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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전통회화의 큰 흐름과 새지평

멍석- meongseog 2011. 8. 28. 17:01

 

최병식_미술평론가

 

한국전통회화의 큰 흐름과 새지평

   2002. 5. 월간 에머지

1. 근대의 자각과 암흑


  조선시대 후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퇴계로 부터 이율곡을 거쳐 이익과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사상사적인 맥락은 실학의 성행으로 연결되어지고 김정희의 실사구시학파로 까지 나타나면서 모처럼 만의 한국적인 사상과 철학적인 배경과 중국의 여러 사조를 수용하면서 이를 재해석하고 우리의 자연과 체질에 맞는 형태로 미술사적인 전개가 이루어지는 다양한 경향이 탄생하였다.

  진경산수를 비롯하여 풍속화의 등장과 함께 도자기에서 분청사기 이후에 나타나는 철화백자나 달항아리의 백자가 갖는 백미의 시대를 열어갔으며, 민화와 같은 서민적인 실용화가 성행하면서 우리 민족정서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발현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발현이라는 해석의 시각이 다양하게 작용되어지지만 이를 떠나서라도 한국전통회화의 맥락은 17∼18세기, 특히 영·정조년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도와 그 열매를 근대의 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간주하게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근저에는 결국 중국사대주의라고 볼 수 있는 숭명사상과 조선중화주의의 사고가 이견을 보이고 있었고, 이로써 실사구시를 내세우면서 금석학과 고증학을 연구하여 획기적인 업적을 세운 김정희 등의 주도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어지는 중국식 복고주의가 19세기의 한국전통화단을 이끄는 대전환을 이루게 된다.

  물론 심사정, 이삼만 등이 이시기의 중국풍 회화나 서예를 보여주는 경향을 구사하였지만 김정희(1786∼1856)의 시·서·화 삼절사상에 연이은 원대 예운림(倪雲林) 위주의 문인화적인 사상과 예서의 새로운 변형을 독자적으로 추구한 추사체의 확립은 두 가지 측면에서 파란을 낳았다. 그 하나는 그의 존고주의(存古主義)라고 불리는 고대사상이나 경향에 대한 습득과 함께 중국의 남종문인화류의 사조가 전기나 허유 등을 통하여 다시 유행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거의 전무후무한 추사체의 독창성을 발현함으로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격조 높은 세계관을 확립하여 서예에서의 문기와 격조를 분명히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중국의 모화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 보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후에 전개되는 홍세섭이나 김수철 등의 새로운 변형주의 작가들이 갖는 미술사적인 의미는 역시 전환기의 실험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아쉬운 것은 연속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대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기존의 화풍에서 벗어나 과감히 독자성을 확보해간 흔적들이 적지 않은 예들은 이 두 작가의 필법과 자연에 대한 해석방식 등이 갖는 특수성으로 인해, 비록 부분적인 위치에 머무르지만 재평가를 받을 수 있는 요소가 적지 않다.

여기에 안견(安堅)·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화단의 3대화가로 손꼽히는 장승업(1843∼1897)은 그야말로 기예적인 면에서는 최고의 작가로 불려졌으며, 중국의 전통화법을 따른 그의 화풍은 안중식(安仲植1861∼1919)과 조석진(趙錫晉1853∼1920)에게 이어지게 된다. 조선시대 최후의 작가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이 두 작가 중 조석진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었으며, 신식무기의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우기 위하여 중국으로 떠났던 영선사(領選使)일행의 제도사자격으로 1881년 안중식과 중국의 티엔진을 1년 동안 다녀오게 된다.

  이후 어용화가격인 이왕가의 어진도사(御眞圖寫)에 안중식과 함께 활약하게되며, 1908년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에서 근대식 미술교육에 참여하고, 1911년 이왕가의 후원으로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이 설립되면서 안중식과 더불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우리나라 근대미술사에서 본격적인 교육제도로 거듭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배출된 후학들은 모두가 당대의 저명한 작가들인 이용우, 오일영, 김은호,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최우석, 박승무 등이었다.

  연이어서 일제와 상대적인 성격으로 1919년 민족서화가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서화협회를 창립하고 안중식과 조석진이 차례로 회장에 선임됨으로써 근대미술계에 막대한 역할을 하게된다. 안중식의 작품 중 〈백악춘효(白岳春曉)〉는 경복궁과 백악의 전경을 전통적인 중국의 관념적 산수기법과 완연히 다른 사실성과 구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서 근대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또한 일제의 암흑에서 다시 봄이 온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고 하여 더욱 뜻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일제시대의 전통 회화는 물론 서양미술의 유입과 함께 일련의 변화를 보이는 경향이 미미하게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조선조 말엽에 이어져 왔던 청대(淸代) 매너리즘의 고답적 관념의식이 상당수 작가들의 의식과 필묵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일부는 전통적 사숙식(私塾式)의 답습 방법을 통한 화보(畵譜) 중심의 학습과 청전 이상범과 같은 작가들이 주도하여 실경산수를 꾸준히 전개해온 경우, 일본화의 진채 중심으로 인물소재를 전개하는 세 부류가 가장 중심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화적인 성격으로 화풍이 전개되어지는 데는 1922년부터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당시 일본적 취향의 양식으로서 한국작가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던 일본화단의 큰 기류는 이미 19세기 말엽부터 서구문물의 수용과 함께 이른바 신일본화(新日本畵)의 양식으로 변모를 거듭하고 있던 狩野芳崖(가노 호가이), 岡倉天心(오카쿠라 덴싱), 橋本雅邦(하시모도 가호) 등의 새로운 일본화 유형과 小野竹橋(오노 시쯔교), 竹內栖鳳(다케우치 세이오), 川端龍子(가와바타 류시), 小林古徑(고바야시 코게이), 安田 彦(야시다 유키코), 橫山大觀(요코야미 다이칸) 등의 비교적 보수적인 유형들이 많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우선 한일합방 연대를 그 기점으로 하여 근대와 현대에 걸쳐 많은 활약을 하게되는 상당수가 조선조 말엽의 허유, 남계우, 정학교, 장승업 등의 이후 세대들인 조석진, 안중식 등에 의해 직·간접적인 학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제시대에 기록될 수 있는 동양화단의 주요 움직임들로서는 윤영기에 의해 1911년 이후에는 서화미술회,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이 설립되었고, 1914년경에는 역시 윤영기에 의해 기성서화회(箕城書畵會)가 결성된다.

  이어서 1918년에는 서화협회(書畵協會)가 조석진, 안중식, 오세창, 김규진, 정대유, 이도영, 고희동 등 13명에 의해 결성되는데, 이 그룹은 그 당시 서서히 일본인들에 의해 유린되어지고 있던 화단을 직시하고 주체적 시각의 확립을 주장하면서 대동단결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뜻깊은 단체의 결성이었다.

  한편 1936년에 창립된 김은호의 문하생 모임인 후소회(後素會)의 뒤를 이어서 허백련의 제자들이 수업하게 되는 연진회관(鍊眞會館)이 광주에 설립되었고, 1941년에는 청전화숙전(靑田畵塾展)이 배렴, 이현옥 등에 의해 개최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의 자연을 실경으로 표현한 일련의 작가들은 이상범, 노수현, 박승무, 배렴, 이현옥, 정용희, 정운면, 허건 등이었으며, 일본화의 경향을 수용하여 진채 위주의 작업을 한 작가들은 이영일, 김은호, 정찬영, 최우석, 한유동, 김경원, 김기창, 백윤문, 허민, 장우성, 조중현, 김중현, 이유태 등의 경우이다.

  당시 이들의 외국 미술의 수업은 이한복이 1919년에, 김은호, 변관식 등이 1925년에 일본 유학을 떠났는가 하면, '40년대에 들어서 이유태, 조중현, 김화경 등이 도쿄로 떠났고, 허백련과 김은호는 1929년에 북경을 여행하는 등, 해외 화단의 수용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국내에서는 1918년에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 등이 서화 미술회를 졸업하였고, 1921년 8월에는 김돈희, 고희동, 이도영에 의해 서화협회(書畵協會)의 부설 연구 기구였던 서화학원(書畵學院)을 창설하여 1925년까지 30여명의 학생을 교육하는 등, 본격적이지는 못했지만 국내에서 시도했던 일련의 미술교육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당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두드러지는 민족회화에 대한 주창이 어려웠던 현실적 아픔 속에서 서화협회전 같은 경우는 선전의 관제방법에 의한 전시체제와는 상대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던 민족의식의 결집을 촉구하는 전람회였다. 1929년 심영섭은 당시의 서화협회전에 부쳐 동아일보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일체의 권력도, 장애도, 곤란도, 박해도 우리들의 초연한 모험과 대담한 창조적 역동하에 하염없이 소멸하고 말 것을 믿어야 하겠다. ……과거와 현재를 헤치면서 무한대한 미래를 향하여 찰나적으로 무시(無時)로, 창조하자.

  그러나 결국 서화협회전의 이념은 1936년에 이르러 좌초되고 말았으며, 그 대신 선전을 무대로 한 활동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도영은 그 초창기에 줄곧 심사위원에 참여하였으며, 김은호는 16회부터, 이상범은 17회부터 심사참여에 이름이 올랐고, 계속적인 참여를 거듭해 왔던 경우였다. 선전을 통하여 활동하였던 작가들은 허백련, 이한복, 이용우, 노수현, 변관식, 최우석, 지성채. 김규진, 백윤문, 이영일, 박승무, 배렴, 김기창, 허건, 이응로 등이었다.

  선전의 역사는 대다수의 기성작가와 신진들을 망라한 관제의 발표장이 되었는데, 일부 인사들의 경우는 일제의 문화통치정책과 편견적인 전시운영 방법에 반기를 들고 참여를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도영(1923년부터), 오일영(1923년부터), 허백련(1928년부터), 변관식(1930년부터), 이한복(1930년부터), 박승무(1932년부터), 노수현(1933년부터), 최우석(1936년부터) 등이 바로 그들인데, 선전파(鮮展派)와 어느 단계에서부터, 혹은 전면적으로 반선전파(反鮮展派)작가들로 나뉘는 두 갈래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2. 격변과 전환기-해방이후의 전통회화

  해방과 함께 이루어지는 대전환의 문제는 바로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서구미술의 수용이라는 현대미술사조의 출발점을 이루는 중요한 기점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당시 1945년 해방되던 해를 기점으로 하여 생존하고 있던 작가들을 나누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김용진(1882∼1968)이 64세, 이도영(1884∼1933)이 62세, 고희동(1892∼1979)이 54세, 박승무(1893∼1980)가 53세, 이한복(1897∼1940), 이상범(1897∼1972)이 각각 49세, 최우석(1899∼1965), 노수현(1899∼1978), 변관식(1899∼1976)이 모두 47세, 그리고 이용우(1902∼1952), 이응노(1904∼1989), 박생광(1904∼1985), 허건(1907∼1987), 정진철(1908∼ )이 활동하고있었다.1)

  한편 본격적인 단체로서 1945년 9월에 창립되어 민족미술의 맥락을 계승하는 데에 노력하였던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은 배렴, 장우성, 김영기, 이유태, 조중현, 이응로, 정홍거, 정진철, 조용승 등 이당(以堂), 해강(海岡), 청전(靑田) 문하가 합류하여 1946년 3월 1일에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이와 함께 현대식 교육기관이 설립되어졌는데, 1945년에는 이화여대에, 1946년에는 서울대학에 미술과가 창립되었는가 하면, 1948년에는 홍익대학에 미술학과가 개설되어서 본격적인 현대식 대학 미술 교육의 효시가 되었으며, 19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전람회(國展)가 개최되었고 새로운 장을 여는 전시로서 역할을 하게된다.    

  당시 국전의 경향은 일제시대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의도에서 채색화가 급격히 감소하고 수묵화 위주의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였으며, 일련의 작가들은 현대적인 실험을 통하여 전통적인 관념성을 재인식하는 경향을 제기하였다. 당시 동양화부문 심사위원은 변관식, 이용우, 노수현, 고희동, 장우성이었고, 추천작가로는 김은호, 배렴, 이상범, 최우석이었으며 서세옥은 신진세력으로서 실험계열에 속하는〈꽃장수〉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고, 성재휴, 정진철, 이현옥, 장운상, 박노수 등이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 회부터 기대치에 못 미치는 수준의 작품들이 대거 출품된 점과, 상당수가 일본화 양식으로부터의 탈피만을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작품들의 표현방법이나 재료가 급격하게 수묵담채 위주의 경향으로 급변하고 있는 사실 등, 초반기부터 많은 인사들은   국전의 편협한 독주현상에 대한 공격과 폭넓은 수용을 촉구하는 자성론을 전개해 나가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는 몇몇 인사들에 의해 '자주적 회화관'이 주창되기도 하였는데, 1950년 1월에 한 신문에 기고된 김화경의〈동양화로서의 한국-동양화와 일본화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당시의 자아인식에 대한 문제점을 읽을 수 있다. 그는,

  고전의 탐구는 고전에의 무건조한 향수만으로 안 될 것이며, 채색의 인색이 담백, 초연한 우리 민족성의 표현은 못될 것이다. 그렇지만 길은 넓을수록 좋지 않은가. 신인들 중에는 '한국·일본화란 어느 것을 가지고 뚜렷이 말하는 것일까? 참다운 동양화로서의 한화(韓畵)란?……' 하는 의문이 아직도 그네들의 머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말을 들을 법한데, 예컨대 이론상만이 아니라 실제 작품에서 명확한 제시가 있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라고 하여 당시에도 이미 '한국적'인 것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나름대로의 올바른 해석을 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2)

  한편 국전의 출발과 함께 1950년에는 그동안 정지되었던 후소회전(後素會展)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실로 감격적인 동문수학들의 만남이었다. 이 제7회전에 참가한 작가들은 강희원, 김화경, 이남호, 이팔찬, 이길범, 황영준, 김동한, 김기창이었으며, 8회전은 전쟁의 잔해와 함께 흩어져 있다가 무려 20년이나 해를 거른 이후인 1971년에야 개최되게 된다.

  초기의 국전에서는 '53년에 박노수 〈청상부(淸想賦)〉 국무총리상, '55년에 〈선소운(仙蕭韻)〉 대통령상, '54년에 서세옥 〈훈월의 장(暈月의 章)〉 문교부장관상, '56년에 박래현 〈노점(露店)〉 대통령상, '59년에 안상철 〈청일(晴日)〉 대통령상 등이 연달아 수상되면서 새로운 세대들의 기수로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또한 1955년에는 천경자도 대한미협전에서 〈정(靜)〉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역시 새 세대의 첨단 대열에 서게 되었다. 당시 박노수는 강렬한 인상의 단면색조에 의한 인물이 콘트라스트를 이루면서 파격적인 화면의 구성을 전개해 나갔고, 박래현은 김기창의 재구성적 혁신과 함께 당시 동양화단에 파격적인 현대화의 단면을 제시하여 나갔다. 이 당시 천경자도 역시 1951∼'52년작인 〈생태〉나 〈무등산〉 같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상당한 시각의 변화와 함께 채색에 대한 자기적 해석의 난제에 몰두하였음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시기는 일제의 청산, 서구미술의 수용으로 이어지면서 이전 화보(畵譜)식의 전습적 방법이나 일제시대의 밑그림을 먼저 그리고 다시 그 위에 화선지를 대고 그려나가는 하도식(下圖式)의 교육방법에서 탈피하여 서구의 추상을 비롯한 다양한 기법이 수용되어지는 시기로 전위적인 실험이 시작되는 일련의 사조가 발아되었다.

  이 시기의 화풍을 김영기에 의하여 대략 정리해보면, 1) 고전적 전통을 지키느라고 '매너리즘'으로 일관하고 있는 화풍과 또는 이와 비슷한 화풍(대부분이 남화(南畵)계통), 2) 아직도 일본화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뇌하는 화풍(채색 또는 담채의 사생), 3) 일본화풍을 벗고 고전으로 복귀하여 개자원식(芥子園式)을 따르려는 화풍(수묵 혹은 담채), 4) 일본, 중국, 또는 서양의 여러 양식을 따서 종합적 표현을 하는 화풍(담채 혹은 채색 사생), 5) 신진의 학교 출신에 의한 과학적인 표현(서양화와 같은 채색 중심)을 하려는 화풍 등의 다섯 분류를 들고 있다.3)

  더하여 이때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인 작가들로서는 김영기, 장우성, 김기창, 성재휴, 김정현, 이유태, 조중현, 박래현, 김화경, 안동숙, 천경자, 권영우, 안상철, 박노수, 서세옥 전영화 등으로 이어지는 제3세대들과 제2세대들 중 특히 이응로 같은 작가들이었다.


이응로는 이미 당시부터 전통에 대한 소재나 기법, 그 관념성에 대한 강한 반발을 보이면서 김규진에게 이어받은 골기 넘치는 필력으로 새로운 시각의 작업을 선보였는데, 김기창은 이응로의 개인전 소감을 서울신문에 쓰기를 "묵(墨)이 오채(五彩)를 이루었고 그 화풍은 독자적 경지까지 도달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한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김기창, 박래현 부처전'을 본 김영기는 중앙일보에서,

  그러나 이들 작품은 그가 세계사적 또는 사회사적 현실을 묘사하려고 노력한데 근본정신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중략, 새로운 도구, 변화 있는 선, 새로운 색채상의 터치, 색채 명시법(明視法)의 효과를 잘 이용한 표현 등 여성으로서의 섬세한 묘미, 정서적인 감각적 표현은 그가 창안한 새로운 세계이다...... '현대 한국화'의 나아갈 길을 개척하는 데 적이 않은 자극을 준 것을 경하하면서 축필(祝筆)을 놓는 바이다.4)

라고 적고 있다.

  한편 '55년 한국미술가협회 발족 때에 주요한 동양화 부분의 핵심멤버였던 서세옥은 1958년 겨울에 서울대학 출신들로 구성된 묵림회의 결성을 논의하였고 그 이듬해 3월에 들어서면서 묵림회가 정식 출범하게 되며, '64년 12월 제8회전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그야말로 파란을 몰고 오면서 한국화단의 전위적인 기수로서 수묵화의 현대적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보인 중요한 획을 그어나갔다.

  이때는 더욱이 서양화단이 중심으로 기준한 것이지만 1957년을 기점으로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창작미술가협회의 창립전과 현대미술가협회전, 11월에 연달아 개최된 모던아트전 등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 초대전 등이 계속적으로 개최되어 앵포르멜과 기하학적 추상이 도입되어지고 현대미술의 사조가 유입되면서 묵림회와 같은 집단발언과 연계되면서 진정한 현대미술의 생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더욱이 이 해에는 한국화에서도 12월에 김기창, 김영기, 박래현, 김정현, 이유태, 이금추, 장덕, 조중현, 천경자에 의해 백양회(白陽會)가 창립되어져서 새로운 경향의 본격적인 그릅이 형성됨으로써 전통산수의 한 맥락과 동서미술의 양식이 서로 교차하는 형식들이 다수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50년대의 전통회화분야는 6대가 위주의 기성세대들에 의한 관념적인 경향과 일제잔재의 청산, 숨가쁘게 움직였던 서구미술의 수용과 그 반추에 대한 움직임이 동시에 다원적으로 이루어졌던 복합적 양상을 보여주었다.

3. 현대적 사조의 실험과 관념회화의 동반

6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청토회(靑土會), 신수회(新樹會), 춘추회(春秋會) 등이 잇달아 창립하였고, 그 중 '61년의 동·서 미술 세미나의 경우는 당시 회화 조류에 대한 현장감 있는 기획으로서 박래현, 김영주 등이 각기 참여하였다. 여기서 박래현은 〈동양화의 흐름〉이란 주제에서 동양화의 흐름 속에서 전통에 대한 오인과 시대적 수용자세의 편차를 거론하면서,

선인(先人)의 명화, 그것을 이어받는 것이 전통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정신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전통의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동양화는 서양화와 달라서 재료에서 퍽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미추(美醜)를 보는 눈은 같겠지만 제작면에 있어서 차이가 생긴다고 봅니다.

라고 말하였다. 김영주와 함께 열띤 토론을 벌인 이 세미나에서는 동·서양미술의 양식이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무한히 융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에 일치하였고, 재료의 차이에서 오는 표출방법의 이질적 관계를 효과적으로 시도해 나아가야 한다는 새로운 가변성을 주창하였으며, 이는 곧 양자에 있어서 수묵과 유화의 질료적 관념을 탈피해 나아가야 한다는 혁신적 의식의 개방된 결론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한편 '61년 11월 1일자 《조선일보》에서는 〈한국화는 형성될 수 있을까〉라는 대형 기획보도를 싣고 있는데, 그 서두에서,

최근 한국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동양화단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동양화가 한국적인 개성이 없이 외국화의 모방에 그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라고 전제한 뒤 이상범(우리 정서 묘사의 필요), 고희동(단언하기 곤란), 박노수(새로 싹터 나온 방향), 천경자(풍속도에 불과) 등의 글을 정리 게재하고 있으며, 역시 11월 9일자 《조선일보》에서는 김기창이 〈우리 동양화의 근본문제─참된 전통을 찾아서 새로이 출발하자〉라는 글을 게재하면서 전통에 대한 부단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등 이 시기 전통회화에 대한 다양한 반성과 모색이 이어졌다.

'67년 5월에는 한국화회(韓國畵會)가 출범하였고, 그 구성은 서울대 동문들이긴 하였으나 그 경향을 구별하거나 제약하여 선별되지는 않았다. 또한 '60년대 후반의 양상은 비록 외형적인 측면에서 기록될 수 있는 집체적인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기는 하나, 무엇보다도 작가들 개별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고심과 좀더 밀도 있는 접근은 몇몇 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서 '50년대에 못지 않은 현저한 탈전환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는 김기창과 박래현, 서세옥, 박노수, 권영우, 안동숙, 민경갑, 천경자를 비롯하여 이규선, 오태학, 이영찬 등이었다.

  이제 현대적 사조로의 반착은 이른바 6대가로 불렸던 김은호, 노수현,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 박승무의 관념적인 경향들이 절정에 달하면서 노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결국 실험적인 사조와 관념적인 회화정신이 동반되면서  '60년대를 거치게된다. 신세대들로서는 그들의 제자들이나 서울대, 홍대의 맥락을 형성하면서 이루어지는 문인화의 격조를 중요시하는 서울대와, 채색과 다양한 실험사조를 수렴하는 홍대의 학풍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각기 장우성, 박노수 이후 서세옥의 지도력과 홍대의 조복순, 배렴, 천경자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6대가 중에서는 김은호를 주축으로 한 김기창 등 후소회 화맥이 가장 크게 형성되었고, 그 경향에 있어서의 연계성은 모두가 독자적인 방향을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게 된다.

4. 한국화에서의 모더니즘-1970년대

  이미 묵림회(墨林會;1959), 청토회(靑土會;1963), 신수회(新樹會;1963), 한국화회(韓國畵會;1966)와 같은 대표적인 그룹형태를 이루었던 60년대를 지나 70년대에 들어서는 동양화단의 전체적 조류는 몇 가지 대표적인 현상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당시 생존하였던 원로작가들의 활발한 전시개최와 그들에 대한 재정리가 시도되었다는 것이며, 많은 작가들이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써 진정한 관념회화의 맥락이 단절되어져 가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운보 김기창의 바보회화는 민화와 풍속화,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전통성과 기법적인 바탕으로 현대적인 우리미감의 구현을 추구한 시리즈로서 이후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 경향으로 평가되었다.5)

두 번째로서는 '60년대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현상으로서 특히 중반 이후에 들면서 한결 더 현저한 양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격렬한 실험정신의 퇴조였다. 이 같은 현상의 근본적인 원리로서는 물론 일면에서는 '60년대에 야기되었던 의식과 방법상의 문제들에 대한 후기 현상으로 밀려오게 되는 내재적인 갈등의 시기로 간주되기도 하겠으나, 그보다는 당시 경제적인 상승세를 타고 미술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이에 고무된 작가들의 작품매매가 급증하였다. 그러나 정상급작가들은 보다 의욕적인 실험이 이어지지 못했고 미술시장의 요구에 편승하는 매너리즘을 보이게 된다. 이는 결국 지속적인 실험의식이 퇴조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한국화의 기류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점은 우리 전통회화의 뼈아픈 과오로서 비판되어야 할 부분으로 평가된다. 당시 인기작가로 손꼽히던 선두그릅이 80년대 이후 새로운 실험사조를 얼마만큼 제시하였는가를 점검해 본다면 이러한 과오는 쉽게 판단되어지며, 80년대에 들어서서 서양화를 중심으로 미술시장이 급선회를 하는데 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로서는 아카데미즘의 경직된 형식으로만 일관해온 주요 경향들로 고착화되어지고, 비리가 만연하게 되면서 국전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만연되면서 급기야는 그 종막을 예고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 대안으로서 '78년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미술대전, 동아미술제 등의 민전시대가 출범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간의 관제주도의 문화제도나, 줄서기의 학맥, 인맥의 부조리가 청년세대의 등용문이라는 전제 하에 신선한 작가들의 새로운 데뷔를 요구하는 전시체계로 전환하게 되는 전체적 흐름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그간 국전의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은연중 형성되고 있던 완벽한 기교중심주의 의식이나 안주된 보수적 아카데미즘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과 변모를 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넷째로서는 혁신적 사조의 퇴조와 함께 일부에서나마 두드러졌던 개별화, 즉 다원화 현상이었다. 이는 시공회(1972)를 필두로 창림회(1972), 창조회(1975), 춘추회(1976), 일연회(1976), 현대차원전(1976), 3인행(1977), 이원전(1979)등의 그룹들이 연이어 창립됨으로서, 비록 거의가 각 대학의 동문들로서만 결성되어진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거시적 차원에서는 '60년에 이미 결성되었던 몇몇 기존그룹들과 함께 '70년대 동양화단을 다원화된 양상으로 이끌어 가는 데에 중요한 집체적 발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6)

  그 중에서도 6대가나 그 동년배의 맥락으로 이어지는 근대작가들의 맥락은 이 시기에 있어서 전통회화의 세계관을 마무리하면서 연이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7) 그 중 이상범은 '72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 해에 동아일보사 주최로 유작전을 개회하였으며, '76년에는 김정현, 변관식, 박래현이, '77년에는 허백련이, '78년에는 노수현이, '79년에는 김은호, 김화경이, '80년에는 박승무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이미 오일영이 '60년에, 고희동, 최우석이 '65년에, 김용진, 배렴이 '68년에 세상을 떠나는 등 장승업에서 조석진, 안중식을 거쳐 이어져온 근대미술의 맥락이 한 단계 정리되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들의 작고는 미술계에서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는데, 전통적인 개념에 의하여 계승되어오던 현대적 진경산수나 관념적인 시각의 회화관이 사라지고 서구의 미술사조에 대한 접목이 급속화되어지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김기창과 권영우, 서세옥, 안동숙 등과 해외의 이응로, 박래현 등은 이들의 뒤를 이어서 가장 선두그릅으로서  40-50대 작가들과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였는데, 미니멀리즘의 유행과 함께 이루어진 전통적 질료와의 접목이 모노크롬현상의 새로운 기류로 편승하였다.

5. 1980-90년대의 신기류

'80년대에 들어서 주류를 이루었던 동양화단의 흐름은 '70년대 후반에 야기되었던 창작의식의 격감현상과는 다소 대조를 보이면서 그 나름대로의 신선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그 대표적인 경향으로서는 우선 첫째로, 두드러지는 작품경향들로서 상당수 작가들이 실체적 형상위주의 서구회화 양식에 입각하여 일상생활에서 쉽게 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었고, 이는 이른바 소재주의로 불렸던 그간의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다음은 급진적인 스타일의 수묵 위상론을 주창하는 실험사조가 증가되었고, 중반에 들어서 수묵의 일률적 흐름 속에서 차츰 채색화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어 감과 동시에 채묵(彩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지고, 서구사조의 수용에 상대적인 시각으로 실경산수가 더욱 증가되었고, 많은 작가들이 새로운 형상에 관해 관심을 갖게된다.

  두 번째로서는 위와 같은 모든 주요 사조가 '한국화'라는 명사로 대표될 수 있는 자아로의 회귀나 자존의 모색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며,

  세 번째로서는 제5, 6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많은 그룹들이 결성되었고, 기획전이나 테마전이 증가되었다는 사실이다.

  네 번째로서는 서울 중심의 극소수 대학이나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던 화단 전체의 경향이 차츰 전국적인 차원의 대학들이 동양화 부문의 인재를 배출하기 시작하면서 크게 확산되어지고, 학파·학벌에 크게 관계없이 다양하게 수용되는 수평적인 의식이 일반화되어 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로서는 국내작가들의 해외전시 횟수가 늘어났고, 중국, 대만, 일본 등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해외의 최근 사조가 수용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이다.

  이는 다시 말하여 그간에 문제시되었던 재료나 소재, 방법 등에 대한 개방과 함께 학연이나 지연 의식들을 벗어나 회화의 원천적인 개념으로 확대되어지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고 하면 과도기적인 성향이 없지 않을 것이며 자생의 숨결을 찾아 나서려는 강한 욕구가 충만한 시대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이 시대에 비교적 특기할 사실로서는 우선 금세기 한국화의 거장들이었다고 할 만한 박래현과 박생광의 대규모 유작전이 개최되어져 감동과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박생광의 무속적인 내용의 강렬한 색채나 암투병을 거치면서 말기에 보여준 민족적인 세계관의 단면들은 새로운 지평으로 자리 매김 되어야 할 전통회화의 비전을 열어나가는데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더욱이 이 시기부터는 관전이 완전히 사라지고 민전의 시대를 열어가면서 각 전시마다의 특성을 확보하고 장르를 넘어선 실험의식에 대한 경향들이 탄생하였다.8)

  '80년대에 들어서 선보인 새로운 대표적 기류로서는 권영우, 안동숙, 이규선, 이경수, 한풍렬, 송형근, 서기원, 송수련, 심경자 등으로 천착되어진 구조적 비형상의 화면들과 내함된 신문인화적 일기(逸氣)의 사의(寫意) 경지를 추구하면서 수묵의 사의적 세계를 터득하려는 움직임은 서세옥을 중심으로 서울대 출신 작가들에게서 대할 수 있는 묵필의 자유분방함과 다이나믹한 시지각의 확산이 하나의 실험의지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송수남, 하태진, 홍석창에 의해 전개된 수묵의 한국화운동과 박생광, 천경자, 오태학, 이영수, 이숙자, 이화자, 서정태, 김천영 등에 의해 줄곧 시도되어오던 채색의 질료는 더욱더 확대된 표현의식과 방법의 영역을 가능케 하면서 후배작가들에 의해 한결 더 넓은 시야로 개척되어지고 있다.

  한편, 중국의 수묵인물기법의 수용과 함께 독자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노동자계층들을 소재로 한 동양적인 리얼리티가 전통재료와 기법을 통해 등장하였는가 하면, 이열모와 이영찬, 조평휘, 김동수 등의 실경자연관(實景自然觀)은 줄곧 박대성, 오용길, 정명희 등에 의해 다양하게 전개되면서 일련의 청년세대들을 수용하였다. 또한 민전시대의 새로운 세대가 보여준 대체적인 경향으로서는 많은 작가들이 소재주의의 일상적 테마들을 주로 다루었으며, 이숙자, 김천영, 서정태, 김진관, 김선두, 곽정명 등은 과거의 채색 개념이 갖는 규제된 인위의식을 벗어나 각기 개성적인 색조와 감각을 존립시키는 데에 열정적인 노력으로 임해 왔다.

  박대성은 순화된 묵필의 자연관으로 실경의 내면적 감흥을 여과시켜 나갔고, 문봉선, 이종목, 김호석, 조순호, 김아영, 조환 등은 수묵을 중심으로 한 일상적 테마들을 용해하였고 일면에서는 도시현장, 인물 등을 다루면서 이 시대의 산수화, 이 시대의 진경은 바로 후기산업사회를 영위하는 도시의 보통사람들이라는 사고를 자각하고 이를 반영하려는 경향이 급속히 늘어나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90년대는 특별한 사조를 불문하고 그간 사조를 이루었던 다양한 경향의 발표되었는데 원로로서 장우성과 운보 김기창의 연이은 대형전시회와 서세옥, 권영우 등의 의욕적인 대규모전시를 비롯하여 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특히 최근의 주요 경향에서 선보이고 있는 것은 역시 권영우의 지속적인 변신의 노력과 같은 원로그릅의 경향과 이규선, 장상의, 이철주, 송수련 등 선두주자들의 실험, 김호득, 김병종, 김순호, 강경구, 문봉선 등과 정종미, 김성희 등 여성그릅이 이미 20여 년간에 걸쳐 천착해왔던 새로운 해석에 의한 문인화정신의 구현이 갖는 가능성과 함께 여전히 서정태, 김천영, 백순실, 김보희, 홍순주, 이인 등의 다원적 채색위주의 작업경향, 일련의 설치나 재료적 한계를 넘어서서 심재영, 이왈종, 유근택 등의 활동도 많은 활동으로 손꼽힌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청년세대들에 의하여 다양한 기획전이 선보였는데, 대표적으로 「흩어지다」전과 같은 경우는 새로운 시각의 전통회화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였고, 영역의 한계를 넘어서서 다양한 매체나 재료를 포괄하면서 학맥이나 지연을 떠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후기산업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이제 진정한 전통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한 반문과 새로운 지평을 요구하는 전시들이 여러 차례 이어져왔다.

6. 한국전통회화의 위상과 과제

  마치 17∼18세기의 조선시대 실학이 대두되면서 우리의 자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과 탈 중국의 몸부림을 위한 다양한 사조가 제기되면서 진경회화나, 풍속화, 민화, 도자공예 등에서 꽃을 피워나갔듯이, 21세기에 접어든 오늘 역시 새로운 화두가 이미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맥락으로는 연결되어지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제 서구미술이 유입되어진 지 1세기 정도가 지났지만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그만큼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고 있다. 국제화 되어가는 가상공간의 위력과 정보화시대의 새로운 의식구조의 변화와 함께 야기되어지는 자신과 사회적 집단들에 대한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회의나 재확인은 그간의 수용과정에 대한 검증으로서 당연하게 요구되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전통회화에 대한 재확인과 새로운 지평에 대한 물음 역시 당연하며, 이에 대한 새로운 실험과 영역의 확장이 끊임없이 시도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이제 전통회화는 한편에서는 먹을 갈아서 전통적인 준법을 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첨단 멀티미디어로 재편집되어지는 퍼포먼스의 한 형식을 동시에 연출해가면서 하나의 맥락을 이루어 가듯이, 크로스오버시대의 새로운 전통성의 설정에 대한 심각한 고뇌와 문제제기에 골몰하고 있다.

  특히나 전통회화로서 대표적인 분야로 인식되어온 관념산수 분야나 문인화, 전통채색화의 경지를 이루는 작가들이 극소수에 달하고 이 분야에 대한 각 대학의 계승현실이 거의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고 보면 현실적으로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이 시대가 장승업의 빛나는 기교에서처럼 개인의 비밀스러운 치기나 재능을 요구한다기 보다는 이제 동시에 라이브로 연결되어지는 세계화된 보편적 언어로서의 조형성과 의식의 저변을 요구하는 정도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른바 글로벌시대의 보편성이 갖는 전재 하에 우리는 서구중심의 보편적인 언어구조에 익숙히 길들여지는 우리민족의 특수성을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요구이기도 하며, 진정한 전통에 대한 재인식의 화두이기도 하다.

  이처럼 전통회화가 굳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정신성과 바탕에 흐르는 이념의 단편들에 대하여 요구되는 새로운 차원의 변속적인 위상이나 미술계에서의 필요성은 아무리 영상설치의 새로운 방법론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그만큼의 상대적인 역량으로 강한 요구가 있다. 즉 세계적인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아트페어나 미술시장에 진출하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심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적인 정체성에 대한 문제라는 것은 거의 대다수 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요소이다. 그러나 과연 한국적인 정체성과 전통회화가 갖는 연계성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반문은 한마디로 만족하지 못할 수준이다.

  그만큼 전통회화 분야의 작가나 전문가들이 갖는 자기 변신의 노력이나 급속히 변화하는 세계적인 감각에 무관심하였다는 이유가 가장 먼저이며, 다소 국수적이거나 보수적인 측면의 습성에 의하여 초래된 결과이기도 하다.

  새로운 변화는 보다 적극적인 영역의 확장과 다각적인 시각을 요구한다. 즉 김환기나, 유영국, 이응노나 권영우와 같은 작가들에서처럼 진정한 한국적인 현대회화는 이미 재료나 기법의 한계를 넘어서서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의 자연이나 관습, 민족적인 세계관에 근거하고있는 전통성에서도 발견 할 수 있으며, 한편에서는 박생광이나 근대의 6대가들이 보여주었던 한국의 자연, 한국의 전통사상에 기인한 절대개념으로 이어지는 현대적 구현이 근간이 될 수 도 있다. 더욱이 실경만 존재하고 진경산수와 같은 한 차원이 다른 세계관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전통적리얼리티의 문제도 매너리즘에 빠진 한 예로서 독자적인 장르를 개척해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또 다른 시각에서는 최근 많은 관심을 집중시키는 박수근과 같은 한국적 서정성을 바탕에 둔 작업으로 이어나갈 수 있으며, 설치나 영상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기류에서도 개념적인 현상을 바탕으로 한 오늘의 한국성을 표출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전통회화는 이제 서양화다 동양화다 하는 구분이 무의미한 상태로서 통시적인 방법론으로서의 접근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밖에 없으며, 아울러 그 위상이 갖는 절대성, 그것은 바로 수묵이다 채색이다 라는 재래적인 구분에서보다는 그 사고적인 형태, 유형의 시각에서 논의 될 수 있는 무한한 변동태로서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진 전통과 정체성으로 이어짐으로서 나타나는 오늘의 우리들이 갖는 매우 현상적인 적용이나 당장 요구되어지는 비전과 맞물리게된다.

  물론 정체성이라는 문제가 전통과의 연결과정에서 양자의 분명한 성격이 규정되어지는 특성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근의 우리 미술계가 지향하는 잠재적인 지평은 바로 가장 현대적인 삶을 영위하면서도 가장 전통적인 상대적 향수를 시간의 퓨전으로 거듭나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이미 우리의 몸 속에 너무나 다급히 밀려와 버린 세계화라는 물결 속에서 변화의 속도를 체감하는 순간 더욱 더 그러할 수밖에 없으며, 전통회화의 자체적인 변신으로도, 타 영역에서의 전통회화에 대한 접근으로도 모두가 가능한 이중코드로 이어지는 현실일 수 있다. 여기에서 가장 가깝게 다가서는 문제는 그 질료나 기법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인 재료인 수묵이나 채색, 종이나 붓의 특성으로 표현되어질 수 밖에 없는 장르의 특성을 감안하여 지속적인 계승이나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은 한 부분으로 인정한다하더라도 이제는 단지 수묵이나 채색을 다루는 과거의 질료개념으로 한정되어져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정신성에 기인한 표현형식의 포괄성과 세계적인 보편성 역시 이 시대의 모든 한국의 작가들이 가져야하는 공통의 화두이자, 세계화의 무대에 앞서는 선결과제이기도 하다.

주석

1) '45년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창설되었는데, 중앙위원장에는 고희동, 동양화 위원장에는 노수현, 위원에는 변관식, 허백련, 김용준이었으며, 1946년 6월에는 대동한묵회(大東翰墨會)가 주최하고 미군정청문교부 교화국과 자유(自由)신문사가 후원한 전국한묵전(全國翰墨展) 이 개최되었다. 또한 자유신문사는 같은 해 1월에 미도파 백화점 화랑에서 김용진, 고희동, 김은호 등 24명의 저명작가들을 초청하여 두방전(斗方展) 을 열었고, 5월에는 이응로, 김영기, 손재형, 김기승, 이기우가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 를 조직하였다.
2) 역시 김기창이 했던 한 마디를 통하여서도 당시 동양화단이 전체적인 형상으로 서둘러 일본화풍의 탈피만을 의도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우리들의 비예술적 관념과, 깊이 뿌리박힌 일본적인 관습을 현재에 있어서 여하히 처리할 것인가. 단지 지금에 와서 일본적인 것을 이탈하려고 성급한 초조(焦燥)를 하드래도 안될 것이니, 차라리 그것이 일본적이라 하드래도 서서히 이탈하도록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자기 실력을 가다듬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해방기분으로 가뜩이나 어리벙벙한, 모호한 제작 태도를 지닌 우리들이 '조선적, 조선적' 하기만 하고 날뛴다면 자신을 더욱 방황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게 될 것이요, 그 작품이란 죽도 밥도 아닌 엉터리 작품이 될 것이니......”라고 하였다.
3) 그의 이 같은 분류는 당시의 상황을 한결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일면에서는 '55년에 한국일보에 게재한 글을 읽어봄으로써, 해방 후 10년 동안에 이와 같은 다양한 노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서 한국화(韓國化)의 여정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가늠케 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해방된 이 땅에서 우리 작가들이 긴급을 요한 것은 (전염된 외국의 문화양식을 버리고) 현대한국의 새로운 민족예술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당시 가장 병든 것은 왜색화(倭色化) 한 동양화이었다. 이에 자각 있는 중견작가들은 선봉에 나서서 새로운 현대적 한국화풍의 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단체전으로, 혹은 개인전으로 꾸준히 10년의 세월을 매진(邁進)한 결과 금일에 있어서 확실히 한국적인 현대 동양화의 풍성을 엿볼 수 있게 하여 놓았다. 이것은 현재 일본 동경대학(東京大學)에서 동양미술을 연구하는 '미스 아렌'을 비롯하여 여러 외국인 학자, 평론가들이 일본의 소위 '일본화'와 우리 '현대 한국화'의 성격을 비교하여 우리 것을 극히 칭찬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영기 〈10년의 미술-개인주의로 일관〉 1955, 3, 20. 한국일보
4) 〈개척되는 현대한국화〉 1956, 5, 16. 중앙일보
5) 한편 이 시기에 이들에 대한 대규모 회고전이나 유작전을 개회했던 기록으로서는 '70년의 신세계 미술관에서 있었던 김은호 초대전과 '72년에 있었던 이상범 유작전 이외에도 '73년 허백련 회고전이, '74년 노수현 회고전, '75년 변관식 회고전, '76년 박승무 회고전, '78년 배렴 회고전이 모두 동아일보사 주최로 개최되었으며, '78년에는 박래현 유작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이같이 연이어 열리게 되었던 거장들의 '관념 경지에 이른 채묵'들은 당시의 화단뿐만 아니라 많은 일반 관람자들에게도 감동적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했으며, 동양, 한국의 자연경계가 지니는 무한성을 다시금 재인식케 하였던 것이다.
6)  '시공회(時空會)'의 결성은 모두가 홍대 동문들이긴 하였으나 동양화의 시급한 의식개혁에 대한 전위적이고 전진적인 개념들을 자아와 전통의 적극적인 가변을 위한 방법과 시각으로 채택함으로써, 묵림회의 대변환 이후로 또 다른 성격의 현대적 그룹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말하기를, "자신의 전적인 재평가를 위해서는 과감한 거부가 요청된다. …… 중략 …… 오늘의 예술 전체가 자기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로 오랫동안 그러한 요청과 과제를 외면해 왔다. 전통이라는 명분을 앞세워서 …… 그러나 이 전통은 흔히 인습, 그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 인습이 자아낸 갖가지 폐쇄된 관념의 올가미 속에서 오히려 무기력한 것이 되어 버렸다. …… 중략.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역사의지로서의 시간성과 조형의지로서의 공간성을 추구하고 체득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라고 하였다.
7) '71년에 서울신문사에서 기획했던 허백련, 김은호, 박승무,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여섯 분의 전람회는 '6대가'란 개념의 본격적인 계기가 되어서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그 출발은 역시 '40년 5월, 조선미술관이 기획한 '10명가 산수풍경화전' 이후 '40년대 초엽에 공공연히 불려져 왔던 것이다.
8) 이숙자, 박대성, 김아영, 정종해, 김호석, 김천영, 서정태, 송수련, 등은 모두가, '78, '79년도에 '중앙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했으며 김천영, 오용길 등은 '동아미술제'에서 등단한 작가들이다. 한편 이미 20여 년을 쌓아온 '국전'의 절대 권위적 영향력은 '78년 이전에 있어서는 거의 유일한 기성화단으로의 등용문이라고 할 만큼 강력하였는데, 전 70년대에 걸쳐서 국전을 통해 등단하였던 주요 작가들은 원문자, 이열모, 이규선, 신영상, 이영찬, 주민숙, 심경자, 이숙자, 이영수, 오용길, 송계일, 송수련, 이철주, 정종해, 이왈종, 김원, 황창배, 정치환, 이양원, 정은영, 정승섭, 오낭자, 홍순주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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