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을 갈며/마음고요

증상을 즐겨라

멍석- meongseog 2009. 4. 20. 14:20

 

 @ 2009년  멍석작 / 나비 꿈구다  ( 화선지에 수묵, 물감  80 x 50)

 

 

증상을 즐겨라

                             /  이승훈

 

 

  당신의 시엔 고민이 없어요 좀더 고민을 하세요 좀더 죽으세요 치욕도 견디고 수모도 당하고 진창이 되세요 너무 고와요 침도 뱉고 당신과 싸우세요 최근의 우리시엔 고민이 없어요 절망도 모르죠 고민도 절망도 광기도 없는 이 쓰레기들!

  물론 내 시도 쓰레기죠 젊은 환상파들도 고민이 없어요 환상은 상처를 먹고 삽니다 트라우마 질병 한숨 절벽을 먹고 살지요 그러나 이들의 시엔 상처가 없고 그러니까 감동도 없고 전통파들에겐 기대할 게 없고 실험파들도 모험을 몰라요 모험은 언어라는 법  속에서 이 법과 함께 이 법과 싸우며 추락하는 것 갈 데까지 가다가 죽는 겁니다 인생이 썩으면 예술이 되고 사회가 썩으면 예술이 된다고 말한 건 백남준 그러나 우리시는 썩을 줄 모르고

  부식을 모르고 부패도 모르고 피로도 모르고 한 마디로 죽음을 모릅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탄생을 모르죠 실험 도전 모험은 고독한 시도이고 실패하려는 시도이고 죽으려는 시도입니다 시쓰기는 결국 시를 배반하고 위반하고 폭로하는 행위입니다 최근엔 형식의 사상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비가 온다고 했지만 비는 안 오고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고 흐린 날 흐린 날이 좋았지만 이젠 지겹고 그동안 쓴 시도 지겹고 모두 사치고 쇼우고 허위죠 그건 내가 잘 알아요 문제는 형식이고 사상이고 형식의 사상입니다 문체 형식 스타일이 사상이고 사유이고 스타일이 사고하고 사유하고 사고치고 사유는 사고 우연 뜻밖의 사건입니다 이런 말도 개수작이죠 좋아요 개수작도

  이 정도로는 안돼요 나도 알아요 사는 건 희극코미디 난 지금 왼손에 담배를 들고 이 글을 쓰다가 입에 물고 쓰지요 옛날에 피우던 타르 1mg 에세를 위암수술 받고 최근엔 0.5mg 에세로 바꿨지만 문제는 이놈의 에세에선 담뱃재가 아무데나 떨어진다는 거야요 지금도 담배불똥이 종이에 떨어지고 부랴부랴 불똥을 재떨이에 털었지만

  하얀 종이에 불똥 자국이 생겼어요 이 자국이 형식이죠 불똥은 사라지고 사라진 불덩이 사라진 불덩이의 흔적이 형식일고 사유이고 문득 당신 생각도 나고 사유는 사라진 당신의 부재의 흔적이고 죽음의 흔적이고 이 흔적이 형식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이죠 죽음의 흔적 이것도 협잡인지 몰라요 흐린 날 흐린 날 내 시에도 고민이 없어요

 

 

  <<현대시>> 2008년 1월호

 

 

 

시음악출처;화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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