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의 맥을 찾아 나선 눈부신 봄날......고즈넉한 풍경의 순천시 상사면을 향한다. 상사면 응령리, 조용하고 소박한 마을에 올라서니 오래되고 낡은 대문하나가 예사롭지 않는 포스를 풍기며 찾아온 객을 반긴다. 바로 ‘연우당’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아담한 마당에 자리 잡은 소박한 선비화가 부부의 화실이 꼭 그림 같은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여백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아직도 소녀 같은 동안의 규당 김성님 화가는 그 선비들의 묵향이 가득한 방안에 다소곳하게 앉아 찾아온 길손에게 연잎차를 권한다.
하얀 백자도자기 속에서 순백의 연꽃이 활짝 피어나더니 연꽃 향기가 방안에 가득 들어차고 규당 김성님의 손에서도 연향이 묻어났다.
‘문인화란 무엇인가’
“문인화는 자연과 대화하며 세상을 보듬어 안과 맑게 빛나는 시인의 눈으로 우리의 정서를
보여주는 가장한국적인 그림이라 말하고 싶다. 강한 형태표현이나 조형작업이 아닌 품격과 격조를 지향하는 옛 선비의 정신성이 강한 예술이다. 깊이 있는 선과 시적인 풍류를 직접적이기보다는 은은한 달빛 같은 표현으로 보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문인화에 대한 규당의 말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문인화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문인화는 한국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인화는 고고한 선비의 정신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그림과 시 그림과 여백의 생각이 함축된 그림이자 글이고 화가의 마음이다.
‘문인화’ 남종화의 맥
호남미술의 뿌리이자 오늘날 한국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남도의 멋은 전통 남종문인화 로 표현된다. 남종화는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남종문인화가 발전해왔으며 이와 더불어 윤제홍, 김수철을 비롯한 개성이 강한 화가들이 나타나 참신하고도 이색적인 화풍을 계승해왔다.
남도의 멋은 남종화로 귀착되는데, 소치(小痴) 이래로 의재(毅齋), 남농(南農)으로 이어지는 남종화는 남도를 예향으로 부르게 된 가장 유력한 연유일 것이다. 남종화는 전형적인 관념의 세계이다. 세속의 번잡함이나 부질없는 명리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하며 그 속을 거닐고 싶어 하는 이상을 반영하는 것이며 높은 풍격과 고매한 이상은 이러한 이상향을 구축하고 경영하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비록 남종 문인화가 남도 예향을 구축하는 커다란 주춧돌 중 하나라 할지라도 그 현실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규당과 같은 문인화가들은 지역적으로 시장이 좁은 까닭에 창작활동은 생활과 연계되지 않고 있다. 작품을 팔만한 시장이 개척되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지방에서 활동한다는 자체만으로 지방작가라는 데미지도 안아야 한다. 그래서 서울로 활동 영역을 높여가는 문인화가들이 많아지면서 지방에서의 문인화의 명맥이 약해지고 있어서 이 또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림은 나의 운명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규당은 하늘과 자연을 34색 크레파스로 담아냈던 것이 전부였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을 그릴 것을 권장한 선생님과 이젤과 미술도구를 사준 그녀의 오빠 덕분으로 시작된 미술공부는 그녀만의 그림 세계를 만들어주었다.
각종 실기대회에 참여하던 중 중2때 서울 중앙대 캠퍼스에서 열린 그림대회는 그녀가 전공으로 나가는 결심을 굳혀주었고 결국 입상과 함께 꿈을 키워주었다. 그러나 요즘처럼 학원에서 체계 있는 그림을 배우는 시절이 아니었던 만큼 혼자서 시작한 그림공부는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고 부모님이 반대했던 만큼 미대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져갔다.
숨 가쁜 학창시절 다소곳한 소녀는 부모님 몰래 미술공부를 할 만큼 옹골찼다. 드디어 염원했던 조선대학교 미대에 합격한 후 본격적인 미술을 시작했다. 집안대대로 의사를 배출한 집안에서 미술전공은 어렵고 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규당의 인생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림밖에 없었다.
“광주 충장로에 있던 호텔 쇼윈도에 걸린 커다란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바로 그 곳에 내 그림을 걸고 싶다는 막연함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라고하는 규당 김성님.
서양화를 전공하면서 사군자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문인화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가 지도 교수님께서 서양화보다는 문인화에 더 맞는다고 권유하시는 바람에 아예 전과를 했다고 말하는 규당은 여러 미술 장르를 오고가며 풍부한 경험을 가지게 되었던 탓인지 문인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회에 작품을 냈고 출품하자마자 상을 받게 되었다.
여성 문인화가로의 삶
“졸업 후 가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죽을 때 까지 붓을 놓지 않겠다는 나만의 각오와 다짐을 잊지 않았고 단칸방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을 빨리 재우는 게 일이었던 그 시절....아이들이 자면 붓을 들었다. 그 결과 광주, 전남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출품 좋은 결과를 얻었다.
나는 그것이 한해 그림에 대한 농사라 생각한다. 꾸준히 각종 대회에 작품을 출품을 하는 것도 공부라고 생각했다. 당락에 있어서 집착하지 않았다. 그저 농부가 농사를 짓듯이 화가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임무이고 직분이라 생각했다. 특히 여자로서 문인화를 한다는 편견으로 배타적인 환경, 가정주부로 엄마로 바쁘고 고달픈 시간과 항간의 시선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 년에 4~5회 출품하는 충실하고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녀의 고단한 삶도 화풍으로 옮겨져 인생의 참을 만들어냈다는 규당. 30년 그림 속에 그녀 마음과 시선을 담을 수 있는 작업을 완성하게 되었단다. 자연이 그녀의 스승이자 가르침이자 뉘우침이었다고 말하는 규당은 자연을 대하면 항상 부끄럽단다.
특히 겨울 추위와 눈보라에서 사람들은 소극적이 되는데 어느 날.......움터 오르는 매화나무를 봤을 때 충실히 혹한에서도 제 할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스스로 부끄러워졌단다. “나무조차 충실하게 제 할 일을 하는데...난 게으름으로 나무보다 못하구나.” 라며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규당 김성님. 그녀의 힘의 근원은 바로 그 선의지에서 나오는가보다.
그림에 평생을 바친 규당. 바람 부는 날이면 언덕에 올라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반문하기도 한다. 여자이고 주부이며 엄마이자 화가인 그녀......매사에 열심히 매달리지만 그래도 언제나 부족함을 느낀다. 그래도 그림을 그려야한다는 생각은 더욱 강렬해진다. 적막하고 외로운 상사에서의 생활조차도 예술가가 가져야할 일상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림에 외로움을 담아내고 싶다는 그녀지만 그림을 봐주는 사람이 외로움보다는 포근함과 함께 “그래 맞아요.”라는 공감대를 주고 싶단다.
규당은 말한다. “어설프고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 생활과 철학...내 이야기가 묻어나는 그림을 보면서 긍정적인 시선을 받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처절한 삶을 산 사람만이 느끼는 아픔을 내 경험과 그림으로 승화시켜 여러 사람이 공감하는 생각을 표현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바램이자 가야할 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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