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 10. 멍석작 / 꽃씨 (화선지에 수묵, 물감)
지식에 관한 책들에 따르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갸나 요가, 지식의 길이다.
지적인 사람들은 숲 속의 리쉬(rishi: 현자)를 찾아가서
“코함(Ko Ham)”, 즉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
스승들은 “탓 밤 아시(Tat Vam Asi)”,
즉 “그대는 그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이 말을 들은 뒤에야
제자는 “아함 브라마스미(Aham Brahmasmi)”,
즉 “나는 그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지적인 사람들, 말을 귀로만 듣지 않고
그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길이다.
스승이 ‘그것’을 말할 때 제자는 ‘그것’을 바라보고,
“나는 그것이다.”라고 하며 스승의 말에 수긍한다.
그러면 스승은 “행운이 있기를. 이제 가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헌신이며, 내면에 있는 지고의 힘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 힘을 공경하고 바라보면, 그대는 그 힘이 된다.
그대의 마음을 그 힘에게 바치고,
“나는 분리된 존재다.”라는 자아를 버려라.
“나는 지고의 존재다.”라는 사실을 깨달아라.
지성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리해야 한다.
이해를 통해서든 헌신을 통해서든
‘그것’으로 존재하는 데는 차이가 없다.
아기는 젖을 빨기 위해 어머니에게 간다.
아기는 누가 자기의 어머니인지 알고,
어머니도 누구에게 젖을 물려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셋째 방법은 카르마 요가다.
카르마 요가는 무엇을 하든지 행위의 결과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그냥 행위를 할 뿐이며 결과는 지고의 존재에게 맡긴다.
실제로는 지식, 박티, 카르마 이 셋이 함께 움직인다.
그대가 이들 중 어느 하나를 붙잡아도 나머지 둘은 저절로 따라온다.
누군가를 알면 그대는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를 사랑하면 그대는 그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대의 행위는 서로에게 같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랑의 길인 박티에서는 신이 헌신자를 사랑한다.
비차라(vichara, 탐구)에서는 헌신자가 신에게로 간다.
이것이 차이점이며, 그대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신이 그대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은 박티다.
그대가 신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은 갸나다.
-슈리 푼자-
출처 :만다라불교미술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 만다라
글출처;화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