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지명을 사용하고 괴이한 특징을 들어 揚州八怪라 부르고 있다. 揚州八怪는 서예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모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특히 서예는 당시에 유행하던 帖學의 형태와 심미적 범주로 창작하지 않고 篆書, 隸書, 狂草 등에서 자신들의 심미적 요구에 부합하는 것을 찾아내어 창작하였다. 그러나 옛 법칙을 닮으려 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심미적 세계를 개척하려 한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 가운데 자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金農과 鄭燮이다.

西泠四家는 丁敬, 蔣仁, 黃易, 奚岡으로 浙江省 杭州를 중심으로 활동한 서예가들이다. 이들은 특히 篆刻에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있으며 淸나라 후기와 民國시대의 篆刻 예술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西泠四家의 영향으로 杭州를 중심으로 한 남방은 篆刻 예술이 크게 성행하였다. 西泠四家를 포함하여 西泠八家라 불리는 陳豫鍾, 陳鴻壽, 趙之琛, 錢松를 배출하였으며 西泠印社를 탄생하게 하여 篆刻 이론과 창작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굳게 다졌다.

丁敬(1695-1765)은 浙江省 錢塘(지금의 杭州) 사람으로 字는 敬身이고 鈍丁, 龍泓山人, 孤雲石叟, 硯林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그는 작은 양조장을 경영하면서 평생 書畵와 篆刻 그리고 金石文字의 연구에 전력하였다. 서예는 楷書와 行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武林金石錄》, 《硯林集拾遺》, 《龍泓山館詩鈔》를 남겼다. 丁敬은 篆刻에 특별히 뛰어나 새로운 印派인 浙派의 鼻祖가 되었다. 당시 印壇에는 明나라 후기 蘇宣과 何震을 鼻祖로 하는 徽派가 유행하여 기교적인 刻法을 추구하고 있었다. 丁敬은 기교와 꾸밈이 많은 徽派의 印風을 반대하고 漢印으로의 복고를 주장하며 질박하고 雄健한 刻風을 추구하였다. 이후 蔣仁, 黃易, 奚岡 등 西泠四家가 그를 따랐으며 浙派의 선구자로 존중되었다. 丁敬은 [龍泓山人印譜], [硯林印款] 등의 印譜를 남기고 있으며 그의 篆刻은 [西泠四家印譜], [西泠六家印譜], [西泠八家印譜] 등에 수록되었다.

蔣仁(1743-1795)은 浙江省 仁和 사람으로 初名은 蔣泰이었으나 ‘蔣仁之印’이라 鑄刻되어 있는 古銅印을 收藏하고부터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한다. 字는 階平이고 山堂, 吉羅居士, 女牀山民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그는 詩書畵와 篆刻에 심취하여 평생을 보냈으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료들을 매우 싫어하였다고 전한다. 王羲之와 米芾의 서예를 중심으로 배워 필법을 터득하였고 후에 顔眞卿, 孫過庭, 楊凝式 등의 書風을 흡수하여 行書와 草書를 잘 썼다. 특히 篆刻의 邊關에 顔眞卿의 楷書를 응용한 것이 이색적이다. 篆刻은 고향의 선배인 정경을 추종하여 徽派의 刻法을 버리고 漢印을 중심으로 학습하였다. 현재 [吉羅居士印譜]가 전하고 있으며 [西泠八家印譜]에도 篆刻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黃易(1744-1802)는 浙江省 錢塘 사람으로 字는 大易이고 小松, 秋盦, 秋庵, 秋影庵主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경제적으로 그리 부유하지 않은 가정 형편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詩文과 서예 그리고 篆刻에 매우 열중하였다고 전한다. 山東兗州府同知 등의 관직을 지내면서 틈만 있으면 각지를 돌아다니며 옛 刻石과 鍾鼎을 수집하고 拓本을 Em는 등 정리하여 《得碑十二圖》, 《小蓬萊閣金石目》, 《嵩洛訪碑目記》, 《武林訪碑錄》등 金石學의 저서를 남겼다. 乾隆 51년(1786)에는 山東의 嘉祥에서 武梁祠畵像을 발견하여 그 자리에 武氏祠堂을 건립하고 畵像을 보관하기도 하였으며 [漢石經], [範式碑], [三公山碑]를 찾아내어 세상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漢魏시대의 刻碑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방면에는 남다른 성과를 올렸으며 金石學과 碑學이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서예는 先秦시대의 [石鼓文]과 漢魏의 隸書를 배웠으며 隸書에 가장 뛰어났다. 蔣寶齡은 《墨林今話》에서 “精隸書, 尤得古法.”(隸書에 뛰어났으며 특히 옛 묘법을 얻었다.)이라 하였고 方朔은 《枕經堂題跋》에서 “小松司馬大隸書摹[校官碑額], 小隸有似[武梁祠題字].”(黃易의 큰 隸書는 [校官碑額]을 배웠고 작은 隸書는 [武梁祠題字]와 닮았다.)라 하여 黃易이 漢魏의 隸書를 배워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하였다. 篆刻은 丁敬을 배웠으나 스승보다 뛰어나 靑出於藍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漢印과 漢魏시대 刻石 篆書의 筆意를 흡수하여 웅장하면서도 질박한 刻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丁黃印譜]와 [秋景庵主印譜]가 전하고 있으며 [西泠八家印譜]에도 篆刻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奚岡(1746-1803)은 安徽省 歙縣 사람이었으나 浙江省 錢塘에서 살았다. 初名은 奚鋼이었고 字는 純章이며 鐵生, 夢龕, 鶴渚生, 蒙泉外史. 蒙道士, 散木居士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詩詞와 書畵 그리고 篆刻에 능통하여 ‘四絶’이라 불렸으며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작품의 창작과 풍류로 생활하였다. 蔣仁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여 권세와 부귀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였고 그들의 작품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여 취하기가 일쑤였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 미친것 같아 ‘酒狂’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아들과 딸을 잃고 집을 불질러 버렸으며 모친이 세상을 버린 후에는 절망과 고통 그리고 빈곤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四絶’ 가운데 회화와 篆刻에 가장 뛰어났다. 그림은 董其昌과 惲壽平의 화훼를 배웠고 서예는 漢隸를 배워 隸書를 가장 많이 창작하였다. 篆刻은 丁敬을 배웠고 陳鴻壽와 깊은 교류를 하여 예스럽고 질박한 刻風으로 창작하였다. 현재 [蒙泉外史印譜]가 전하고 있으며 [西泠六家印譜]와 [西泠八家印譜]에도 篆刻 작품이 실려 있다.

3). 前碑學期(1796-1820); 碑派 서예가의 활약

淸나라 초기 顧炎武에 의해 시작된 考證學은 朱彝尊과 黃易 등의 계승과 발전에 의해 하나의 학문 영역으로 뿌리를 내렸다. 考證學은 經史의 校勘과 연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金石學, 文字學, 서예학 등의 학문을 크게 발전시켰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산과 들에 버려져 있던 고대의 金石들이 가장 중요한 학문적 자료로 인식됨에 따라 명문의 내용은 물론 서체도 깊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考證學, 金石學, 文字學을 연구하는 사람은 모두 당시의 뛰어난 학자일 뿐 아니라 서예가였다. 따라서 그들은 고대의 金石文字를 통하여 刻帖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심미적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고 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雍正과 乾隆시대 帖學의 주도 아래에서 지역적 특성을 띤 揚州八怪와 西泠四家에 의해 학습되고 창작된 金石 文字의 書風은 嘉慶시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당시의 서예가들은 刻帖을 중심으로 학습하는 帖學의 전통을 거부하고 先秦시대의 金石 文字는 물론 漢魏와 晋唐의 刻石 문자를 중심으로 학습하여 새로운 書藝學인 碑學이 탄생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乾隆시대의 서예는 여전히 帖學이 주도하였으나 금석 문자의 書風으로 학습하고 창작하는 서예가들이 많이 활동하였으며 嘉慶시대는 考證學의 영향으로 첩이 점차 쇠퇴하고 碑學이 탄생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乾隆과 嘉慶시대는 帖學과 碑學의 교차되는 과도기적 시기이며 淸나라 전체 서예사의 중기로 평가할 수 있다. 嘉慶시대를 거치면서 서단에서는 碑派 서예가가 점차 帖派를 밀어내고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이 시대는 考證學이 학문적 중심이 된 것 이외에 정치와 사회적 배경도 碑學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뒷받침이 되었다. 康熙와 乾隆시대의 치적으로 만주족의 통치를 굳건히 다진 淸나라는 더 이상 雍正과 乾隆시대와 같이 지식인들을 탄압할 필요가 없었으며 文字獄 같은 옥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학문과 사상의 연구가 이전에 비해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시대적 철학으로 자리잡은 樸學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王昶, 錢大昕, 翁方綱과 같은 학자가 金石學에서 뛰어난 저작을 남기게 되었으며 道光시대에 서예학의 새로운 이론인 碑學이 탄생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 밖에 碑學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서예의 내부적 배경으로는 帖學을 기준으로 한 학습과 창작을 거부한 초기 碑派 서예가의 업적을 들 수 있다. 揚州八怪와 西泠四家 그리고 鄧石如, 伊秉綬 등 碑派의 서예가들이 篆隸를 중심으로 한 창작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둠에 따라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鍾繇와 王羲之를 근본으로 趙孟頫와 董其昌의 수려한 書風을 추종하는 帖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碑學의 대세에 밀려 빛을 발하지는 못하였지만 帖學은 꾸준히 전통을 계승하며 淸나라 서예의 기초로 자리 잡고 있었다.

乾隆의 후기와 嘉慶시대에 중점적으로 활동한 서예가는 대부분 帖學을 기초로 서예에 입문하였으나 金石學의 성행과 함께 금석 문자로 눈을 돌려 창작하였다. 그들은 碑學이 아직 완전한 서예학의 이론과 사상으로 자리잡기 이전에 금석 문자로 학습하고 그 심미적 특징을 표현하였다. 이 시대의 碑派 서예가로는 畢沅, 錢大昕, 桂馥, 鄧石如, 錢坫, 王昶, 洪亮吉, 陳豫鍾, 伊秉綬, 段玉裁, 孫星衍 등이 많은 명성을 얻었다.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서예가는 鄧石如이고 이밖에 桂馥, 伊秉綬, 孫星衍, 陳鴻壽 등이 서예의 창작에서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였거나 金石學과 文字學 그리고 서예 이론과 篆刻 등의 영역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서예가이다.

桂馥(1736-1805)은 山東省 曲阜 사람으로 字는 冬卉이고 未谷, 雩門, 蕭然山外史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乾隆 55년(1790) 55세의 늦은 나이에 進士에 급제하여 雲南省 永平縣知縣를 지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금석문의 고증과 文字學에 심취하였으며 翁方綱과 교류하며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고 전한다. 許愼의 《說文解字》에 정통하여 《說文解字義證》을 저술하였고 이 밖에도 金石學과 文字學의 저술인 《繆篆分韻》, 《續三十五擧》와 《晩學集》, 《淸朝隸品》, 《詩集》, 《後四聲猿雜劇》등 여러 편의 시문집을 남기고 있다. 그는 《說文解字》를 연구한 업적으로 段玉裁, 王筠, 朱駿聲과 더불어 ‘說文四大家’라 불리기도 한다. 桂馥은 漢隸를 집중적으로 학습하여 당대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당시의 張維屛은 《松軒隨筆》에서 “百餘年來, 論天下八分, 推桂未谷第一.”(百年 이래로 八分을 논할 때는 桂馥을 제일로 친다.)이라 하였고 趙光은 《退庵隨筆》에서 “未谷能縮漢隸而小之, 愈小愈精.”(桂馥은 漢隸를 축소하여 작게 쓰는 데 능숙했으며 작을 수록 뛰어났다.)이라 하여 桂馥은 당대 제일의 漢隸 서예가이며 작은 隸書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桂馥과 더불어 당시 漢隸의 書風으로 창작 활동을 한 서예가인 伊秉綬, 陳鴻壽, 黃易은 ‘漢隸四大家’로 불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桂馥은 다른 세 사람에 비해 변화를 적게 추구하고 漢隸의 근본 필획과 자형에 충실한 것이 특징이다.

伊秉綬(1754-1815)는 福建省 汀州 寧化縣 사람으로 字는 組似이고 號를 墨卿이라 하였으며 晩年에 墨庵으로 바꾸었다. 어릴 때부터 程朱學으로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 伊朝棟(1729-1807)으로부터 程朱學과 서예를 배웠다. 또 同鄕인 대학자 雷鋐의 문하에 입문하여 程朱學을 배웠으며 그것으로 생활은 물론 예술 사상의 지주로 삼았다. 乾隆 54년(1789) 進士에 급제하여 刑部主事, 遷員外郞을 거쳐 惠州知府와 揚州知府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중앙에서 작은 관직에 몸담고 있을 때부터 학문과 인품으로 명성이 높았다. 《孟子正義》를 저술한 焦循은 “公起居言笑藹然君子儒也.”(公은 말씀과 행동이 모두 君子와 같다.)라 칭찬하였으며 四庫全書總裁官을 지낸 紀昀(1724-1805)은 伊秉綬의 학문과 인품을 신임하여 손자의 교육을 맡기기도 하였다. 惠州의 知府로 있을 때에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나 善政을 베풀고 청렴한 생활을 한 그를 존경하는 백성들에 의해 곧 풀려났다. 揚州에서 知府로 있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백성들은 歐陽修, 蘇軾, 王士禎을 모시고 있는 ‘三賢祠’에 그를 모시고 ‘四賢祠’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伊秉綬는 詩文과 書畵에 고루 뛰어났으며 자신의 작품에는 스스로 印章을 새겨서 찍을 만큼 篆刻에도 관심이 많았다. 서예는 隸書와 行草에 뛰어났으며 특히 隸書는 淸나라 시대의 隸書 수준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篆書의 필법으로 隸書를 썼으며 漢隸의 필법을 楷書와 行草에 응용하였기 때문에 자형과 필획이 매우 독특하다. 包世臣은 《藝舟雙楫》에서 伊秉綬가 劉墉의 필법을 배웠다고 전하고 있으나 필획에서는 劉墉의 특징이 적고 間架 結構와 章法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楷書와 行草의 필획에서는 漢隸와 顔眞卿의 筆意를 쉽게 찾을 수 있다. 馬宗霍은 《霋嶽樓筆談》에서 “獨其以隸筆作行書, 遂入魯公之室.”(유독 그는 隸書의 筆意로 行書를 창작하였으며 顔眞卿의 서법을 흡수하였다.)이라 하여 伊秉綬의 行書는 漢隸와 顔眞卿의 筆意를 혼합하여 표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伊秉綬의 行書와 草書는 비록 隸書에 비해 업적이 미치지 못하지만 서예사적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 당시 서단에는 金石學의 영향으로 秦漢의 篆隸를 위주로 창작하는 碑派의 서예가가 점차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楷書와 行草의 학습과 창작에서는 아직 帖學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鍾繇와 王羲之를 법칙으로 하였으며 董其昌과 趙孟頫의 書風을 따르고 있었다. 趙孟頫의 書風이 유행하던 때에 篆隸의 옛 필법을 사용하여 行書와 草書를 창작한 것은 매우 독창적인 심미적 요구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그의 창작 방법은 후에 碑學派들이 北魏시대 楷書의 필법으로 行草를 창작할 수 있었던 실천적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伊秉綬의 서예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서체는 隸書이다. 東漢시대에 찬란한 꽃을 피운 隸書는 魏晋시대에 명맥을 이어 오다가 隋唐시대를 지나면서 거의 쇠퇴하고 말았다. 明末淸初에 이르러 傅山 등 낭만파 서예가들에 의해 조금씩 창작 서체의 새로운 대상으로 고개를 들다가 淸나라 중기에 考證學과 金石學 등의 영향으로 行書나 草書와 같은 위치로 부각되었다. 淸나라 시대에 隸書가 부흥할 수 있었던 핵심적 위치에 선 서예가는 바로 朱彝尊, 鄭簠, 桂馥 등의 업적을 계승한 伊秉綬이다. 그는 漢隸를 배웠으나 篆書의 필획과 結構法을 隸書에 응용하여 교묘한 변화보다는 평범하고 어수룩한 필획과 結構가 특징이다. 그의 이와 같은 隸書는 漢隸의 법칙에서 초탈하여 자신의 새로운 심미적 영역을 창조하였다고 평가받았다. 康有爲는 《廣藝舟雙楫》에서 “分書之集大成者伊墨卿也.”(隸書를 집대성한 사람은 伊秉綬이다.)라 하였고 趙光은 《退庵隨筆》에서 “墨卿能脫漢隸而大之, 愈大愈壯.”(伊秉綬는 漢隸에서 초탈하여 그것을 크게 썼으며 클수록 기상이 굳세다.)이라 하여 伊秉綬는 淸나라 시대 隸書를 집대성한 서예가이며 漢隸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당시의 서단에서 碑派의 서예가로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던 서예가는 伊秉綬와 鄧石如이었으며 모두 隸書에 뛰어났다. 당시에는 伊秉綬가 학문과 인품에서 布衣 서예가인 鄧石如에 앞서 있었던 까닭에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은 鄧石如를 더 많이 배우고 또 더 높이 평가하였다. 伊秉綬의 수준이 낮아서인지 아니면 따를 수 없을 만큼 높아서인지 그 이유에 관한 평가는 서로 엇갈리고 있으나 馬宗霍이 《霋嶽樓筆談》에서 “世皆稱汀州之隸, 以其古拙也, 然拙誠有之, 古則未能.”(세상 사람들은 伊秉綬의 隸書가 古拙하다고 한다. 그러나 拙樸함은 있으나 예스러움은 없다.)이라 한 평가는 伊秉綬의 隸書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孫星衍(1753-1818)은 江蘇省 陽湖 사람으로 字는 淵如이고 號는 伯淵이다. 乾隆 52년(1787)에 進士에 급제하여 編修, 刑部主事, 郞中 등의 관직을 거쳤다. 嘉慶 4년(1799) 母親喪을 당하여 귀향하였으며 그의 학문을 추앙하던 阮元의 요청으로 詁經精舍에서 경학을 강론하였다. 그 후 山東督糧道官 등을 역임하다가 嘉慶 11년(1806) 병환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揚州의 安定書院과 紹興의 興戢書院에서 경학을 강론하였다. 孫星衍은 어려서부터 詩文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으며 錢大昕의 문하에서 經史와 淸學을 수학하여 進士에 급제하기 전부터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經史學 뿐 아니라 校勘學과 金石學의 연구에 매우 큰 성과를 올렸으며 《尙書今古文注疏》, 《周易集解》, 《晏子春秋音義》, 《京畿金石考》, 《寰宇訪碑錄》, 《平律館金石萃編》등의 저서를 남겼다. 서예는 金石學과 校勘學의 연구에 바탕을 두고 연마하였기 때문에 篆書에 가장 뛰어났으며 隸書도 비교적 잘 썼다.

陳鴻壽(1768-1822)는 浙江省 錢塘(지금의 杭州) 사람으로 字는 子恭이고 翼庵, 曼生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嘉慶 6년(1801) 貢生에 급제하여 江蘇省 溧陽知縣, 淮安同知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문인 묵객들과의 폭넓은 교류를 하여 많은 친구가 있었으며 그의 집에는 항상 손님들이 가득하였다고 전한다. 술과 차를 모두 좋아하였고 溧陽知縣으로 있을 때는 그곳에서 생산되는 붉은 색 돌로서 만든 茶具인 ‘曼生壺’가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陳鴻壽는 시문, 書畵, 篆刻에 고루 뛰어났으며 시집으로는 《桑連理館詩集》이 전하고 있고 그림은 산수와 화훼를 잘 그렸으며 특히 蘭竹에 뛰어났다. 篆刻은 秦漢의 印章과 西泠四家의 刻法을 익혀서 일가를 이루었으며 西泠六家, 혹은 西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印譜로는 [種楡仙館印譜]가 전하고 있으며 [西泠六家印譜]와 [西泠八家印譜]에도 작품이 실려 있다. 서예는 篆書, 隸書, 行書, 草書에 모두 능통하였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隸書에 가장 뛰어났다. 蔣寶齡의 《墨林今話》에 의하면 그는 “凡詩文書畵, 不必十分到家, 乃見天趣.”(詩文과 書畵는 최고에 이를 필요가 없으며 天趣를 나타내면 된다.)라 하여 작품의 창작에서 뛰어 나려 하는 것 보다 자신의 성정을 표현하고 즐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서예 작품도 이와 같은 기준으로 창작하여 고대의 법칙이나 다른 사람을 닮으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심미적 세계를 개척하려 하였으며 隸書의 창작에서 그와 같은 욕구를 잘 표현하였다.

이상의 碑派 서예가 이외에 前碑學期에도 여전히 帖學을 심미적 표준으로 학습하고 창작한 서예가들도 여러 명 있다. 이들은 대부분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적 성향이 강한 서예가들로 앞 시대에 유행한 趙孟頫와 董其昌의 書風을 계승하였다. 姚鼐, 錢伯坰, 張問陶, 成親王, 鐵保 등이 前碑學期의 대표적 서예가이며 그 가운데 姚鼐(1731-1815)가 가장 뛰어나며 많은 명성을 얻었다. 姚鼐는 비록 考證學을 기초로 한 碑派 서예가들이 크게 활동한 대세에 묻혀 빛을 발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수준은 매우 높았다. 그의 서예는 元明이후의 보수적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行書와 草書에 뛰어났고 문인 서예의 심미적 범주인 書卷氣를 잘 표현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4). 後碑學期(1821이후); 서예의 百花齊放

淸나라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가장 번성한 시기는 康熙, 雍正, 乾隆의 三朝이다. 134년에 걸친 이시기를 漢나라와 唐나라의 전성 시기에 비교하며 역사에서는 康雍乾시대라 부른다. 嘉慶시대를 지나 道光시대 이후의 淸나라는 정치와 경제는 물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西歐의 큰 물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내외적으로 충격을 받게 되자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반에서도 큰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咸豊, 同治, 光緖의 三朝에서는 국가가 중심이 되는 문화 사업은 거의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문화와 예술은 거의 개인적 활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업적도 높지 않았다. 그러나 서예는 다른 문예 장르와 달리 百花齊放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淸나라 시대의 대표적 학문인 樸學이 考證學, 金石學, 校勘學, 文字學 등 여러 영역에서 집대성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金石 文字를 소재로 창작하는 서예가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은 비록 당시까지 金石 文字의 심미적 특징에 관한 이론적 근거를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金石學를 연구하는 가운데 본능적으로 그 속에서 심미적 요소를 발견하여 학습하고 창작하였다. 道光 시대에 이르러 乾隆과 嘉慶시대의 대표적 考證學者인 翁方綱이 唐나라 시대의 刻石 문자에 대하여 연구한 것을 기초로 字體의 바른 사용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翁方綱에 의해 唐나라 초기의 가장 모범적 글자체로 평가받은 歐陽詢의 서체는 서예가 뿐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의 중요한 학습 대상이 되었다. 乾隆시대 이후 碑派 서예가들에 의해 학습과 창작의 대상이 되어 왔던 금석 서체가 道光시대에는 모든 사람에 의해 학습되기에 이르렀다. 그 범위도 唐碑의 楷書와 秦漢 刻石의 篆隸에서 先秦시대의 金文과 南朝시대의 刻石은 물론 미개한 민족의 서예라 평가 절하하던 北朝시대의 魏楷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론은 실천을 낳고 실천은 또 다른 이론을 낳는 것은 역사이래 모든 학문의 공통적 특징이다. 이와 같은 법칙에 순응이라도 하듯 考證學과 金石學 등 樸學의 영향과 帖學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한 碑派 서예가가 많아짐에 따라 금석 서체의 역사와 심미적 범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인 碑學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帖學으로 입문하였으나 후에 刻石의 서예를 중심으로 학습하고 창작한 揚州八怪의 鄭板橋, 高鳳翰, 金農, 汪士愼, 高翔 등과 篆刻의 영향으로 篆隸에 관심을 가지고 창작한 西泠八家의 丁敬, 蔣仁, 黃易, 陳鴻壽 등에 의해 잉태된 碑學은 서서히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考證學, 金石學, 文字學 등을 집대성한 翁方綱, 戴震, 錢大昕, 段玉裁, 桂馥, 錢坫, 孫星衍 등의 이론과 실천은 碑學이 싹트기에 매우 충분한 영양이 되었으며 그 싹은 조금씩 발아하기 시작하였다. 이 밖에 刻石 서예를 중심으로 창작한 鄧石如와 伊秉綬의 성과와 명성이 帖派 서예가들을 앞지르게 되자 자연스럽게 ‘尊碑’ 사상이 형성되었으며 결국 碑學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碑學의 이론적 선구자는 阮元이고 계승한 사람은 包世臣이며 집대성한 사람은 康有爲이다. 嘉慶과 道光 시대에 阮元은《北碑南帖論》과 《南北書派論》을 저술하여 北魏를 중심으로 한 北朝의 刻石 서예가 叢帖의 수준에 뒤지지 않는다는 이론을 세상에 발표하였고 그 뒤를 이어 包世臣은 《藝舟雙楫》를 저술하여 北碑가 南帖보다 뛰어나다는 이론을 제기하였다. 이 후 道光, 咸豊, 同治, 光緖 시대의 서예가들은 가뭄에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맞는 金石 문자를 찾아 창작하였으며 계속하여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光緖 연간에 이르러 康有爲는 《廣藝舟雙楫》을 저술하여 역대의 刻石 서예는 물론 그것을 소재로 창작한 서예가들을 극찬한 이후 碑學은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하나의 완전한 서예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碑學이 탄생하고 확립된 시기는 淸나라 시대는 물론 전체의 中國 서예사에서도 가장 찬란한 꽃을 피운 시대라 평가받고 있다. 서예가 자각 예술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 東漢시대와 魏晋 그리고 唐宋시대에도 각 서체별로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훌륭한 서예가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明나라 시대 이전까지는 아직 서예의 창작이 수준의 높고 낮음을 떠나 대부분 실용의 범위 안에서 여가의 활용에 응용되었다. 그리고 창작 대상으로서의 서체도 東漢의 隸書, 東晋의 行草, 唐나라의 楷書와 行草 등과 같이 역사적 발전 규율에 따라 당시에 유행하던 서체에 국한되어 있었다. 碑學이 탄생한 이후 서예는 완전한 예술로서의 창작 영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서체의 제약이 없이 秦漢시대의 刻石 篆隸와 南北朝와 隋唐시대의 刻石 楷書를 비롯하여 先秦시대의 石鼓文과 金文 등 존재하는 모든 문자 자료와 서체는 창작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淸나라 후기에 집중적으로 출토된 殷商시대의 甲骨文과 戰國시대의 簡牘 문자까지도 창작의 소재 서체로 응용하여 碑學은 명실공히 창작의 황금기를 탄생시켰다고 평가 할 수 있다.

碑學이 서예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淸나라 후기에는 篆刻 예술에서도 새로운 刻法과 印風이 성행하였으며 매우 큰 업적을 남겼다. 甲骨文을 포함하여 先秦시대의 金石 문자가 끊임없이 발견되고 또 창작의 대상으로 응용됨에 따라 石鼓文, 古璽, 銅器 명문의 서체를 인문에 사용하는 篆刻家들이 대거 등장하였으며 그 수준도 매우 높았다. 淸나라 말기에 이르러 이와 같은 현상은 더욱 두드러져 吳昌碩과 같은 뛰어난 篆刻家를 탄생시켰으며 民國시대와 현대 篆刻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中國 서예사에서 百花齊放이라 불리는 後碑學期에는 서예가 광범위하게 발전하고 또 수준이 높았던 만큼 많은 서예가가 활동하였고 한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에 끼친 영향도 매우 크다. 또한 碑學派의 서예가만 활동하였던 것이 아니라 戴熙, 李兆洛, 翁同龢, 林則徐, 郭尙先, 曾國藩, 吳雲 등 전통의 帖派 서예가들도 계속하여 활동하였다. 당시의 조선과 일본에서는 아직 唐碑 이외의 금석 서예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였고 王羲之와 歐陽詢 그리고 趙孟頫와 董其昌 등의 書風이 유행하였다. 이 때 朝鮮에는 金正喜를 통하여 翁方綱과 阮元의 碑學 사상과 수많은 금석 문자가 알려지게 되었고 이보다 조금 늦게 楊守敬의 渡日로 일본에도 碑學이 성행하게 되었다. 後碑學期의 碑派 서예가로는 李宗瀚, 錢泳, 阮元, 朱爲弼, 吳榮光, 錢松, 吳熙載, 胡震, 何紹基, 錢灃, 包世臣, 趙之琛, 楊沂孫, 鄧傳密, 楊峴, 趙之謙, 徐三庚, 張裕釗, 吳大徵, 黃士陵, 康有爲, 吳昌碩, 沈曾植 등 매우 많이 있으며 吳熙載, 趙之琛, 趙之謙, 徐三庚, 吳大徵, 吳昌碩 등은 篆刻으로도 매우 유명하였다. 이 가운데 서예와 篆刻의 창작으로 뛰어난 업적을 쌓아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친 서예가는 何紹基, 趙之謙, 吳昌碩 등이며 서예 이론으로는 阮元, 包世臣, 康有爲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뒤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帖派의 曾國藩과 翁同龢를 포함하여 그밖에 비교적 많은 업적과 명성을 쌓은 吳熙載, 楊沂孫, 張裕釗, 徐三庚, 吳大徵, 楊守敬, 沈曾植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吳熙載(1799-1870)는 江蘇省 儀徵 사람으로 원래 이름이 廷颺이고 字가 熙載이며 讓之, 晩學居士, 言庵, 師愼軒 등의 雅號와 堂號를 사용하였다. 咸豊 연간 이후 字를 이름 대신 사용하였고 또 同治帝의 이름인 載淳의 ‘載’자를 피하기 위해 64세 이후 號인 讓之를 대신 사용하였다. 그는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書畵와 篆刻으로 직업으로 삼았다. 그림은 山水와 花卉를 즐겨 그렸으며 篆刻은 鄧石如의 刻法을 배워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현재까지 [師愼軒印譜], [吳讓之印譜] 등이 전하고 있다. 그는 또한 漢魏와 南北朝시대 刻石의 감정에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吳熙載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鄧石如의 입실 제자로 서예의 이론과 필법을 배웠다. 그는 包世臣의 제자 가운데 스승의 이론을 가장 성실히 배워 자신의 書風을 개척한 서예가로 평가받고 있다. 包世臣도 《藝舟雙楫》에서 “足下資性卓絶, 而自力不倦. 自能悟入單微, 故以相授.”(吳熙載는 자질과 천성이 뛰어나며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다. 스스로 능히 오묘함을 깨닫고 실천하기 때문에 傳授할 수 있다.)라 하여 吳熙載은 천부적 자질이 뛰어날 뿐 아니라 각고의 노력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包世臣이 서예의 필법과 창작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한 ‘逆入平出’, ‘奇巒’ 등의 문제를 吳熙載와 함께 토론한 것을 《藝舟雙楫․答熙載九問》에 기록한 것으로도 그가 얼마나 吳熙載를 높이 평가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吳熙載는 스승인 包世臣이 정립한 서예 이론을 기초로 서예를 학습하고 창작하였으며 결국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楷書와 行草에서는 여전히 包世臣의 書風이 남아 있으나 隸書와 篆書에서는 包世臣의 ‘逆入平出’ 이론에 鄧石如의 필법을 흡수하여 자신의 독창적 書風을 개척하였다. 그의 篆隸는 정취와 격조가 높으나 기운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馬宗霍은 《霋嶽樓筆談》에서 “篆體以長勢取姿, 如臨風之草, 阿靡無力.”(篆書는 長勢로서 형태를 이루어 마치 바람 앞의 풀과 같이 기운이 없다.)이라 하여 吳熙載의 篆書는 鄧石如에 비해 기운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하였다.

吳熙載는 篆刻에서도 鄧石如를 계승하여 자신의 印風을 수립하였으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漢印의 摹刻으로 입문하여 자형을 익혔고 鄧石如의 篆刻에 심취하여 그의 精髓를 체득하였다고 평가받았다. 특히 그는 [天發神讖碑]를 연마하며 체득한 篆書의 필획을 印文에 그대로 응용하여 運刀의 맛과 運筆의 맛을 조화롭게 응용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邊款에서도 行書와 草書의 필획을 그대로 응용하여 부드러운 정취를 표현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印文과 邊款의 刀法과 章法은 이전의 篆刻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독창적인 기법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趙之謙, 吳昌碩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曾國藩(1811-1872)은 湖南省 湘鄕 사람으로 字는 伯涵이고 號는 滌生이라 하였다. 道光 18년(1838) 進士에 급제하여 翰林院檢討, 侍講, 侍讀, 內閣學士 및 侍郞을 거쳐 大學士에 올랐고 一等毅勇侯에 봉하여 졌다. 咸豊 2년(1852)에는 군대를 조직해 太平天國의 난을 진압하기도 하였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文正의 諡號를 받았다. 그는 정치가와 군사가이며 동시에 학자와 서예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曾國藩은 翰林院과 황제의 곁에서 관직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전통의 帖學과 館閣體에 기초를 두고 서예를 학습하고 창작하였다. 당시 書壇의 전체적 흐름은 금석 문자를 중심으로 한 碑學이 대세를 형성하였으나 科擧 시험이나 정부의 문서 그리고 개인의 서신과 저술에는 여전히 전통의 帖學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科擧를 치르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帖學의 심미적 표준에 맞는 서체를 연마하여야 했으며 그 후에 翰林院 등 조정의 내부에서 학문이나 문자와 관련이 많은 직책에 근무 한 사람은 여전히 帖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曾國藩이 바로 이와 같은 부류의 대표적 서예가이다. 그는 帖派의 필수 서체인 館閣體 楷書는 기본적으로 구사하였고 行書와 草書에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이전의 帖派 서예가와 달리 당시에 유행하던 篆書와 隸書도 열심히 연마하였으며 특히 鄧石如의 篆書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碑學이 성행하던 시기에 帖學으로 학습하여 명성을 얻은 사람은 많지 않으나 그 대표적 인물로 曾國藩 이외에 翁同龢가 있다.

翁同龢(1830-1904)는 江蘇省 常熟 사람으로 字는 聲甫이고 叔平, 甁廬居士, 韻齋, 松禪老人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咸豊 6년(1856)에 壯元으로 進士에 급제하여 同治帝와 光緖帝의 스승이 되었으며 內閣學士, 刑部侍郞, 都察院左都御史를 거쳐 刑部尙書, 會試總裁官, 太子太保, 戶部尙書, 大學士 등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光緖 24년(1898) 西太后의 개혁에 밀려 고향으로 돌아가 詩文을 저술하고 書畵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詩號는 文恭이고 문집으로는 《甁廬詩文稿》, 《甁廬叢稿》, 《翁文恭日記》등이 있다. 翁同龢의 서예도 曾國藩과 마찬가지로 당시에 성행한 碑學의 영향으로 篆隸를 학습하고 창작하였으나 그 중심은 帖學이다. 그는 趙孟頫와 董其昌의 서예로 입문하여 서예의 기초를 닦았으며 중년 이후에는 顔眞卿, 蘇軾, 米芾 등 역대의 유명한 서예가의 書風을 흡수하였고 말년에 이르러 北碑와 漢隸에도 관심을 가졌다. 翁同龢의 서예는 후기에 이를수록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담백한 정취를 표현하여 帖派 서예가 가운데 劉墉 이후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楊守敬은 《學書邇言》에서 “松禪學顔平原, 老蒼之至, 無一稚筆, 同治光緖間, 推爲天下第一, 洵不誣也.”(翁同龢는 顔眞卿의 서예를 배워 만년에 이르러서는 매우 성숙하였으며 同治와 光緖 연간에는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이라 하여 翁同龢의 서예를 당대 제일이라고 평가하였다.

楊沂孫(1812-1881)은 江西省 常熟 사람으로 字는 子輿이고 號는 詠春이며 만년에 濠叟, 觀濠居士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道光 23년(1843) 鄕試를 통과하여 安徽省 鳳陽知府을 역임하였으며 父親喪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평생 서예와 학문을 연마하며 생활하였다. 저서로는 《管子今論》, 《文字解說問爲》, 《莊子正讀》, 《在昔篇》,《觀濠居士集》등이 있다. 《在昔篇》에서도 알 수 있듯이 楊沂孫은 文字學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며 그것을 기초로 篆書와 隸書를 많이 썼다. 특히 그의 篆書는 당대 제일로 鄧石如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다. 그는 [石鼓文]과 金文을 집중적으로 배워 자신의 書風을 개척하였다. 그는 자신의 篆書와 隸書에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隸書는 鄧石如에 미치지 못하지만 篆書는 능가한다고 스스로 평가하기고 하였다. 그러나 필획과 章法이 너무 규칙적이고 가지런하여 韻致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馬宗霍은 《霋嶽樓筆談》에서 “濠叟篆書, 工力甚勤, 規矩亦備, 所乏者韻耳.”(楊沂孫의 篆書는 工力이 깊고 법칙도 갖추고 있으나 운치가 부족하다.)라 하여 工力은 깊으나 韻致가 부족하다고 평가하였다.

張裕釗(1824-1894)는 湖北省 武昌 사람으로 字는 廉卿이고 號는 廉亭과 濂亭을 사용하였다. 道光 26년(1846) 鄕試를 통과하여 內閣中書를 거쳐 江寧書院, 湖北書院, 保定書院 등의 관리관을 지냈다. 曾國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훈고학, 音義學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고대의 文辭에 뛰어나 마지막 桐城派라 불렸다. 曾國藩의 제자인 黎庶昌, 吳汝綸, 薛福成과 함께 ‘曾門四弟子’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저서로는 《今文尙書考證》과 《濂亭文集》이 전하고 있다. 張裕釗의 서예는 魏碑를 기초로 하였으며 楷書와 隸書의 필획을 중심으로 쓴 行書가 가장 뛰어나다. 그는 碑學이 탄생하고 성행한 이래 처음으로 北朝시대의 楷書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창작하였으며 또 行書에도 응용한 서예가이다. 따라서 康有爲는 《廣藝舟雙楫》에서 張裕釗의 서예를 經學의 戴震, 騈儷文의 胡天游, 산문의 龔自珍과 비교하여 하나의 영역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또 “本朝書四家, 皆集大成以爲楷. 集分書之成, 伊汀洲也; 集隸書之成, 鄧頑伯也; 集帖學之成, 劉石庵也, 集碑學之成, 張廉卿也.”(淸나라 서예의 四大家는 모두가 한가지 서체를 集大成 한 것으로 모범이 되었다. 八分은 伊秉綬, 隸書는 鄧石如, 帖學은 劉墉, 碑學을 집대성 한 사람은 張裕釗이다)라 하여 張裕釗를 北魏시대의 서예를 중심으로 하는 碑學의 集大成者라 평가하였다.

徐三庚(1826-1890)은 浙江省 上虞 사람으로 字는 辛毅이고 袖海, 井罍, 金罍道人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서예와 篆刻을 직업으로 생활하였다. 서예는 吳熙載와 같이 [天發神讖碑]를 집중적으로 연마하여 篆書로 큰 명성을 얻었다. 吳熙載가 篆刻에 [天發神讖碑]의 筆意를 응용한 것처럼 徐三庚은 [天發神讖碑]의 書風과 篆刻의 運刀에서 이루어지는 심미적 특징을 篆書에 응용하여 자신의 書風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은 그의 이와 같은 篆書에 속기가 많다고 비평하기도 하였다. 徐三庚의 篆刻은 丁敬이 개척한 浙派의 刻法으로 입문하였고 후에 鄧石如의 刻法을 기초로 秦漢의 印章을 배웠다. 吳熙載와 같이 刻石 篆書의 筆意를 篆刻에 응용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며 鄧石如 이후 吳熙載, 趙之謙과 함께 당대의 최고라 평가받았다. 현재까지 [金罍山民印存], [似魚室印譜], [金罍山人印譜] 등이 전하고 있다. 그의 篆刻은 필획과 章法에서 기교가 빼어나고 空白의 布置가 매우 조화로운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기법이 너무 뛰어나 오히려 속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서예와 篆刻이 모두 속되다는 비판을 받은 것은 작가의 학문과 인격 그리고 사회적 배경까지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전통적 비평 방법도 많은 작용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吳大徵(1835-1902)은 江蘇省 吳縣 사람으로 字는 淸卿이고 恒軒, 鄭龕, 白雲病叟, 白雲山樵 등의 號를 사용하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大淳 이었으나 同治帝의 이름인 載淳을 피하기 위하여 大徵으로 바꾸었다. 吳大徵의 집안은 상업을 하였으나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宋學에 심취하였다고 전한다. 同治 3년(1864) 鄕試를 통과하였고 同治 7년 科擧에 급제하여 翰林院編修과 지방관을 거쳐 太僕寺卿, 太常寺傾 左都御使 등을 역임하였다. 러시아, 일본, 프랑스 등과의 전쟁과 담판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中日戰爭 때에는 山海關에서 직접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中國이 패전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金石學을 연구하고 書畵를 창작하며 생활하였다. 그는 평생 많은 鍾鼎彝器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감상과 감정에 조예가 깊었으며 《集古錄》, 《古籒補》, 《恒軒吉金錄》, 《權衡度量考》, 《古玉考》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한 많은 銅器의 명문을 拓本하여 서예의 학습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의 서예는 金石學을 기초로 하여 金文을 집중적으로 연마하였기 때문에 篆書에 가장 뛰어났다. 李斯와 李陽冰의 小篆과 金文의 大篆을 융합하여 자신의 書風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古法에 너무 얽매여 융통성과 운치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楊守敬(1839-1915)은 湖北省 宜都 사람으로 字는 省吾이고 號는 鄰蘇이다. 상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同治 원년(1862)에 鄕試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會試에 몇 번 참가하였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理學에 심취한 동시에 金石學, 文字學, 지리학, 서예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서예의 창작 및 金石의 수장과 감상에도 매우 뛰어났다. 《日本訪書誌》, 《叢書擧要》, 《寰宇貞石圖》, 《學書邇言》, 《留眞譜》, 《壬癸金石跋》, 《平碑記》, 《平帖記》 등 金石學과 서예학 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겨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光緖 6년(1880)에 일만 점이 넘는 碑刻의 拓本과 法帖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서예 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다. 楊守敬의 渡日은 일본에서도 碑學이 성행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 서예의 새로운 시대가 개척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光緖 10년 모친의 병환으로 4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이후에는 黃州 부근에서 살았다. 黃州는 蘇軾의 東坡雪堂이 있었기 때문에 鄰蘇老人이라는 號를 지어 사용하였으며 金石學, 지리학, 서예학 방면의 저술과 서예의 창작에 전념하였다. 일본의 서예에 끼친 영향으로 1911년 辛亥革命 이후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그를 찾아와 작품을 구하였고 또 題跋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楊守敬의 작품은 中國 뿐 아니라 일본에도 많이 전하게 되었다.

楊守敬은 篆隸楷行草의 모든 서체에 능통하였으며 碑學의 이론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서예의 학습과 창작에서는 碑와 帖을 혼용하여 자신의 書風을 개척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서예의 창작에서 篆書는 秦篆의 書風을 표현하였고 隸書는 漢隸를 기초로 하였으나 淸나라 시대 명가의 書風을 많이 취하였다. 楷書와 行草는 魏晋시대의 刻帖과 南北朝시대의 刻碑 書風을 고루 취하였기 때문에 다른 碑派 서예가보다는 帖派의 書風이 많이 것이 특징이다.

沈曾植(1850-1922)은 浙江省 嘉興 사람으로 字는 子培이고 巽齋, 乙盦, 寐叟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光緖 6년(1880) 進士에 급제하여 安徽省 布政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학문이 매우 높았으며 법률과 역사에 박식하고 시문과 書畵에 뛰어났다. 淸나라 중기 이후의 時風에 영향을 받아 금석문의 拓本을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소장품이 대단히 많았다고 전한다. 저서로는 《漢律輯補》, 《海日樓詩文集》, 《元朝秘史》, 《蒙古源流箋注》, 《海日樓札叢》, 《海日樓題跋》 등이 전하고 있다. 서예는 晋唐의 法帖으로 입문하여 鍾繇와 索靖의 서예를 깊이 연구하였고 黃道周의 필법으로 得筆하였다. 이와 같은 學書 과정으로 그는 明淸시대의 帖派 서예가들과 같이 行書와 草書에 가장 뛰어났다. 따라서 그를 淸나라 후기의 帖派 서예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중년 이후에는 자신이 소장한 수많은 금석문의 拓本과 당시에 집중적으로 출토된 簡牘 서체를 깊이 연구하여 기존의 帖派나 碑派와 다른 行草의 새로운 書風을 개척하였다. 北朝시대 楷書의 필획과 秦漢시대 簡牘 서체의 筆意를 응용하여 그의 行書와 草書에는 楷書, 簡牘, 章草 등의 필획과 筆意가 함께 융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처 : 중국과 서예
글쓴이 : 금릉산방인 소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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