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을 갈며/마음고요

어떻게 살아왔을까

멍석- meongseog 2009. 12. 6. 12:45

    -혹여 멍석작품과 시의 만남에서 글에 관계된 문제가 있을 때는 하시라도 연락주시면 바로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 2008. 10.  멍석작/ 왜사냐건웃지요(화선지에 수묵, 물감)

     

     

     

                  어떻게 살아왔을까

                                             / 임병식

         

         

          길을 걸으면서,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앞서가는 사람의 뒤퉁수를 바라볼 때면,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걷는 것일까?' 하고 궁금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그 대답이 어디에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 놓고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라
          그냥 덮어두고 말지만 머릿속 한편에서는 계속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한데,
          그것도 한때인지 지금은 심드렁해지고 대신에 최근 들어서는 다른 궁금증이 자리를 잡았다.
          뭔고 하니 마주치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는
          보다 심층적인 내력의 문제로 방향이 돌려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나이든 사람을 볼수록 더욱 강렬하게 발동한다.

          그 중에서도 얼굴에 고생한 흔적이 많아 주름살이 깊은 사람일수록 옷소매라도 붙잡고 앉아
          그간에 살아온 내력을 캐묻고 싶어진다.
          그런 사람은 우선 살아온 삶이 녹록치 않아 가슴에 묻어 둔 사연이 많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 만큼 들려줄 얘기도 많을 것이다.
          나는 '곱게 늙었다.'는 말을 그리 썩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풍파 많은 인생을 그만이 유독 용케 피하면서 살았다는 말로 들리고,
          그랬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홍복을 누려 곱게 늙은 사람보다는
          비록 얼굴에 찌든 세파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을지라도
          고단한 삶의 흔적이 완연한 얼굴에서 훨씬 사람다운 모습과 호감을 느낀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기에 살면서 자기만의 내력을 간직하고 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내력을 스스로 '나는 이렇게 살아왔소'하고 토설하지 않기에 알 길이 없다.
          더러 자복을 하고 지켜보는 이웃이 있어 알게 되는 수가 있지만,
          생면부지로 한번 스쳐 지나는 사이라면 알기가 사실상 난망한 것이다.

          그런고로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살아온 내력이
          더 없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가끔 건강을 위해 가까운 산으로 산보를 나간다.
          다니는 곳은 주변에 숲이 울창한 편인데, 이 길을 처음 다닐 때는 행여 길을 잘못 들거나
          돌부리라도 걸릴까 봐서 살피느라 주위를 꼼꼼히 돌아볼 경황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길이 눈에 익혀지자 주변의 나무들이 숲이 아닌 개개의 나무로 보여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자연스레 주위의 나무들의 형태를 살펴보게 되었다.

          이때 보니, 수종이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를 들어 소나무 하나만 보더라도
          자리잡은 위치며, 자라는 형상이 가지각색이었다.
          예컨대 서있는 나무가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는 놈이 있는가 하면,
          응달에서 큰나무에 치어 빈약한 상태로 자라는 놈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건 큰 바위 위에서 위태롭게 자라고, 비탈에서 몸이 기우뚱한 채로
          불과 몇 가닥의 뿌리에 지탱하며 간신히 목숨을 도모하는 놈도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런 나무들을 보면서 그냥 '그렇게 자라는 나무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자 지나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살아온 내력'에 관심을 가지듯
          그런 시각으로 의미를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서 있는 나무가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디서 신수가 환해 보이는 노인을 만나면 금방 좋은 땅에서 거칠 것 없이
          자라고 있는 나무가 연상되고, 생업의 고통으로 찌들대로 찌든 얼굴을 보게 되면
          비탈이나 음지에서 힘겹게 자라는 나무가 곧바로 연상이 된다.

          나무 중에서는 몰라서 그렇지 자라면서 뜻밖의 시련을 겪은 놈도 있을 것이다.
          당초에는 땅심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 한 생이 보장된 듯 했으나, 예기치 않은 사태로
          뿌리가 뽑히고 가지가 꺾이는 수난을 당한 놈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살아가며
          더러 예상 밖에 신수가 펴지는 수가 있지만, 온갖 재앙으로 시련을 겪어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서 있는 나무를 보면
          하루하루를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절박한 사람들의 군상이 연상되어진다.

          오늘도 다니는 길을 걷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내 앞에는 낯이 익은 노점상 노파가
          항상 무릎 아래 두고 있는 낯익은 걸망을 지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노파의 흰머리를 바라보는 나의 머릿속에서는 예의 그 생각, '어떻게 지금껏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산책길에서 본 뿌리가 거지반 뽑혀져
          간신히 살고 있는 비탈의 소나무가 연상되었다.

          그러면서 또 내가 의문을 가지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파 역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을까' 하는 말이 대입시켜졌다. 그러나 나는 고개가 저어진다.
          대저 그런 말은 '곱게 늙어 가는' 사람들이 호사이지 무슨 이 노파에게 위안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노파가 만약 살아온 얘기를 풀어놓으면 얼마나 곡진할까. 삶의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진다. 

           수필세계 004. 겨울호(제3호)에서

           

           

          글출처;화실전

    '^-^ 먹을 갈며 > 마음고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설(暴雪) / 오탁번  (0) 2010.01.10
    반성 505  (0) 2009.12.16
    까치밥   (0) 2009.11.23
    신이 그대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은 박티다. -슈리 푼자-|  (0) 2009.11.20
    정들까 두려우면   (0) 2009.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